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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مؤلف: 조이

제1화

مؤلف: 조이
문우빈은 단숨에 고가은 앞에 섰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런 일을 당했으면서 왜 나한테 전화도 안 했어?”

고가은은 가볍게 웃었다.

“전화했으면 받았어?”

전날 퇴근길이었다.

한 노인이 갑자기 고가은의 차 앞에서 넘어졌다. 고가은이 내려서 부축하려 하자, 노인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을 쳐 놓고 도망가려고 해? 아가씨가 날 쳤잖아!”

블랙박스와 CCTV가 고가은의 무고함을 증명했지만, 경찰서에서는 절차상 보호자 확인과 신원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가은은 가족이 없다고 했다.

경찰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혼인 기록을 확인해 문우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 꺼짐.

수십 번을 걸어도 결과는 같았다.

문우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젯밤 채원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같이 있었어. 채원이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핸드폰을 꺼 뒀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안해.”

“괜찮아.”

고가은이 말했다.

“애초에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당신은 자기 일 보면 돼.”

너무나 담담한 말투였다.

눈빛도 지나치게 고요했다. 물결 한 번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수와도 같았다.

문우빈은 고가은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뜨거운 남자의 손에 거칠게 힘이 들어갔다.

고가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왜 화를 안 내?”

그녀를 똑바로 보는 문우빈의 눈빛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과,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고가은은 그 모습이 우스웠다.

“내가 왜 화를 내야 해? 당신은 이유를 말했고, 나는 이해했어. 화낼 일이 없잖아.”

“여보...”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

그녀는 손을 빼내고 문우빈을 지나 차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우빈은 그 자리에 서서 고가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만에 본 그녀는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입고 있는 셔츠도 어깨와 허리가 헐거운 느낌이었다.

예전의 고가은은 문우빈이 조금만 외면해도 눈시울을 붉히면서 따지고 들었다.

“여보, 나를 단 한 번도 소중하게 생각한 적 없어?”

그때 문우빈은 그녀가 일을 크게 만든다고 여겼고, 아직 철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제 고가은은 따지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문우빈이 무엇을 말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라고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우빈은 마음이 불편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기사가 앞에서 운전하는 동안, 고가은은 뒷좌석에 앉아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차에 타자마자 문우빈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둘만 있으면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던 모습도 없었다.

문우빈이 차갑게 대답해도 혼자 한참을 떠들던 예전의 고가은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의 고가은은 옆자리에 문우빈이 없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문우빈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그 일 때문에 삐쳐 있는 거야?”

고가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눈빛은 평온했다.

“아니. 다 지난 일이잖아.”

“그럼 왜...”

“여보.”

고가은이 말을 끊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예전처럼 매일 당신한테 매달리길 바라? 아니면 지금처럼 화 안 내고 안 울면서, 당신이 마음껏 숨 쉴 수 있게 두길 바라?”

문우빈은 대답하지 못했다.

문우빈은 당연히 그녀가 조용하길 바랐고, 진채원 일로 날마다 다투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그녀가 진짜 그렇게 변하자,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변한 것 같아서.”

그가 조용히 말했다.

고가은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했나?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을 사랑할 때와 사랑하지 않을 때의 모습은 원래 같을 수 없으니까.’

차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문우빈이 뭔가 더 말하려던 때, 핸드폰이 울렸다.

진채원이었다.

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어디야? 나 쇼핑몰인데 산 게 너무 많아서 못 들겠어. 와서 데리러 와 주면 안 돼?”

문우빈은 고가은을 흘끗 보았다.

고가은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문우빈은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채원아, 너도 성인이야. 자꾸 나한테 기대지 마. 게다가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오빠가 나를 그렇게 오래 예뻐해 줘서, 나도 습관이 됐단 말이야.]

진채원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와 달라고 하면 한 번도 거절 안 했잖아.]

“예전은 예전이야.”

문우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때는 네가 내 여자친구였고, 지금 나는 결혼했어.”

[결혼?]

진채원이 비웃었다.

[오빠 마음속에 정말 그 여자가 있어? 오빠,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지 마. 안 오면 다른 남자한테 들어 달라고 할 거야. 나 도와주겠다는 남자야 널렸거든.]

