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습은 태연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앞쪽 세 번째 길목에서 우회전한 뒤 왼쪽 두 번째 골목으로 가세요. 그곳이 바로 흥유항입니다.”“고맙습니다.”소한은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감사를 표한 뒤 즉시 사람들을 이끌고 흥유항을 향해 말을 몰았다.그는 방금 전에야 소하가 단이를 데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어제 하만촌에서 그가 본 여인은 소하가 교묘하게 준비한 가짜였을 뿐.정말이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수작이었다.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광기 어린 희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는 확신했다.이제 곧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얼마 지나지 않아 소한은 사람들을 이끌고 흥유항에 도착했다.그는 작은 저택의 문을 단숨에 밀어젖히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가슴속에서는 강렬한 충동이 꿈틀댔다.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싶었다.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으나 그녀가 놀랄 가봐 격한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그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대청을 지나고 정원을 지나자 작은 뜰이 보였다.그곳을 넘어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그녀가 반드시 있어야 할 방.예상대로라면 그녀는 지금쯤 그 방에 숨어있을 것이다.문을 힘껏 열었다.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은 김단이 아니었다.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싸늘한 한기를 두르고 서 있는 한 사람.소하였다.그는 손을 뒤로 단단히 깍지 낀 채 차디찬 눈빛을 내리깔고 있었다.“단이는 떠났어.”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피가 날 듯 꽉 쥔 주먹이 그의 착잡한 심정을 절실히 보여주었다.그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언제 떠났는지, 누구와 함께 떠났는지조차도.단지 그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이곳에 없었다.소한은 순간 멍해졌다.심장이 차가운 얼음 물에 내던져진 듯했다.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던 그 격한 감정이 단칼에 식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빠른 걸음으로 뜰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한 칸, 또 한 칸.그는 집 안의 모든 방을 샅샅이
이번에 최지습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흥유항은 바로 어제 김단이 머물렀던 곳이다.소한이 그곳에 도착하면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설령 방금 전에 아무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한이라면 반드시 마을 전체를 샅샅이 수색할 것이다.그러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셋째 도령과 합류하고 다시 변장하기만 한다면 소한을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성을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멈춰라!”최지습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그 순간.쉭—!등 뒤에서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를 향한 공격이었다.최지습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단순한 직감만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슝!긴 화살이 그의 귀를 스치듯 날아갔다.김단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그리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질풍처럼 달려오는 소한이었다.그의 손에는 활이 들려있었고 다시 한번 화살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이번에도 화살 끝이 겨눈 것은 최지습이었다.김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고민할 새도 없이 즉시 몸을 일으켜 두 팔을 활짝 벌렸다.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자신의 몸으로 막으려 했다.소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그 순간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안 돼!”그가 본능적으로 외쳤다.그 화살은 그녀의 심장을 뚫고 지나갈 것이다.바로 그때 최지습이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김단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슥—!화살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허공에 남겨진 것은 깊게 찢어진 옷자락뿐.김단은 순간적으로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간신히 균형을 잡고 일어서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녀와 최지습을 완전히 포위한 소한과 그의
김단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리고 바로 소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주위는 온통 그의 사람들뿐이었다.그는 암묵적으로 그녀에게 얘기하고 있었다.오늘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고.그녀가 끝까지 버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저 그녀 자신과 다른 이들을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최지습은 분명하게 느껴졌다.방금 전까지 그의 등 뒤에서 힘겹게 옷깃을 잡아당기던 가벼운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그 순간 김단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백도령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제가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떨림이었으나 최지습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녀의 두려움과 체념.그녀가 미처 감추지 못한 억울함까지.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소한 역시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눈앞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 사내 역시 김단을 포기할 수 없겠지.그런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김단은 이미 그의 것인데그 순간 소한의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스쳤다.그는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이리 와.”짧디짧은 세 글자.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그는 승리자의 시선으로 줄곧 최지습을 바라보았다.김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그녀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 최지습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그의 시야가 한순간 흐려졌다.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소한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나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는 희열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소한의 앞에 선 그녀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죽을 고비를 넘긴 뒤 결국 다시 이 지옥으로 돌아온 느낌.지난 한 달
최지습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넓은 방 안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둘째 도령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혹시 다들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소?”그는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수없이 많은 밤, 지독한 그리움 속에서 한양을 떠올려 보곤 했다.특히 산적들의 수배령을 보았을 때 더더욱 그랬다.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호랑이군은 그들의 피로 쌓아 올린 명성이었다.그 이름이 몇몇 흉악한 산적들의 손에 더럽혀질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한양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이곳은 너무나 평온했다.한양으로 돌아간다면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마주쳐야 할 것이다.어쩌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형제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생각해 본 적 있소.”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열 번째 도령이었다.그는 최지습을 바라보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처음 원군님을 따른 건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소.”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사냥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나도 생각해 봤소.”“나 역시 마찬가지요.”순식간에 몇몇 도령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그들은 과거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며 최지습을 따라 잔장에 섰다.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는 것이지 소박한 삶이 아니었다.그들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피가 끓고 있었다.그들은 이 작은 마을에서 서서히 잊힐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지습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그의 시선은 아직 입을 열지 않은 몇몇 도령들에게 닿았다.그들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눈치었다.최지습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소하는 말 위에 앉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마차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곁에 있는 소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단이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지?”