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한 지 3년, 배은혁이 가장 잘하는 건 언제나 임서하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서하를 탐탁지 않아 하고, 지도교수는 결혼을 선택한 그녀에게 실망했지만, 서하는 여전히 자신의 진심으로 남편의 마음을 데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남편의 첫사랑이 다름 아닌 도련님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서하는 아이를 갖고 싶었다. 적어도 은혁과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하에게 돌아온 대답은 ‘자격이 없다’라는 말이었다. 그보다 더 비참하고 우스운 말이 있을까? 결혼기념일 당일, 서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연구에 몰두하고, 대회에 출전하여 상도 타고, 나라에 공헌하기로. 빛나기 시작한 서하 주위엔 뛰어난 남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3년 후, 서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미친 듯한 얼굴로 자신을 막아선 은혁을 마주했다. “당신... 임신했어?” 서하는 비웃듯 미소 지으며,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은혁을 바라봤다. “내 아이를 낳는 게, 전남편인 당신과 무슨 상관인데?”
View More민석의 옆에는 눈에 띄는 젊은 여자가 붙어 있었다.큰 키와 곧은 몸 선에,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무용 전공자 특유의 느낌이 났다.서하는 마침 식당에서 나오는 길이었다.옆에는 신애와 강민이 함께 걷고 있었다.신애는 서하가 연구팀 명의로 직접 영입한 인력이었다.해외 연수 기회는 놓쳤지만, 전공 실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무엇보다 서하와 호흡이 잘 맞았다.그래서 서하는 연구팀 구성원으로 신애를 데려왔다.“언니, 저쪽 남자분 되게 잘생겼어요.”신애가 서하의 팔을 살짝 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하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겼다.민석이었다.먼저 서하를 알아본 쪽은 민석이었다.캠퍼스 안에서도 서하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민석 옆에 있던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민석의 팔을 흔들었다.“오빠, 어디 봐요?”민석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름다운 게 보이면 보는 거지.”“우리 학교 교수님이래요.”여자가 덧붙였다.“이혼했고, 애도 있다던데요. 오빠 취향은 아니잖아요?”민석은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여자가 재빨리 말했다.“담배 냄새 싫어요.”민석은 여자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싫으면 좀 떨어져.”여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더 말하지 않았다.여자가 민석 곁에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돈이었다.민석이 진심으로 마음을 주면 더 좋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그래도 민석은 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인색하지 않았다.여자에 대한 민석의 씀씀이는 나쁘지 않았다.서하를 확인한 민석은 턱으로 여자를 가리켰다.“이제 가.”민석은 요즘 꽤 오랫동안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그 이유를 따지자면, 결국 구아정 때문이었다.아정은 나이가 어렸지만,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민석이 여자를 만나면, 아정이 나서서 하나씩 관계를 깨뜨렸다.겉으로는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존중해 달라’는 이유였다.민석은 애초에 아정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예전처럼 가볍게 사람을 만나며 지낼 수 있을 거
은혁은 신호등이 바뀌지 않고 빨간불이 조금만 더 오래 켜져 있길 바랐다.차가 막혀서 속도가 더 느려지기를 바랐다.그러면 서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테니까.하지만 아무리 속도를 줄였어도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서하가 차에서 내리며, 컵도 함께 들고 내렸다.컵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맛있었어. 고마워.”은혁도 차에서 내려 서하 앞에 섰다.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그 강민 학생은... 졸업하지 않았어?”‘오늘 왜 학교에 있었던 거지.’‘게다가 서하랑 그렇게 오래, 전문적인 얘기를 하고.’서하의 표정은 차분했다.“아, 강민. 앞으로 나랑 같이 과제 연구에 참여할 거야.”“같이?”은혁의 눈빛이 즉각 굳어졌다.“강민이 당신 좋아하잖아.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일 되겠어?”서하가 바로 대답했다.“강민은 일과 개인감정을 섞는 사람이 아니야.”“난 강민이...”서하는 은혁의 말을 끊었다.“이건 내 일이야. 지금은 강민이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게 될 수도 있어.”은혁은 말문이 막혔다.서하는 이어서 말했다.“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근데 배 대표님도 일 바쁠 텐데, 앞으로는 굳이 나 데리러 안 와도 돼.”서하는 손을 내밀었다.“차 키 줘.”은혁은 그 말에 담긴 거절을 분명히 느꼈다. 급히 말했다.“나 지금 그렇게 바쁘지 않아. 아까 한 말도, 다른 뜻은 없었고...”“알아.”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그냥 매일 데리러 오게 하는 게 미안해서 그래. 차 키 줘.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출퇴근할게.”서하의 손은 그대로였다. 거두지 않았다.은혁은 알았다.오늘, 자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걸.강민을 보는 순간, 은혁은 평소의 이성을 전부 잃었다.은혁은 서하를 천천히 다시 얻을 생각이었다.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었다.하지만 서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리고 서하 또한 은혁의 의심과 불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당신을 못 믿는 건 아니야