문우빈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진채원은 문우빈을 너무 잘 알았고, 문우빈이 가장 못 견디는 것이 채원이 다른 남자를 찾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 있어!”

그는 이를 악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문우빈은 고가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보, 나...”

“택시 타고 갈게.”

고가은은 이미 차 문을 열고 있었다.

“가서 데려와.”

동작이 너무 빨라서 문우빈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여보!”

그가 차에서 내려 따라붙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나랑 채원이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래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고, 양가 부모님도 다 알아. 완전히 선을 끊을 수는 없잖아.”

“알아.”

고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그녀는 늘 ‘알아’, ‘이해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전혀 사람 같지 않았고, 감정이 빠진 기계 같았다.

문우빈은 그렇게 죽은 듯한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진채원의 전화가 다시 왔다. 재촉하는 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내가 나중에...”

나중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고가은은 이미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택시에 올라 문을 닫으면서, 문우빈에게 다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택시가 떠났다.

문우빈은 그 자리에 서서 택시의 후미등이 차량들 사이로 사라지는 걸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정말로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

그 시각, 택시 안에서 고가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 인사팀이었다.

[통역사님, 해외 파견 심사가 승인됐습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는 축하가 묻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이번엔 유럽 본부입니다.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다만... 남편분은 괜찮으세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두 분이 떨어져 지내셔야 할 텐데요.]

고가은은 창밖의 네온 불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제 남편이 없어요. 파견 신청한 날에 이혼신고도 같이 진행했습니다. 접수 확인서만 나오면 바로 떠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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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24화

    음성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그러나 곧 자동으로 다시 재생됐다.“여보, 오늘 당신 생일이잖아. 케이크 만들었어. 돌아오면 같이 먹자.”“아무리 늦어도 기다릴게.”한 번.또 한 번.문우빈이 잊고 지나간 수많은 생일마다, 고가은은 혼자 케이크를 앞에 두고 기다렸을 것이다.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고, 날이 밝을 때까지.끝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 녹아내린 생크림과 딱딱하게 굳은 빵을 혼자 조용히 먹어 치웠을 것이다.문우빈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말라붙은 눈가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지만, 입꼬리만은 희미하게 올라갔다.아주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떠올린 사람처럼.문우빈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품에 안긴 차가운 액자를 향해.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음성 메시지를 향해.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몇 글자를 토해 냈다.“가은아...”“생일... 축하해...”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다.품 안의 액자가 문우빈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액자가 부드러운 이불 위로 떨어졌고, 낮고 둔한 소리를 냈다.오래된 핸드폰에서는 고가은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반복되고 있었다.“기다릴게.”“기다릴게.”...창밖의 달빛이 차갑게 흘러들었다.텅 빈 침대 위로, 엎어진 결혼사진 위로, 오래된 핸드폰 위로 창백한 빛이 내려앉았다.침대 머리맡의 생체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길게 울렸다.심전도 선은 곧게 뻗은 한 줄로 멈춰 섰다.더 이상 어떤 변화도 없었다....같은 밤하늘 아래.외국에 있는 어느 개인 소유 섬에서는 아직 불꽃놀이가 이어지고 있었다.고가은은 신태경의 품에 안긴 채, 밤하늘 가득 터지는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무슨 생각 해?”신태경은 고개를 숙여 고가은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고가은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곁에 있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23화

