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그가 이곳에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이곳에는 정암이 심어둔 매화나무가 서 있었다.여기는 온전히 정암의 터이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아마도 며칠 간의 고단한 여정이 그를 이렇게 바꿔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날카롭던 청년의 눈매는 한층 더 깊어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청춘 시절에 볼 수 없었던 침착함이 드러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차가운 무관심 대신 조금은 온화해진 느낌이었다.그는 여전히 소한 그 자체겠지만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김단도 많이 변해있었다.과거의 김단이었다면 소한을 마주쳤을 때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기쁨에 겨워하며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며 쉴 새 없이 재잘댔었겠지만지금의 그녀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소한은 옆에 늘어뜨렸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는 김단의 무심한 태도를 여러 차례나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불러주길 바랐다.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잠시 깊게 숨을 들이 마신 후 소한은 입을 열었다.“한 가지 꼭 전해야 할 일이 있소. 임원은 원래 진산군 댁의 적녀가 아니었소.”그러자 김단은 평온하게 그 말을 끊으며 차분하게 답했다.“알고 있습니다.”그 말에 소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김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그들의 약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그녀와 자신은 처음부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었다고.만약 김단이 이를 깨닫는다면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믿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고?소한의 눈동자 속에는 당혹감이 스쳐갔다.그는
“단이는 당신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차디찬 목소리가 소하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그곳에는 소한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고 날선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만이 서려있었다.그가 나타난 순간 임학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소한! 또 너냐!”그는 격분하여 병사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려 했다.“자네가 김단을 감금했잖소! 죽음까지 몰아넣었던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고 하는 것이오? 장소를 바꿔서 감금하면 다인 것이오?”진산군 또한 간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한아! 아니지 소 장군! 단이를 보게 해다오! 단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단이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소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그 순간 임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이 멎을 뻔했다.임학은 차가운 눈으로 소한을 바라보았다.“뭐라고 했소?”심지어 소하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러나 이내 과거 김단이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을 떠올렸다.그녀는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그때부터였을까?임씨 부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뭐라고요? 단이가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부터요?”“명희가 죽었을 때부터요.”소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명희가 죽기 전 모든 것을 단이에게 말했다고 합니다.”그 순간 임학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오랫동안 머릿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그날 김단이 자신의 앞에서 말없이 흐느끼던 모습.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때 그는 김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른 채 오히려 그녀를 다그쳤다.임원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었다.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
소한은 임학의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다.“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녀 성격에 자네가 여기서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한들 만나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걸.”그러나 이 말에 임학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소 장군도 알고 있군요.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그렇다면 왜 놓아주지 않는 거지?왜 계속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하는 거지?소한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고 등 뒤로 모은 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러나 임학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소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부탁드립니다.”그 말을 남긴 후 그는 천천히 한쪽으로 물러났다.기다릴 거면 문 정중앙에서 보기 흉하게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소하는 다시 한번 손에 들린 작은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거뭇한 얼룩은 굳어진 핏자국 같아 보였다.그는 이 보자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방금 전 임학이 울음을 삼키며 이 보자기를 건넨 것을 보면 분명 그에게 소중한 물건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그는 작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한이 바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소하가 정말로 그 보자기를 김단에게 전하려 하자 소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막아섰다.“단이는 이 물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 역시 보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임학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것은 아마도 과거와 얽힌 기억일 것이다.그리고 김단은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았다.소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한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단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단이를 만나는 것이 싫은 거냐?”소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둘 다 원하지 않았다.소하는 그의 속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손에 든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넌 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그 말에 소한도 자연스럽게 보자기를 바라보았다
