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때는 소희가 운전하고 심명이 뒤에 안자 요요랑 놀아주고 있었다."나 예뻐?"심명의 뜬금없는 물음에 요요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한참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예뻐요!""그럼 소희 예뻐?"요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예뻐요.""그럼 내가 예뻐, 소희가 예뻐?""......"요요가 심명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했다."요요가 예뻐요!"요요의 대답에 심명이 큰소리로 웃었다.그러다 갑자기 앞으로 몸을 기울여 소희의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는 취한 눈동자로 소희를 보며 말했다."소희야, 우리 둘 다 이렇게 예쁘게 생겼으니 우리가 낳은 아이도 틀림없이 엄청 예쁠 거야."소희가 듣더니 흰자를 한 번 보이고는 손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밀었다."요요나 잘 봐."심명이 의자에 기대어 바깥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황금색이 뒤덮여 있어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그러다 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이제 우리 아이가 생기면 나 전업주부가 될 거야. 매일 집에서 우리의 아이를 돌보고 있을 거라고."소희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너 계속 허튼소리를 했다간 차에서 던져버릴 거야."심명이 듣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콧방귀를 한번 뀌었다."평소에도 말 못 하게 하고, 술에 취해서도 안 되는 거야?"소희가 눈썹을 찌푸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심명이 비록 많이 취하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이성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희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워 더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요요랑 놀아주었다.한참 후 소희가 담담하게 말했다."네 휴대폰 줘."심명이 두말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소희에게 건네주었다.휴대폰을 건네받은 후 소희가 비밀번호를 물어보려는데 휴대폰 잠금이 자동으로 해제되었다.이에 소희가 잠깐 멍해 있더니 심명이 자신의 휴대폰에 그녀의 얼굴도 인식 설정에 추가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역시 심명은 그녀에 대해 아무런 경각심도 없었다.소희는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심명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그리고 최근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소희가 성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연희야."성연희가 술자리에 참석한 것 같았다. 그러다 조용한 곳으로 옮겨서야 웃으며 말했다."왜, 자기야!"소희가 듣더니 가볍게 웃었다."너도 취했어?"성연희의 앙증맞은 목소리에 약간의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아니, 네가 보고 싶어서."소희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입술을 오므리고 물었다."연희야, 너 노명성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어?"소희의 물음에 성연희가 잠시 멍해 있더니 바로 진지하게 말했다."만약 내가 명성 씨와 헤어지게 되면 앞으로 아마도 많은 남자를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내가 평생 사랑하는 사람은 명성 씨일 뿐이야."소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성연희가 물었다."너는? 넌 아직도 임구택을 사랑해?"성연희의 물음에 소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한참 후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니."성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심명을 한 번 고려해 봐. 지난 2년 동안 심명은 확실히 너에게 심혈을 기울였어, 그가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도 눈치챌 정도로. 솔직히 나 진짜 그의 확고한 사랑에 감동 받았어. 그러니 만약 더 이상 임구택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면 심명을 받아들여.""응. 알았어.""내일 나 바쁘지 않으니까 너한테 들를게.""나 오후에 집에 있어.""그래."전화를 끊고 소희는 베란다의 소파에 틀어박혀 조금씩 어두운 밤에 삼켜지는 하늘 쳐다보았다.왠지 마음이 가벼워지기는커녕 더욱 무겁고 씁쓸해 났다.심명은 그녀가 받아들일 때까지 따라다닐 추세인 것 같았다.그를 쫓아낼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이런 애매모호한 감정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이 없었다.사랑이라는 걸 소희가 직접 겪어보긴 했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왜 이렇게 복잡한 거지?’‘왜 미션 수행할 때처럼 그렇게 간단해질 수 없는 거지? 전우면 전우, 적이면 적. 전우에게 무한한 믿
임구택의 말에 소희가 잠깐 멍해 있더니 순간 귀밑까지 빨개져서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임구택!""화난 모습도 괜찮으니 더 이상 그런 의미 없는 표정은 짓지 마, 보기만 해도 질리니까."임구택이 한 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빨리 차에 타."하지만 소희는 그의 차를 돌아서 앞으로 걸어갔다.이에 임구택이 한숨을 쉬고는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소희의 팔을 잡았다."어디로 가는 건데?"소희가 손을 뿌리치고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그러자 임구택이 차갑게 물었다."여기서 싸우고 싶어?"임구택의 말에 소희가 주택단지 앞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았다. 그중에는 같은 건물의 이웃도 있었다. 그래서 소희는 더는 반항하지 않고 임구택의 손에 잡힌 채로 그의 차에 올라탔다.임구택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소희를 자리에 앉히고는 안전벨트까지 해주었다.그러나 소희는 내내 냉담한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차에 오른 후 임구택은 바로 시동을 걸고 주택단지를 떠났다. 그러다 소희의 화난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차는 천천히 임씨네 집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한참 후, 소희가 평정심을 되찾고 차창 밖 뒤로 물러나는 경치를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임구택, 빠른 시일내로 이혼 수속을 밟자."끼익-임구택이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옆에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웃음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눈빛도 얼음장마냥 차가웠다."이혼하고 심명과 함께 있고 싶어서?"소희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직시했다."그래, 나 이미 결정했어. 심명을 받아들일 거야.""다시 말해봐!"임구택이 갑자기 몸을 기울여 소희의 턱을 잡았다. 얇은 입술을 꾹 오므리고 있는 게 곧 폭발할 것 같았다."자기야, 내가 자기를 엄청 오래 참아줬다는 거 알아?"소희의 눈동자는 맑으면서도 차가웠다."아무도 너더러 참으라고 하지 않았어.""네 말이 맞아, 나도 진작에 참고 싶지 않았어!"임구택이 말하고는 소희의