    몇 년 뒤.외국에 있는 어느 개인 소유 섬.햇살, 모래사장, 푸른 바다, 하얀 건물.모든 것이 엽서 속 풍경 같았다.고가은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열렸다.작고 따뜻한 결혼식이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했다.고가은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디자인은 단순하고 품격 있었고, 긴 트레인은 없었지만 가느다란 허리와 고운 어깨선, 목선을 꼭 알맞게 살렸다.베일은 옅은 샴페인색이었다. 햇빛 아래 부드러운 광택을 머금었다.고가은은 꽃으로 장식된 아치 아래에 서 있었다. 손에는 하얀 은방울꽃 다발을 들고, 밝고 환하게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행복과 평온이 담겨 있었다. 불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신랑은 흰색 정장을 입고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깊은 눈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고, 눈 속의 사랑은 흘러넘칠 듯했다.주례가 온화한 목소리로 서약을 읽었다.“고가은 씨, 신태경 씨를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풍족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그를 사랑하고 돌보며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까?”고가은은 신태경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미소가 번졌다.“네, 맹세합니다.”목소리는 맑고 굳건했다. 앞으로 펼쳐질 삶을 향한 기대가 그 안에 가득했다.“신태경 씨, 고가은 씨를 아내로 맞아...”“네, 맹세합니다.”신태경은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신태경은 고가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남은 평생 당신을 사랑하고, 지키고, 오늘처럼 행복하게 해 줄게.”하객석에서 따뜻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두 사람은 반지를 나누어 끼고, 신태경은 신부에게 입을 맞췄다.박수 소리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저녁 만찬은 바다를 마주한 잔디밭에서 열렸다.별이 가득한 밤하늘, 촛불,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 와인, 가족과 친구들의 축복까지.모든 것이 완벽했다.부케를 던지는 순서가 되자, 고가은은 기대에 찬 얼굴로 서 있는 미혼 친구들을 보며 웃었다. 그러다 몸을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22화

    다시 몇 해가 흐른 어느 늦가을.도심의 가장 호화로운 호텔 연회장에서 대형 자선 만찬이 열렸다.고가은은 특별 초청 귀빈이자 명예 고문으로 참석했다.문우빈의 ‘가은재단’은 이번 만찬의 공동 주최 기관 중 하나였다.만찬이 시작되기 전, 백스테이지 복도에는 사람들이 오갔다. 직원, 귀빈, 기자들이 분주히 지나쳤다.고가은은 재단 담당자와 잠시 뒤 무대에서 할 발언의 세부 내용을 낮은 목소리로 조율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대기실 쪽으로 걸었다.모퉁이를 돌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마른 체형이었다. 몸에 맞지만 조금 낡아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머리는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긴 채, 손에 든 서류를 고개를 숙여 읽고 있었다.두 사람은 좁은 복도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쳤다.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시간이 그 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문우빈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얼어붙은 조각상처럼.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남자의 눈은 눈앞의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탐욕스럽게, 여자의 모습을 뼛속에 새기려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몇 년 사이, 고가은은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20대 시절의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세월을 관통하면서 다듬어진 자신감과 여유,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었다.샴페인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살짝 웨이브가 지면서 어깨에 흘렸다. 잘 꾸민 화장에 입가에는 늘 그렇듯 온화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가 얹혀 있었다.잘 닦인 진주처럼 은은했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빛났다.문우빈의 입술이 움직였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듯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가슴 안에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갈비뼈가 아플 정도였다.그는 늙었다.초췌해지기도 했다.아직 30대였지만 눈가에는 잔주름이 생겼고, 관자놀이 근처에는 흰머리 몇 가닥까지 보였다.눈 속의 빛은 완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21화

    몇 년 뒤.국제 통역계의 최고급 포럼이 S국에서 열렸다.세계 각국의 정상급 통역사, 학자, 정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고가은은 최연소 명예이사이자 수석 동시통역사로 초청받아 개막 기조연설을 맡았다.조명 아래, 그녀는 몸에 맞게 재단된 펄 화이트 수트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는 우아하게 올려 묶어 매끈한 이마와 긴 목선을 드러냈다.연단 뒤에 선 그녀는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수없이 번쩍이는 카메라 앞에서도 여유롭고 침착했다.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모국어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논점은 날카로웠고 견해는 독창적이었다. 필요한 인용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자신감 있고 우아하면서도 전문적이었다.그녀는 그 자리의 당연한 중심이었다.연설이 끝나자 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졌다. 박수가 오래 이어졌다.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지적인 분위기의 젊은 학자가 하얀 은방울꽃 한 다발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꽃을 그녀에게 건넸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호흡이 잘 맞는 사람들다운 미소였다.객석 곳곳에서 셔터 소리가 이어졌다. 아름다운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다.그 학자는 유럽 언어학계의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젊고 유능한 데다가 학계의 명문가 출신이었고, 본인 역시 품격 있는 태도와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다.그와 고가은은 여러 국제회의에서 함께 일했다. 협업은 완벽했고, 개인적인 친분도 깊었다.언론은 두 사람을 ‘업계의 쌍두마차’라 불렀다.재능의 결이 맞고,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라고 썼다.두 사람이 지기인지 연인인지는 기사에서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상상할 여지는 충분히 남겼다.하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고가은의 삶은 이제 완전히 새롭고,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높이에 올라서 있었다.성공한 커리어, 빛나는 존재감, 그녀를 알아보고 존중하는 훌륭한 동료들.포럼은 사흘 동안 계속됐다.마지막 날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물결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갔다.가장 멀고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검은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20화