소하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렸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보자기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임학이 가져온 것이오. 낭자의 물건이니 직접 처리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전해주려던 참이오. 원하지 않는다면...”“저한테 주세요.”김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녀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녀는 소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소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녀에게 보자기를 건넸다.김단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보자기를 내려다보았다.붉은 얼룩들이 찍혀 있는 그 천을 바라보는 순간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손 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세답방에서, 온 세상이 자신을 적대하던 그곳에서 보냈던 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올랐다.“일부러 세답방에 남겨 둔 물건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임학 도련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군요.”그녀는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들어 소하를 바라보았다.“오라버니,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지 아시나요?”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웃음이 너무도 슬프게 느껴졌다.이것을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김단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이건 제 과거의 어리석음과 헛된 기대입니다. 한때 이 천 위에 수없이 많은 구원의 편지를 남겼었죠. 제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반드시 구하러 올 거라 믿었거든요. 하지만 저를 구하러 와주기는커녕 임원 낭자의 생일을 챙기기 바빴고 그녀를 달래주기 바빴습니다.”“도련님은 그때 조금이나마 제 생각을 하긴 했을까요?”한때 그녀는 확신했었다. 그가 절대로 자신을 잊을 리 없다고. 포기했을 리 없다고.하지만 그가 한양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새로운 누이를 데리고 거리를 활보할 때 그녀는 어두운 방에서 혈서로 구원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그 15년의 정이 결국 하나의 웃음거리로 끝나 버렸다는 것이 허무하기만 했다.지금 임학이 무슨 낯짝으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지난날 그에게 의지했던 그녀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임학은 김단이 이리 빨리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대문이 열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김단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눈시울이 붉혀졌다.입가에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천천히 김단에게 다가갔다.“네가 이리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누가 주었소?”김단은 담담하게 그에게 물었다.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임학이 서둘러 대답했다.“류 나인께서 주셨어. 네가 세답방에서 나올 때, 깜빡하고 네게 돌려 주지 못했다고 하셨어. 그날, 관저 앞에서 나에게 그랬어. 덕빈께서 은혜를 베푸신 덕분에, 궁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짐 정리를 하면서 이 보따리를 발견해서..”“알겠소.”김단은 임학의 말을 끊었다.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아주 간단한 일을 길게 늘어뜨리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했다.한데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아챌 수 있었다.한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한참을.이때, 김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임 도령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진산군 관저는 세습의 자격이 없어졌기에, 임학도 더 이상 ‘도련님’ 이 아니었다.하나 여전히 김단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낯설기만 하였다.임학은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애원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단아, 오라버니가 잘못했다. 너를 그렇게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어.”그는 말하면서 김단에게 다가갔다.“단아, 오라버니랑 같이 집에 가자구나. 오라버니가 데려다줄게, 응?”그의 손가락이 김단의 옷깃에 닿을 듯 말듯 하였다.하나 김단은 뒷걸음을 쳤다.옆에 있던 호위병이 서둘러 임학을 막았다.임학은 멈칫하며, 눈물을 흘렸다.“단아..”그와는 반대로 김단의 눈빛은 차갑기만 하였다.그녀는 임학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오라버니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임단 이오. 하나, 그 임단은 이미 죽었나이다. 세답방에서 채찍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임 도령의 말 한마디만 바랬나이다. 불행히도 죽을 때까지 그 한 마디는
임학은 보따리를 한번에 잡지 못했다.손을 한 번 빼고, 후- 라는 소리와 함께 다시 화로에 손을 집어넣었다.그제야 천쪼가리 하나가 화로에서 나왔다.허나, 천쪼가리에는 불이 붙어있었다.곧이어 그는 바닥으로 던져서 계속 밟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다.남은 천쪼가리에는 “구해줘.”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곧이어 임학이 떨리는 손으로 천을 주웠다.화로에 손을 두 번 넣은 탓에, 손은 이미 벌겋게 변했다.손가락은 화상을 입어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하나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떨리는 손에 쥔 천을 보면서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참고 있던 말을 크게 내뱉었다.“임 도령은 어찌 제 관저 앞에서 소란을 피우시는 것이오? 그저 작은 천에 불과하지 아니헌데, 어찌 화로에 손을 넣으시는 것이오? 그날, 도령을 필요로 할 때는 어디 계셨소? 이런 소란을 피워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오? 혹여 내가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 같으시오? 똑똑히 알려주겠소, 손이 아니라 임 도령이 어느 날 시체가 되어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이오!”“왕철! 손님을 보내드려라!”김단은 몸을 돌려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와중에 임학을 한번도 보지 않았다.하나 임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천 쪼가리를 쥐며 소리 내어 울었다.결국 자신이 놓은 것이었다.자신이 제일 아끼던 누이는 ‘오라버니’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한편, 왕철은 그 장면을 보며 난감할 따름이었다.임학의 울음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임 도령께서는 손에 화상을 입으셨사옵니다. 서둘러 의원을 찾으시지요, 너무 오래 방치하면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나이다.”그는 이전에 발에 화상을 입고, 종아리까지 절단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하나 임학은 움직 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때, 소한과 소하가 관저에서 나왔다.그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소하가
