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저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소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예, 그럼 저도 가서 쉬겠나이다. 한이 오라버니도 얼른 들어가 쉬시지요.”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옮겼다.임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한은 자신의 겉옷을 만지작거렸다.그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문 닫거라.”영희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그녀가 뒤를 돌았을 때,임원이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거리가 가까운 탓에 영희는 깜짝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두려움에 떠는 영희를 보며,임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못났다, 뭐가 그리 무서운 거야?”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영희의 손을 잡았다.“염려 말거라. 구서가 죽었으니, 우리가 구서와 손을 잡았는 것은 아무도 모를 거야. 네가 입 막음만 잘한다면 우리를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임원은 ‘우리’ 라며 강조했다.영희와 자신을 하나로 묶어 버렸다.영희는 착한 모습의 임원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씨, 노비는 언제나 아씨의 사람이옵니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겠나이다.”영희는 말 끝을 흐렸다.두려움에 훌쩍 거린 것이다.이전에 임원은 사람을 시켜 명희를 죽였었다.이 사실만으로도 영희는 임원이 무서웠다.헌데, 임원이 구서마저도 직접 죽였지 않았는 가.영희는 어쩌면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한편, 임원은 영희의 태도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손을 들어 영희를 볼을 쓰다 듬었다.“나와 구서의 일을 아는 것은 오직 너뿐이야.”영희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문에 부딪혀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영희는 두려움에 떨면서 무언가 생각났다.“노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나이다. 헌데 아씨, 그 검은 옷 무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사옵니까?”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동행자를 찾으려 생각했다.하지만 임원은 크게 웃
한편, 소하의 방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김단이 씻고 나왔을 땐 이미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숙희는 김단 뒤에 서서 그녀의 반쯤 마른 머리를 닦아주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그녀는 방금 전 일을 전부 똑똑히 보았다.그녀의 아씨 몸에 있는 흉터와 오늘 새로 생긴 상처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머리카락도 많이 끊어졌고, 두피에는 긁힌 자국까지 있었다. 오늘 밤 아씨가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그런데 밖의 사람들은 아씨가 혼자 도망쳤다고 비난하고 있지 않겠는가!정말 최소한의 눈치도 없는 사람들이다!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었다면 아씨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했겠는가!숙희는 분하고 안타까웠지만 김단이 들을까 봐 흐느끼는 소리를 최대한 감추었다.하지만 김단은 이를 다 듣고 있었다.이에 못내 뒤돌아보며 말했다. “난 괜찮다. 무사히 돌아왔지 않느냐?”뜻밖의 위로에 숙희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오늘 소인이 아씨를 따라갔어야 했어요!”그녀가 따라갔다면 아씨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김단은 황급히 일어나 숙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오늘은 어머님께서도 하인을 데리고 가지 않으셨잖니? 네가 따라갔다면 어머님께서 또 뭐라고 하셨을 거다.”오히려 숙희가 따라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난리였다면 숙희도 호위들처럼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이런 생각에 김단은 약간 두려워졌다.임원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더 이상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다!김단은 눈에 살기가 스쳤다.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숙희는 눈물을 훔치고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소하와 이각이 있었다.“큰 도련님? 아가씨, 큰 도련님이 오셨어요!”숙희의 외침에 김단은 급히 겉옷을 걸치고 방에서 나왔다.하지만 아직 머리가 마르지 않아 헝클어진 채였다.이전의 엉망진창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소하의 심장이 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숙희는 옆에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구서가 깨어나고 분노해서 둘째 아가씨에게 칼을 겨누다 그 분 손에 죽은 건 아닐까요?”소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임원이 입막음하려고 죽였을 가능성이 더 크오.”김단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구서가 아직 정신을 잃었을 때 죽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서를 상대할 수 없었을 거예요.”임원은 무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이각은 깜짝 놀랐다. “둘째 며늘 아씨께선 평소 가련해 보이셨는데, 정말 그분이 그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르실 수 있었을까요?”숙희는 코웃음을 쳤다. “그 분은 일부러 그런 척하는 거예요! 전에는 살인 청부를 하더니 이번에는 직접 손을 쓴 것이죠!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숙희는 임원이라는 여자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했다!소하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숙희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김단이 말했다. “저는 지금 영희가 좀 걱정됩니다.”그 말을 들은 소하의 표정도 어두워졌다.영희는 현재 임원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동시에 임원이 가장 입막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명희처럼 가까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여자인데, 자신을 따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희는 어떻겠는가?소하는 차분히 말했다. “오늘 구서가 소씨 가문의 여자들을 납치했으니 소씨 가문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오. 다만 구서가 죽었으니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고, 결국 태부가 구서 대신 책임을 지게 될 것이오.”소씨 가문의 여성 신분인 임원은 피해자였기에, 그녀를 조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영희가 나서서 임원의 죄를 밝힌다면...”소하는 말과 함께 김단을 올려다보았다.김단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무턱대고 설득하면 영희가 우리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어요.”소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해 숙희와 이각의 도움이 필요하오.”그 말을 들은 김단의