소한은 소하를 흘끗 바라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그러나 소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소한은 단이를 다시 그 어둡고 외딴 저택에 가두려 할 것이다.그는 시선을 앞으로 둔 채 차가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혹시 단이가 다시 장양강에 몸을 던지면 어쩌려고 그래?”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김단은 결코 쉽게 굴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이번에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다음번에도 이런 행운이 따를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김단이 장양강에 떨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그 고통을 이미 한차례 겪어보지 않았던가.소한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소하의 말은 옳았다.그 또한 그것이 현실로 될까 두려웠다.김단과 멀어진다면 그녀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짓눌렀다.그가 정말로 그녀를 감금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그저 그녀와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한 기회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소하는 곁눈질로 소한의 굳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 소한은 흔들리고 있었다.“네가 그럴수록 단이는 더욱 반항할 거다. 나도 아는 사실을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으니까.”그제야 소한은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낮고 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무엇을 그리 신경 쓰십니까? 온전히 저를 위해 하시는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소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당연히 아니지. 내가 네 약혼녀를 가로챘고 넌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잖아. 그러니 오늘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빚진 건 없어.”소하는 이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겠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소하의 담담한 태도와는 달리 소한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한이 말없이 굳어 있자 소하는 다시
소한은 못마땅했지만 결국 손을 들어 주먹을 맞부딪쳤다.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고 보름이 지나서야 한양에 도착했다.한양 외곽의 별채로 보내질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머물던 작은 저택에 와있었다.김단은 소한이 잠시 이곳에 머물려고 한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이내 울음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와닿았다.“아가씨!”김단은 흠칫 놀라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발이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작은 그림자가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어린 소녀의 여린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아가씨… 저는 알고 있었어요. 아가씨가 살아 계실 거라고.”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울음소리에는 그간 쌓인 깊은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매일같이 아가씨를 기다렸어요. 드디어 돌아오셨군요.”김단의 눈가도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품에 안긴 숙희를 토닥여주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영영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그녀가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그저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그때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 두 사람을 감쌌다.“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는 건 어떻겠소?”그제야 숙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그녀는 얼른 김단을 놓아 주고 손을 꼭 쥐었다.“큰 도련님께서 이각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가씨께서 오늘 돌아오신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침 일찍부터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설화떡과 매실주를 사 왔어요.돼지 곱창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걱정 마세요. 왕철에게 맡겼으니 곧 씻어서 요리해 드릴게요.”그녀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김단은 그런 숙희를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했다.코끝이 시큰하고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뒤따르던 소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혼인 관계를 정리하기 전 그 역시 이렇게 김단을 지켜보곤 했었다.지금도 그때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했다.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김단은 그가 이곳에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곳에는 정암이 심어둔 매화나무가 서 있었다.여기는 온전히 정암의 터이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아마도 며칠 간의 고단한 여정이 그를 이렇게 바꿔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날카롭던 청년의 눈매는 한층 더 깊어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청춘 시절에 볼 수 없었던 침착함이 드러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차가운 무관심 대신 조금은 온화해진 느낌이었다.그는 여전히 소한 그 자체겠지만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김단도 많이 변해있었다.과거의 김단이었다면 소한을 마주쳤을 때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기쁨에 겨워하며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며 쉴 새 없이 재잘댔었겠지만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소한은 옆에 늘어뜨렸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는 김단의 무심한 태도를 여러 차례나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러주길 바랐다.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잠시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소한은 입을 열었다.“한 가지 꼭 전해야 할 일이 있소. 임원은 원래 진산군 댁의 적녀가 아니었소.”그러자 김단은 평온하게 그 말을 끊으며 차분하게 답했다.“알고 있습니다.”그 말에 소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김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그들의 약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그녀와 자신은 처음부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다고.만약 김단이 이를 깨닫는다면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믿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고?소한의 눈동자 속에는 당혹감이 스쳐갔다.그는
“단이는 당신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차디찬 목소리가 소하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그곳에는 소한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고 날선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있었다.그가 나타난 순간 임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소한! 또 너냐!”그는 격분하여 병사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려 했다.“자네가 김단을 감금했잖소! 죽음까지 몰아넣었던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고 하는 것이오? 장소를 바꿔서 감금하면 다인 것이오?”진산군 또한 간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한아! 아니지 소 장군! 단이를 보게 해다오! 단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단이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소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그 순간 임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이 멎을 뻔했다.임학은 차가운 눈으로 소한을 바라보았다.“뭐라고 했소?”심지어 소하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이내 과거 김단이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을 떠올렸다.그녀는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그때부터였을까?임씨 부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요? 단이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부터요?”“명희가 죽었을 때부터요.”소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희가 죽기 전 모든 것을 단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그 순간 임학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오랫동안 머릿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그날 김단이 자신의 앞에서 말없이 흐느끼던 모습.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때 그는 김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른 채 오히려 그녀를 다그쳤다.임원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었다.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