임학이 김단의 속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고, 소한도 더 이상 마당에 남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당에는 사람이 많았다.그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지만,김단에게는 그저 감금과 다를 바 없었다.하늘이 어두워지자 숙희가 김단을 위해 식사 한 상을 차렸다.김단이 숙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한 달 사이에 네 요리 실력이 이리 늘 줄은 몰랐어.”숙희도 미소를 지었다.곧이어 순대를 집어 김단의 그릇에 올려 두었다.“드셔 보세요, 정암 종사관께서 하신 음식 같지 않습니까?”김단은 익숙한 맛에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순간, 짓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숙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더 맛있구나.”숙희는 이어서 김단의 그릇에 다른 반찬을 집어넣었다.“아씨, 이것도 드셔 보시지요. 이것도, 이것도 제가 잘하는 반찬이옵니다!”잠시 뒤, 김단의 그릇에는 반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김단은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숙희를 바라보았다.“네 아씨 입은 하나다, 어찌 그리 많이 먹을 수 있겠어? 왕철을 불러와, 같이 먹자구나.”“예!”숙희는 기뻐하며 왕철을 불렀다.김단이 식사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에,왕철이 다급해졌다.“노비가 감히 아씨와 함께 식사를 한다니요.”숙희는 왕철의 어깨를 잡았다.“아씨께서 허락하셨소!”곧이어 왕철도 식사 자리에 앉았다.주인과 하인 셋이서 자리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김단은 조용하게 식사를 즐겼다.왕철은 여전히 고개만 숙이며 밥을 먹을 뿐이다.숙희는 김단을 흘깃 보았다.사실 그녀가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때, 밖에서 호위병이 보고를 하러 왔다.“아씨, 임 도령께서 가시지 않나이다.”곧이어 숙희는 그제야 김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호위병의 말에 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가만히 내버려두거라."그녀는 임학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나 다시 그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잠시 뒤, 하인 하나가 보고를 하러 왔다.“아씨
그는 소한이 자리를 잠시 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그가 여러 사람을 남겨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부하들을 여러 명 부른 것이었다.이전에 단이는 소한에게 감금되어 장양강에 몸을 던진 것이다.이번에는 절대로 같은 상황이 반복되게 할 수 없었다.진산군은 다시 김단의 손을 잡아당겼다.하나 김단이 세게 뒷걸음쳤다.결국 진산군은 김단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김단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어서, 곧 있으면 소한이 올 것이야!”그는 소한이 무섭지 않았다.그저 그 놈이 도착하면, 단이를 쉽게 데려갈 수 없지 않은가.김단이 다시 뒷걸음을 쳤다.이때, 호위병이 다급하게 다가와 진산군을 저지했다.진산군은 차가운 김단의 모습에 흠칫했다.곧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단아, 네 아비다! 나,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나는 네 친 아비다!”쇠약한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그리고는 쌀쌀한 태도로 대답했다.“정녕 잊으셨나이까, 조모 앞에서 박수를 세 번 쳤던 일을! 저와 대감은 이미 절연을 하였나이다!”이때, 임학이 들어왔다.밖에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뒤였다.그는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이 김단의 앞으로 다가갔다.“단아,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네 성은 여전히 임 씨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네 오라비다!”임학은 양손으로 김단의 어깨를 꽉 쥐었다.김단은 붕대로 감은 임학의 손을 바라보았다.피가 붕대 위로 스며 들었다.하나 김단은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임학의 눈을 바라보았다.“임단이든 김단이든 내 이름은 임 씨 가문의 족보에 써져 있지 않소. 족보에는 임원이 유일한 딸자식이라고 적혀 있소.”임학은 깜짝 놀랐다.사실 그도 이전에 족보를 본 적이 있다.김단의 말은 사실이다.김단은 임학의 당황스러움을 알아챘다.이제는 알 것이다, 그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을.하나 진산군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
김단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맹영지의 상태를 호전시켰건만 민태훈의 갑작스러운 악행으로 인해 그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맹영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해독제를 찾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영의정 저택에 더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곁에 있던 몸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맹가 사람들에게 전하거라. 내가 맹영지를 데려가겠다고 말이다.”몸종은 놀란 눈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맹영지를 민대감한테서 떨어뜨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김단이 그녀를 데려가겠다는 사실을 민가 사람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김 의원님께서 몰래 모셔가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김단은 냉정하게 대답했다.“네가 도와준다 한들 민가 사람들에게 들키게 된다면 너의 신분으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서 민가 사람들을 불러오거라.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몸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예.”얼마 지나지 않아 맹영지의 뜰은 소란스러워졌다. 조정에서 전하와 정무를 논의 중인 영의정 대감을 제외하고 민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특히 민태훈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와 김단에게 따지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안에서 날아온 은침이 그의 허벅지를 정확히 찔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며 신음을 토했다.민가의 큰 마님은 몇몇 마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착하였다.맹영지의 뜰에 도착한 그녀가 본 장면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손이 땅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즉시 분노를 터뜨리며 지팡이로 땅을 세차게 내리쳤다.“어디 이런 무례한 의원이 다 있단 말이오? 감히 우리 영의정 저택에서 사람을 해치다니! 이 자를 당장 붙잡거라! 내가 직접 궐에 데려가 이 무엄한 짓이 누구의 명령인지 따져 물을 것이다!”영의정 저택의 병사들은 즉시 명령에 따라 방으로 돌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방 안에서 또