눈 깜짝할 사이에 사흘이 흘렀다.임원은 자신의 마당 앞에 앉아 청소를 하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영희가 따뜻한 차를 한잔 건넸다. 따사로운 6월 날씨에 어울렸다.임원은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최근에 숙희가 너를 찾아온 적이 있느냐?”영희는 고개를 저었다. “첫 날 소인에게 말을 걸었던 것 외에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그 말을 들은 임원은 깜짝 놀라 물었다. “너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그저 저에게 또 다른 명희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영희는 사실대로 말했다. 임원은 순간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영희가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느냐?”영희는 웃었다. “당연히 소인은 무시했습니다. 명희는 아씨 곁을 떠나 그렇게 된 것이고, 소인은 아씨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임원은 의심스러운 듯 영희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찾지 못했다.그녀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근 시아버지께서 태부 집안과 마찰이 있었다는 것 빼고 집안 사람들이 그때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사람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지 않느냐?”영희도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생각에 큰 며늘 아씨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람을 시켜 몰래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씨 말씀대로 구서가 죽었으니 그 자들이 아씨를 특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정말 그러했다.임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졌다.그때 하인 한 명이 마당으로 들어와 임원에게 말했다. “둘째 며늘 아씨, 도련님께서 앞뜰로 오라고 하십니다.”불안해하던 임원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를 찾으신다고?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구태부께서 직접 소씨 가문의 여성분들께 사과드리러 오셨습니다. 지금 앞뜰에 와 계십
그때 구태부가 입을 열었다.“내가 나이가 들어 저희 집안 사람이 이런 불상사를 저지른 줄도 몰랐소. 소 대감께서 궁궐에 가 전하께 고한 뒤에야 일을 알게 되다니, 정말 미안할 따름이오!”그 말을 들은 소씨 대감은 다급히 말했다. “구 대감,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감께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쓰시니, 우리와 같은 백성들이 평안한 것 아니겠습니까.”소하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서가 심성이 악독하여 저지른 불상사이니, 구 대감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소씨 부인도 따라 위로했다. “맞습니다. 이번 일은 구 대감과는 무관합니다.”그럼에도 구씨 집안은 소씨 집안에게 명확하게 해명해야 했다.구태부도 그 점을 알고 있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둘째 며느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우리 못난 손자가 도대체 어쩌다 죽은 것이오?”임원은 구태부가 이리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구서의 시신은 구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보지 않았던가?순간 당황한 임원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구태부의 말을 이었다. “다른 뜻은 없소. 그저 진산군께서 둘째 며느님이 무예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하여 궁금했을 뿐이오.”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임원에게 향했다.임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김단이 먼저 말했다. “구서가 저를 희롱하려했고, 저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다리에 침 두 개를 꽂았습니다. 이내 구서가 아파하며 땅에 쓰러졌고, 제가 돌로 그를 기절시켰습니다. 동서는 구서가 정신을 잃었을 때 찔러서 죽인 것 같습니다.”구태부는 그 말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포졸이 구서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도 그의 다리에서 은침 두 개를 발견했었고, 머리에 상처도 확인되었다. 그렇기에 김단의 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이에 임원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제가 갔을 때 구서는 정신을 잃어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어떻게 당신을 희롱하려 했다는 것이오?”소하의 목소리가 나즈막
소정원이 임원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이로써 그녀는 이 많은 사람들의 '심문'속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원은 눈물을 흘리며 구태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날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기에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저도 그자를 어떻게 죽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제 손에는 비녀가 들려 있었고, 그 자는, 그 자는...”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듯 임원은 계속 눈물을 닦았다.임씨 부인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그녀를 안고 위로했다. “괜찮다, 원아, 괜찮다...”소씨 부인도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됐어. 다 지난 일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모두 너무 놀랐으니.”이는 구태부로 하여금 자신들이 구서에게 납치를 당한 피해자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구태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김단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일은 명확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원 낭자는 낭자의 비녀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시오?”