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정은 자애롭게 말했다.“그래. 어서 들어가.”지서현은 발걸음을 옮겼다.하승민이 침상으로 다가오자 김옥정은 호통쳤다.“네가 여길 왜 다시 와! 당장 썩 나가!”하승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매우 정중하게 사과했다.“할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김옥정의 노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네 사과는 필요 없다. 네가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현아야!”“맞아요, 도련님이 아까 지유나를 안고 도망가 버린 사이, 어르신께서 쓰러지셨는데 사모님 혼자서 간호를 도맡아 하셨습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도련님이 양자이고 사모님이
‘왜 나를 무시해?’그녀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하승민처럼 신분, 지위, 권력을 모두 가진 남자가 여자를 달래려고 자세를 낮추면 깊은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고 헤어 나오기 어려워진다.하지만 지서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하승민의 깊은 사랑은 결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모든 사랑을 지유나에게 주었다.지서현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놓으라고요!”하승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화났어?”지서현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화낼 자격이라도 있어
지서현은 흰 셔츠를 정돈하고 하승민을 돌아보았다. 휴대폰은 탁자 위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보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다.지유나의 전화를 받지 않다니,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하승민은 큰 키에 긴 다리로 우뚝 서서 검은색 정장 재킷을 벗었다.안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등 부분에 넓게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지서현은 할머니가 그의 등에 내리쳤던 채찍을 떠올렸다.그 채찍질에 살갗이 터졌을 텐데 그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그대로 두면 염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지서현은 입을 열었다.
지서현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불행히도 상처가 감염되어 잠자리에 들었을 때 하승민은 고열이 올랐다.몸이 몹시 추웠다. 지서현이 에어컨을 끄고 이불을 여러 겹 덮어주었지만 그래도 그는 춥다고 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입술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지서현은 이것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지유나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 왜 자기 상처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거야?’지서현이 주사를 놔주긴 했지만 이 고비는 어쨌든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다.고열만 내리면 하승민은 괜찮을 것이었다.지서현은 이불을 걷고
“여긴 위험해, 어서 가.”그는 그녀에게 떠나라고 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붙잡히면 그녀도 목숨을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소녀는 가지 않았다.오히려 필사적으로 하승민을 질질 끌며 숨을 수 있는 산속 동굴로 데려갔다.“큰오빠, 여긴 안전해요. 저 사람들이 찾지 못할 거예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하승민은 소녀를 바라봤다.그때 소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이미 겨울이었는데도 색이 바랜 얇은 원피스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마치 오랫동안 이 숲에서 홀로 지낸 듯했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품에 꼭 껴안고
‘얼마나 아팠을까?’하승민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서현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부드러운 허리를 손안에 느끼며 그는 인정했다.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갓 깨어난 탓에 목소리는 아직도 나른하게 잠겨 있었다.“지서현, 내가 너무 아프게 한 거 아니야? 미안해.”지서현에게 미안하다고 하승민은 낮게 말했다.하지만 꿈속에 잠긴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규칙적인 숨결만이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녀의 가녀린 머리카락조차 향기롭고 부드러웠다.곧
지서현은 하승민과 지유나를 발견했다.지유나는 이미 퇴원한 상태였고 지금은 화사한 모습으로 하승민 곁에 서 있었다. 그의 팔을 꼭 끼고 있는 두 사람은 마치 금실 좋은 한 쌍처럼 다정했다.소아린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서현아, 하 대표님이 지유나를 정말 사랑하긴 하나 봐. 지유나가 곽 어르신까지 건드렸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같이 있다니.”지서현은 이 클럽에서 하승민과 지유나를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화해한 모습을 보고도 그녀는 놀라운 기색조차 없었다.살짝 붉은 입술
첫 번째 게임에서 하승민이 걸리자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졌다.지예슬이 붉은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진실게임 해보죠. 질문할게요. 하 대표님과 사모님은 부부로서 첫날밤을 보내셨나요?”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해외에서 돌아온 유정우를 제외하면 모두 알고 있었다. 사모님이 바로 지서현이라는 사실을.지예슬의 의도는 뻔했다. 하승민이 지서현을 한 번이라도 품에 안은 적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테이블에 앉아 있던 재벌가 출신 자제들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띄웠다.