김단은 다시금 영의정 저택을 찾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맹영지를 문병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서원공주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탓이었을까?김단이 몇 차례 영의정 저택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민태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김단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맹영지 방에서 나오는 그를 마주치게 되었다.김단은 무의식중에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 바람에 마땅히 올려야 할 예까지 잊고 말았다. 민태훈은 그런 김단의 무례한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김 의원은 공주님을 모시더니 자기 위치를 잊은 것이오? 어찌 본관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는단 말이오?”김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민 대감을 뵙습니다.”민태훈은 코웃음을 치더니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김단은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속에 품었던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맹영지는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두 팔로 어깨를 감싸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생기를 잃었고 옷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김단은 섣불리 다가갔다가 맹영지를 놀라게 할까 두려워 선뜻 가까이 가지 못했다.그때 맹영지의 몸종 하나가 탕약 한 사발을 들고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맹영지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든 약그릇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그 소리에 맹영지는 격렬하게 반응하며 소리쳤다.“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몸종은 그 자리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맹영지를 안아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며 몸종을 때리고 할퀴었다.이 광경을 본 김단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어 맹영지한테서 몸종을 떼어내고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켜 버렸다.그러자 몸종은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모두 다 소인의 불찰입니다. 큰 며늘 아씨께서 과자를 드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엌으로 가 준비를 하던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대감님께서
김단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불행 앞에서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그때 소정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도련님을 걱정하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진산군 댁의 의원과 그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리 없잖아요.”김단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뭐 어떻게 되었든, 도련님께서는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방금 약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부르는 이름도 낭자였거든요. 예전에는 사이좋은 남매였는데...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련님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피를 나눈 사이인데 꼭 이렇게 멀어져야만 하나요?” “소정원 낭자.”김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단호하고 날이 서 있었다.생각보다 묵직한 음성에 소정원은 당황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김단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허리춤에서 작은 손목 염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것은 소한 장군님의 물건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분에게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이 염주는 그녀가 시간 날 때마다 손수 꿰어 만든 것이었다. 소정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정말 소한 오라버니의 것이 맞나요? 제 기억으로는 큰 오라버니도 비슷한 염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김단은 작게 눈썹을 찌푸릴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정원이 다시 물었다.“그런데 한이 오라버니 물건을 왜 낭자가 가지고 있는 겁니까?”그 물음에는 짙은 의문과 약간의 의심이 담겨 있었다.김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낭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오. 제 실수로 소한 장군님의 염주를 끊어버렸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손수 꿰어 만든 것일 뿐이오.”소정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
소정원은 순간 당황했다. 김단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산군 앞에서 친히 임학에게 약을 먹이라니...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줘라는 뜻 아닌가?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무의식적으로 약그릇을 받아들고 있었다.김단은 몸을 돌려 진산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진산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도련님을 깨운 건 소정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진산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게 정말이냐?”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임학과 소정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럼 너희 둘은...”소정원의 두 뺨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임학에게 약을 먹이던 손마저 긴장으로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부자연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는 임학의 눈에는 따스함이 서려있었다. 그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자 소정원의 얼굴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단과 진산군은 눈치껏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그러나 밖으로 나온 진산군의 얼굴빛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보다 못한 김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이제 눈을 뜨셨고 거기에 좋은 인연까지 맺게 되셨으니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현재 진산군의 집안 사정을 헤아려봤을 때 혼인과 같은 경사로 액운을 풀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진산군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깊게 잡혀있었다.“소정원 낭자가 싫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 집안은 소씨 가문과 이미 두 번이나 혼례를 맺으려다 결국...”그는 임학과 소정원도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김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번은 다릅니다. 그 두 번의 혼사는 모두 거짓이었잖아요.”애초에 김단과 소하의 혼사는 거짓된 약조에 불과했다. 허울뿐인 인연인데 어찌 아름다운 결말이 따를 수 있겠는가?진산군은 김단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마침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김단 역시 그 일을 떠올렸다. 그날 임학은 소정원의 치맛자락에 붙은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어 김단을 챙겨주지 못했었다.