그 말을 들은 소정원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김단은 고개를 살짝 치켜올리고 임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구서는 저와 원한이 있었기에 이번 사건의 표적은 저였습니다. 처음에는 정원 낭자와 함께 동굴에 버려졌지요. 이후 구서의 부하들이 제가 비녀로 구서의 눈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알고 구서가 오기 전에 저와 정원 낭자의 비녀를 모두 가져갔습니다.”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소정원은 비로써 자신이 깨어났을 때 왜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소정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하지만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정원처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순식간에 그들의 표정이 바뀌었다.소하는 임원을 바라보며 매우 냉담한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임씨 낭자에게 어찌 비녀를 갖고 있을 수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임원은 당황하여 연신 고개를 저으며 임씨
“헛소리!” 임원은 다급히 부인했다. “나, 나는 구서를 본 적이 없소!”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표정에서 드러난 담긴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부정이 끝나기도 전에 소하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은 주점 주인과 종업원들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사람들을 뜰 밖에 대기시켜 놨으니, 원하시면 바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임원은 눈을 크게 뜨고 더욱 눈물을 쏟아냈다.하지만 임씨 부인마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냐?”증인이 밖에 있으니 임원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결국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 저, 저는 구서에게 협박당했습니다. 그 자를 만난 적은 있지만 어떠한 일도 꾸미지 않았어요!”하지만 그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방금 전까지 임원 편을 들어주던 소정원마저 미간을 찌푸리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아닌지는 영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영희를 들여보내시지요.”소하가 곧바로 말을 이었고, 임원에게 반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임원은 그제야 오늘 대청에 하인 한 명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구태부가 사과하러 왔다는 말은 모두 거짓인 거였다!이 자리는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된 함정이었던 것이다!영희가 뜰 밖에서 들어와 대청 중앙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 영희, 어르신들께 인사드리옵니다.”임원은 절망에 빠졌지만, 그 와중에도 영희를 협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영희야, 사람들이 우리를 모함하려 하니 꼭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우리'라는 말로 영희에게 그들이 주인과 하인의 관계로 한 몸이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영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였다.하지만 영희는 임원을 쳐다보지도 않고 구태부와 소씨 대감을 보며 말했다. “구서는 아씨께서 최음제를 사신 것을 알고 그것으로 아씨를 협박하여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씨께서는 처음에는 거절하셨지만, 훗날 명희가 죽자
이에 대해 김단은 인정했다. 하지만 김단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하가 먼저 나섰다. “며칠 전 밤, 제가 이각에게 영희를 겁주라고 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희가 진실을 말하도록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수씨에게 폐를 끼쳤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일말의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임원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임원은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듯 급히 임씨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들으셨죠? 정말 저 자들이 저를 모함하려고 꾸민 일입니다! 저를 모함한 거예요!”하지만 영희의 말을 들은 임씨 부인 역시 임원을 보는 눈빛이 바뀌었다.그 순간 뜰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누가 낭자를 모함했다는 것이오!”싸늘한 목소리는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기세를 담고 있었다.소한이 대청 밖에서 성큼성큼 걸어왔고, 온 몸에서는 소름 끼치는 살기를 뿜고 있었다.임원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방금 전 소한의 말을 듣고 그가 자신을 옹호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이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한에게 달려갔다. “오라버니, 정말 아닙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형님께서 저를 모함하시는 겁니다...”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말했다. 하지만 소한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내고 싸늘한 시선으로 임원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우리 형님은 함부로 사람을 모함하는 분이 아니오. 낭자께서 형님이 낭자를 모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 역시 낭자를 모함하고 있다는 뜻이지 않소?”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뜰 밖에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임학이었다.그는 손에 피투성이 남자를 붙들고 들어왔고, 그 남자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김단은 소하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한과 임학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구태부와 소씨 대감도 미간을 찌푸린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끝내 진산군이 물었다. “학아, 이 자는 누구냐?”하지만 임학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정원이 그를 알아보았다. “저 자는 그때 둘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