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도 마치 따귀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이제 제 말 믿으시겠죠?”그녀의 맑은 두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소문익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에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이 요망한 여자가! 소문익까지 자기 치마폭에 둘러싸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서현아, 너 쇼핑하러 온 거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원피스 있어?”점원은 곧바로 레이스 원피스를 가져왔다. “이 원피스가 손님께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지서현은 고
소문익이 왔다.지유나 일행은 어제 동연당에서 소문익을 만났었기에 오늘 다시 만나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소문익은 지서현 옆으로 다가왔다.“서현아, 잠깐 전화 받느라 밖에 나갔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재밌는 걸 놓친 것 같은데.”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아니. 타이밍 딱 맞춰서 잘 왔어. 다들 내 남자친구인 당신을 보고 싶어 했거든..”지서현은 소문익에게 눈짓했다.소문익은 바로 눈치채고 지서현의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둘렀다.“이분들은?”지서현은 한 명씩 소개했다.“이분은 지씨 가문 어르신, 이윤희 씨, 지
지예슬은 곧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현아, 부러워할 것 없어. C신은 내 남자친구야. 우리 곧 결혼할 거라고.”지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재산이 열 배로 늘었다며? 그럼 그 돈은 어디 있어? 그 C신이라는 사람이 언제 준다고 했어?”박경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게...”“말 안 했나 보네요.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C신이 열 배든 백 배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 C신이라는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알아서들 하세요.”지예슬은 곧바로 화를 냈다. 남자친구가 C신이라는 사
하승민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누가 준 거야?”지서현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남자친구요!”남자친구?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지서현이 전에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이제 그 남자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네 그 돈 많은 남자친구 말이야?”“네. 맞아요.”하승민은 냉소했다.“비싼 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게 해주다니 돈 좀 쓰는 모양인데. 해성이 좁은 동네인데, 도대체 네 남자친구가 누군지 감도 안 잡히네.”지서현은 입꼬리를 올렸다.“하 대표님, 내 남자친구가 누군지 모
지서현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하승민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지서현, 나한테 할 말 없어?”지서현은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할 말?”하승민은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몰고 다니는 고급 차, 살고 있는 고급 아파트, 다 어디서 난 거야? 누구 돈 쓴 거냐고.”지서현은 가녀린 등을 꼿꼿이 펴고 말했다.“하 대표님, 어쨌든 당신 돈은 안 썼으니까 상관없잖아요. 더는 말씀드릴 게 없네요.”지서현은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승민의 큰 키는 마치 벽처럼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살짝
이윤희와 지예슬은 지유나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하려 했다.“당장 유나를 놔줘!”“세 번째 경고입니다. 이제 내보내겠습니다!”결국 지유나, 지예슬, 이윤희는 모두 제성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쾅 소리와 함께 제성아파트의 대문이 그들 앞에서 닫혔다.세 사람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그들은 이런 수모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지유나는 하승민과 함께 다니면서 항상 환대받았는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쫓겨나다니, 생전 처음이었다.지예슬도 화가 났다.“다 서현이 때문이야! 유나야, 도대체 어떻게
이윤희가 말했다.“서현아, 하 대표님 미행 안 했다고 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따라왔잖아!”“너 진짜 무섭다. 승민 오빠가 9층에 사는 것까지 알고 있었어? 너 완전 스토커잖아. 정신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지서현은 하승민을 쳐다보며 물었다.“하승민, 9층에 살아요?”하승민은 901호 문패를 가리켰다.“나 여기 살아.”“아.”지서현은 902호 문 앞으로 가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지서현이 902호에 산다고?정말 제성
‘아니, 그럴 리가?’하승민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어떻게 지서현을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연당 설립자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을까?‘하 대표님, 저 좀 태워다 주시겠어요?'방금 지서현이 차 밖에서 자신을 태워달라고 했었다. 하승민은 웃음이 나왔다. 자기 차가 있으면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하다니, 분명 지유나를 약 올리려는 것이었다.자신을 놀리려는 의도도 있었다.지서현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그때 지유나, 지예슬, 이윤희가 차에 올라탔다. 지유나는 조수석에, 지예슬과 이윤희는 뒷좌석에 앉았다. 하승민은 액셀을 밟았고 롤스로
지서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마침 새로 산 차가 도착했다.“난 여기서 차 기다리고 있었어. 이만 가볼게.”“차를 기다려? 택시?”지유나가 웃었다.“서현아, 병원 앞에서 택시 잡기 힘들 텐데?”지서현은 평소에 택시를 타고 다녔기에 지유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지예슬은 지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서현아, 넌 정말 한심해. 다른 선배들은 다들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넌 아직도 택시 타고 다니잖아. 천재 소녀라는 말이 아깝다.”이윤희는 지예슬의 팔을 잡아당겼다.“예슬아, 그만해. 서현이도 불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