김단은 그것도 모르고 등불회장 한가운데서 임학을 찾아 헤맸고 결국 소한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 때문에 김단은 오랫동안 임학에게 서운함을 품고 있었다.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여러번 따져 물었지만 임학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감정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소정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그때부터였습니다. 도련님만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러더군요.”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임학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은침을 꺼내 임학의 두정혈에 찔렀다.은침의 자극이 신경을 자극하자 임학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원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임학 도련님...”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중상을 입고 막 깨어난 임학은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그는 가장 먼저 소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자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임학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미약하게나마 소정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소정원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깨어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임학은 말할 기운이 없어 대답하지 못했지만 시선은 어느샌가 김단에게로 옮겨졌다.그녀는 침대 곁에 앉아 있었기에 소정원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방금 전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그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마른 목구멍에서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단아...”“방금 깨어났으니 말을 아끼세요.”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학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저는 약을 달이러
그러다 문득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 아가씨, 소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소 아가씨? 소정원을 그러는 것일까? 김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김단은 긴가민가하며 문을 열었고 마당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경쟁자였던 소정원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임학 때문일 것이다. 김단은 조심스레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사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들이 말리셨습니다. 임학 도련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 제가 와봤자 방해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에야...”그녀는 말을 흐리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임학 도련님은… 지금은 어떠세요?”김단은 살짝 웃으며 얘기했다.“맥박은 안정되었고 상처도 서서히 아물고 있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깨어나질 않소.”그 말을 들은 소정원의 이마가 즉시 찌푸려졌다. 김단은 그녀가 임학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김단은 부드럽게 말했다.“도련님을 좀 봐주시오. 나는 물 한 잔 가져오겠소.”김단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순간 소정원의 외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김단 낭자! 어서 와서 보세요!”갑작스럽게 들리는 큰 목소리에 김단은 놀라 물을 흘리고 말았다.하지만 김단은 물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황급히 침대 옆으로 뛰어갔다.김단은 임학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하지만 소정원은 임학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보세요. 도련님께서 울고 계십니다.”임학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김단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기에 자신이 했던 말은 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하지만 그의 눈물을 보니 어쩌면 김단이 방금 전에 했던 모든 말들, 즉 그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들이 그의 가슴을 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원은 어리둥절해하며 나
그는 소한의 거침없는 기질이 가끔 부러울 때도 있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편할까?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자신이 소한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소한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삼일 뒤, 김단은 평소처럼 임학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산군 댁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승이 임학의 맥을 짚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스승님, 어떻습니까?”그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독은 이미 다 해독되었고 맥도 안정적이오. 그래서 호흡도 고르고 안색도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졌소. 그런데 이상하오. 이쯤 되면 일어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김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진맥해보았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깨어나야 할 시점인데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임학을 바라보며 스승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조심스레 물었다.“스승님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신가요?”그는 김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예전에 약왕곡 주인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소.”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이어졌다.“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면 아무리 육신이 다 나았다 해도 정신은 죽음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고 했소.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끌어내려 해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오.”지금 임학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김단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까무잡잡한 피부와 앙상한 빰이 병사의 길을 걸었던 그의 지난 세월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화려한 옷을 입고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듣던 진산군 댁의 장남은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왔다.“낭자, 잠시 이 아이를 봐주시오. 나는 약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