    구급차 안에서 의료진은 급히 상처를 지혈하고 생체 신호를 확인했다.고가은은 옆에 앉아 있었다. 손과 외투에는 문우빈의 피가 묻어 있었다. 끈적하고 따뜻했으며, 피비린내가 진하게 났다.그녀는 들것 위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새하얗고 두 눈은 감은 채였다.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단단히 다문 입술만이 아주 희미하게 긴장을 드러냈다.문우빈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웅얼거렸다.“가은아... 미안해...”“아이야... 미안해...”“가지 마... 나 버리지 마...”목소리는 부서져 있었고, 죽음에 가까운 절망이 묻어 있었다.고가은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았다.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밤 풍경 사이에서 그녀의 옆얼굴은 차갑고 단단해 보였다.병원에 도착하자, 문우빈은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켜졌다.고가은은 복도 긴 의자에 앉았다. 손과 외투의 피는 이미 말라서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그녀는 핏자국을 닦지도 않은 채 조용히 앉아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표정은 무거웠다.“환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한 곳은 비장에 닿았고, 다른 한 곳은 장을 관통했습니다. 출혈도 많아서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습니다.”“게다가...” 의사는 잠시 멈추고 고가은을 바라보았다. “환자의 생존 의지가 매우 약해 보입니다. 이대로면 위험합니다.”고가은이 눈을 들어 의사를 보았다.“가족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환자의...” 의사가 조심스레 물었다.“전처입니다.” 고가은은 평온하게 말했다.의사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말을 이었다.“지금 두 분 관계가 어떻든, 가능하다면 환자를 격려해 주십시오. 살고자 하는 의지를 끌어내야 합니다. 현재는 그 의지가 환자가 버티는데 가장 큰 변수입니다.”고가은은 오래 침묵했다.의사가 그녀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오래.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알겠습니다.”의사와 뒤늦게 도착한 문우빈의 심리 주

  • 당신이 없는 세상 참 좋다   제19화

    비서는 전화를 쥔 채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기억과 수액에 기대 겨우 버티는... 말라 버린 눈으로 텅 빈 곳만 바라보는 남자를 보면서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1년 뒤.고가은은 뛰어난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본사의 지시로 귀국했다. 중요한 국제회의의 통역 업무를 맡기 위해서였다.회의 장소는 도심 최고급 컨벤션센터였다.문우빈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회의 중이었다.비서가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전하자, 그가 쥐고 있던 만년필이 멈췄다. 만년필 펜촉이 문서 위에 길게 선을 그어 버렸다.문우빈은 한참 침묵하다가 손을 들고 회의를 계속하라고 신호했다.하지만 남은 회의 내내 그는 분명히 집중하지 못했다. 시선은 자꾸 창밖으로 흘렀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담배 한 갑을 통째로 태웠다.그런 뒤 회의장 직원 한 명을 몰래 매수했다....회의 당일, 문우빈은 회의장 가장 뒤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그림자 속에 자신을 숨겼다.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고가은을 방해할 수도 없었다.그저 그렇게 몰래, 멀리서 한 번만 보고 싶었다.회의가 시작되자, 고가은은 동시통역사 중 한 명으로 투명한 통역 부스 안에 앉았다.그녀는 단정한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묶었고, 헤드셋을 낀 채 무대 위 발언을 집중해서 들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고,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정확하고 유려한 통역이 음향 장치를 타고 회의장 전체에 전달됐다.자신감 있고 침착한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문우빈은 탐하듯 바라보았다.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고가은의 모습을 영혼에 새기려는 사람처럼.심장 근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동시에 스스로 벌을 받는 듯한 이상한 만족도 있었다.‘나를 사랑했던 이 여자... 원래 이렇게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내가 없어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구나.’회의는 하루 종일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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