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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월이
오 년 전, 서하영은 대장군 서영배가 금이야 옥이야 아끼며 키운 외동딸이었다.

나라의 기둥이라 불릴 만큼 공을 세운 아버지는 어린 딸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며 길렀다. 덕분에 서하영은 밝고 당당한 성정을 지녔으나, 세상의 험난함을 알지 못한 순진한 아가씨이기도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서영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변화가 찾아온 것은 경림연(瓊林宴)이 열리던 날이었다.

그날 서하영은 아버지를 따라 입궁했다가 어화원에서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원 급제자인 하윤성을 만났다.

아직 관례도 올리지 않은 젊은 사내였지만, 그의 모습은 남달랐다.

달빛처럼 희고 단정한 장포를 걸친 그는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반듯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그는 동년 급제자들과 함께 시국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남다른 식견과 여유가 배어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조차 그의 빛나는 풍채를 가리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연모하는 이 앞에서 서하영은 제 마음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

하윤성을 향한 마음을 깨달은 뒤, 그녀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일부러 그와 마주칠 기회를 만들었다.

처음 하윤성은 그저 예의만 갖춘 채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태도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럼에도 서하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거절당할수록 오히려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서영배는 그런 딸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하윤성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본 뒤, 사위로 삼기에 부족함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바로 하윤성이 고씨 가문의 아가씨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씨 가문의 문벌은 결국 서씨 가문에 미치지 못했다.

서영배는 끝내 결심했다.

어느 날 궁중 연회가 끝난 뒤, 그는 술에 취한 하윤성을 서하영의 규방으로 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하윤성은 이불을 두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서하영을 바라보며,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서 장군의 수단이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그 말과 함께 그는 소매를 떨치고 돌아섰다.

혼사는 빠르게 정해졌다.

황제의 하명이 내려졌고, 서하영은 세상의 축복 속에서 성대한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신혼 첫날 밤.

하윤성은 그녀의 면사를 걷어 올린 뒤에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서하영, 이 혼인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그대와 나 모두 알고 있소. 앞으로 그대에게 마땅한 예우와 체면은 지켜주겠소. 허나 그 외의 것은 바라지 마시오.”

서하영은 알고 있었다.

하윤성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 여인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 자란 고씨 가문의 아가씨, 고예진이었다.

온화하고 순한 성품을 지닌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윤성의 마음에 자리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서하영은 믿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결국 진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자신이 한결같이 마음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차갑게 닫힌 하윤성의 마음도 열릴 것이라고.

그렇게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 어느덧 오 년.

그녀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온 마음을 다해 하윤성을 대했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 사이에도 분명 변화가 생길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세운 큰 공이 오히려 화가 되어 황제의 의심을 샀고, 정적들의 모함으로 적국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황제는 크게 노했고, 결국 아버지에게 유배령을 내려 평생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서씨 가문은 하룻밤 사이 몰락했다.

그제야 서하영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하윤성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는 황제가 새롭게 눈여겨보는 신하였다. 머지않아 승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나서준다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서하영은 급히 그의 서재로 향했다.

그러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고예진의 다급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성 오라버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곧이어 하윤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달리 한층 무겁고 엄숙했다.

“서 장군은 나라에 대한 충심이 깊은 분이네. 수년 동안 나라를 위해 변방을 지킨 분이거늘, 결코 적들과 내통할 리가 없다! 내가 가진 증거라면 그의 결백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르네. 지금 바로 입궁해 폐하를 뵙고, 이 사건을 다시 살펴 달라 청할 것이다!”

서하영은 숨을 삼켰다.

가슴 한편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하윤성이... 정말 아버지를 돕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어진 고예진의 말은,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그녀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윤성 오라버니, 부디 진정하세요! 이미 늦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서씨 가문을 벌하기로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지금 오라버니께서 나선다고 한들, 돌이킬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오라버니께 화가 미칠 수 있습니다. 벌써 잊으신 겁니까? 서 장군께서 어찌 오라버니께 혼인을 강요했는지 말입니다. 분명 오라버니께서 마음에 두신 사람은 저였습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억지로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 아닙니까! 헌데 오라버니께서는... 그들을 원망하지도 않으세요?”

“이제 서씨 가문은 무너졌고, 서하영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변방으로 유배된다면, 저는 떳떳하게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있습니다!”

“오라버니,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을 서로 놓치고 살아왔어요. 오라버니께서는 아쉽지도 않으신가요? 남은 평생을... 저와 함께하고 싶지 않으세요?”

서재 안에는 오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서하영의 마음은 서서히 얼어붙어 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하윤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불씨를 긋는 소리와 종이가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

순간, 서하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증거를 태우고 있어! 아버지를 살리고, 서씨 가문을 구할 마지막 증거를 태우고 있어!’

“안 돼...!”

서하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서재 안으로 뛰어들어 불이 타오르는 화로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불길은 번진 뒤였다.

그녀가 겨우 손에 넣은 것은, 고작 검게 그을린 종이 조각 몇 장뿐이었다.

하윤성은 그녀를 보고 순간 표정이 변했다. 그녀가 밖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서하영! 내 말 좀 들어보게. 내가 다 설명하겠네...”

“무엇을 설명한다는 겁니까?”

서하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에는 이미 무너진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윤성! 그대와 화리하겠습니다! 그대가 고예진과 함께할 수 있도록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허니 증거를 내어 주십시오! 제발... 그 증거를 제게 주십시오!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연로하신 분께서 어찌 변방의 추위를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며,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듯 하윤성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하윤성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눈빛에 순간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힘껏 내리쳤다.

순간, 서하영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변방으로 떠난 뒤였다.

하윤성은 그녀의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버지의 일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다. 화리하겠다는 말 또한 네가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내뱉은 말임을 안다. 네가 나를 그토록 마음에 두고 있는데, 어찌 진심으로 나와 갈라서려 하겠느냐. 과거 네 아버지가 나를 억지로 너와 혼인시킬 때, 나 역시 원망한 적이 있었다. 허나 이제 와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추고 싶지는 않다. 난 예진이를 평처로 들일 생각이다. 하여 앞으로 우리 세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잘 살자.”

하윤성은 그녀가 울며불며 화를 내고, 소란을 피우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서방님을 대신해 혼례식을 준비하겠습니다.”

그 순간 하윤성은 서하영이 결국 체념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라 여겼다.

이윽고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

그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던 서하영의 눈빛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때 자신을 향한 애정과 설렘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고, 끝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오직 서하영만이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하윤성에게 향했던 자신의 마음도, 기대도, 미련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치 다 타버린 촛불이 마지막 불꽃과 함께 사라지듯,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그를 향했던 모든 감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를 놓아줄 것이다. 그가 연모하는 이와 혼인할 수 있도록 놓아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릴 것이다.

서로 알지 못했던 그때로.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그때로.

그날 오후, 서하영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경조부로 향했다.

그리고 화리를 청하는 소지를 올렸다.

하지만 나라의 법도상, 사내가 화리서를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여인이 먼저 화리를 청하려면 경조부에서 철정형을 받아야 했다.

날카로운 쇠못이 빼곡히 박힌 판 위를 맨몸으로 굴러야 하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목숨을 걸 만큼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비로소 화리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하영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경조부에 뜻을 밝혔다.

이달 말이면 형이 집행된다.

화리서를 손에 넣는 순간, 그녀는 하윤성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변방으로 가서 아버지를 찾고,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하윤성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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