소진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응, 나중에 다시 만나면 다른 사람 찾을 거야. 하선우보다 몸 더 좋은 사람, 말도 잘하는 사람으로. 진짜 열받게.”졸음이 듬뿍 묻은 목소리였다.서하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자. 자.”소진은 금세 잠들었다.방 안이 조용해졌지만, 서하는 오히려 쉽게 잠들지 못했다.서하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하나씩 떠올렸다.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난도가 높았지만, 서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문제는 따로 들고 있는 또 하나의 과제였다.예전에 서하가 동경하던 한 과학자도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과제 연구에 투자한 비용도 상당했고, 결과적으로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무엇보다 장비가 문제였다.연구에 필요한 기계들을 사는 데에는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이 들었다.그래서 지금 당장은 엄두를 내지 않기로 했다.다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자료와 데이터 정도는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생각을 거듭하다가, 서하는 한참 뒤에야 잠에 들었다.잠들기 직전, 은혁의 얼굴이 불쑥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그 생각이 정말 스쳐 지나간 건지, 아니면 아예 떠올리지 않았던 건지, 서하도 확신이 없었다....강민이 서하에게 고백했던 날 이후, 강민이 서하의 손목을 붙잡았던 그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친 적이 없었다.그래서 서하는 월요일 아침에 기중환 교수의 연구실에서 강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기중환 교수는 서하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고, 강민 역시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인재였다.두 사람이 함께하면 연구 효율이 훨씬 올라갈 거라는 판단이었다.기중환 교수는 강민이 서하에게 품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까지는 알지 못했다.순수하게 연구적인 판단이었다.강민이 걱정했던 건 하나였다.서하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자신과 거리를 두지 않을까 하는 점.하지만 다행히도, 서하는 철저히 공과 사를 구별하고 업무적으로 움직였다.강민과 함께 향후 일정과 역할
서하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진은 여전히 이한 옆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이한은 해외에서 자랐고, 서하는 어릴 때부터 이한에게 이중 언어로 교육했다.영어 그림책 정도는 이한에게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다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이한이 평소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훌쩍 넘겼고, 낮에 이것저것 많이 놀아 피곤한 상태였다.잠깐 낮잠을 자긴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졸려 보였다.서하가 옆에서 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한의 작은 머리가 점점 앞으로 쏠렸다.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새처럼, 천천히, 반복해서.서하와 소진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이한을 침대에 눕히자, 이한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소진은 그날 집에 가지 않았다.밤은 서하와 함께 보냈다.불을 끄고 누운 뒤에야, 서하가 물었다.“하 변호사님은 언제 돌아온대?”“돌아와서 뭐 하게.”소진이 나른하게 대답했다.“외국에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내가 쪼아대는 일도 없고, 집안 어른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그렇게 말하지 마.”서하가 조용히 말했다.“너랑 하 변호사님이 잘 지내면, 해결 못 할 문제가 뭐가 있어. 그러니까 하 변호사님이 나간 거잖아.”“넌 생각이 너무 단순해.”“네가 ‘예스’만 하면 되는 문제 아니야?”소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하선우 어머니가 나 찾아온 적 있어.”서하의 눈이 커졌다.소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헤어지라고 하신 건 아니야. 근데 며느리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더라. 결혼하면 집안 돌보고, 남편 내조하고, 밖에서 일하면 안 되고, 3년 안에 아이 둘.”서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소진이 그런 삶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이 문제를 떠나서, 일을 그만두라는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소진은 타고난 일 중독자였다.소진 인생의 절반 이상은 일이 주는 성취감으로 채워져 있었다.“그 얘기, 하 변호사님한테는 했어?”서하가 물었다.“해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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