그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 중간의 감정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대치하고 있는데 소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수신 번호를 확인한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조여들었다.임구택도 수신 번호를 보았다. 그러고는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간 눈빛으로 소희에게 말했다."받아."그는 소희가 전화를 받아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기는커녕 거의 소희의 얼굴과 붙어 있을 정도로 가깝게 기대어 있었다.이에 소희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평정심을 찾은 후 고개를 살짝 돌려 전화를 받았다."심명?""소희야, 저녁에 밥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오주 쪽에 또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봐야 해."소희가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지금 바로 가야 하는 거야?"소희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있었고 심명은 즉시 이상함을 알아차렸다."소희야, 너 어디야?"임구택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숙여 소희의 귓불을 물었다.소희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지로 짓누르고 한 손으로 임구택의 어깨를 밀면서 아무 일도 없는 척 대답했다."나 아래층에 있어."아래층에 있다는 말에 심명은 소희가 요요랑 있는 줄 알고 다시 아쉬워하며 말했다."나 아마 그곳에 며칠은 머물러야 할 거야. 그러니 내가 없어도 네 몸을 잘 챙기고."소희는 남자의 키스에 온몸이 뻣뻣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어제저녁에 성연희와 통화를 한 후 소희는 심명을 찾아가 제대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더는 만나지 않고 현재의 관계를 끝내거나, 아니면 같이 있기로 결정하고 심명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거나.그러나 일은 항상 계획을 벗어났다.지금 이렇게 임구택과 얽히고 있었으니 심명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심명이 떠난다는 소리에 그녀는 이유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임구택이 자극해 내는 전율을 무시하고 말했다."알았어. 조심해서 갔다 와."심명의 말투가 여전히 다정
월요일, 소희가 제작진으로 출근했다.그리고 그 한 주는 엄청 순탄했다. 일도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었고.그날 임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이성을 잃을 뻔했던 것만 제외하고 임구택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하지만 이현을 볼 때마다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임구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유욕 때문에 그런 포악하고 편집스러운 말을 한 게 아닌지 궁금하기도 해서.이현과 여민의 관계는 여전히 엄청 좋았다. 그리고 여민은 여전히 일부러 소희 앞에서 임구택을 언급했고, 이현도 마치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행복한 모습을 드러냈고.하루하루가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소희를 놀라게 했던 건 류 조감독의 그녀에 대한 태도가 다시 좋아졌다는 것이다.전에 분명 그가 소희를 배우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한 것 때문에 소희가 눈치 없다며 고의로 사람을 찾아 그녀를 괴롭혔었는데, 왠지 이번 주부터 태도가 확 바뀌어 다시 그전처럼 소희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립스틱 선물, 꽃 선물, 애프터눈 티. 소희가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류 조감독의 태도는 여전했다.그래서 결국 제작진 전체가 류 조감독이 소희에게 구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날도 류 조감독의 조수가 소희에게 장미꽃 한 움큼을 선물했고, 소희는 바로 꽃을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류 조감독에게 전하세요, 다시 꽃을 보냈다간 바로 성추행죄로 신고하겠다고."이에 조수가 얼른 꽃을 들고 돌아갔다.하지만 30분도 안 되어 류 조감독이 직접 꽃을 들고 와서는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 소희 씨 만약 장미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내일에는 백합으로 사줄게."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류 조감독님,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솔직히 말하세요!"그러자 류 조감독이 바로 대답했다."나 소희 씨를 좋아해, 그래서 구애하고 있는 거고. 설마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소희 씨, 전에 내가 잘못했어. 나의 틀린 방식에 사과할게. 하지만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 네가 처음 제작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룸 밖에서 여민과 마주치게 되었다.손에 술 한 병을 들고 있던 여민이 소희를 보더니 술병을 들었다."78년산 강제야. 소희, 함께 한잔해!"하지만 소희는 맑고 고요한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여민이 웃으며 문을 밀고 그 옆에 서서는 소희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소희가 룸으로 들어서자 여민이 바로 손에 든 술병을 들고 여러 사람을 향해 말했다."소희 씨가 술을 쏜대요. 다들 어서 소희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해야죠."소희가 순간 고개를 돌려 여민을 바라보았다.여민이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향해 눈썹을 올렸다.다들 놀라서 소희를 쳐다보았다."78년산의 강제라니. 소희 씨, 통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설마 갑자기 부자가 됐어?""소희 씨, 몰라봤네. 이렇게 돈이 많은 부자였다니!""소희야 고마워. 내가 한 잔 따라줄게. 이렇게 비싼 술은 나도 처음이야!"소희가 얼굴색 한 번 바꾸지 않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밥 먹는 거니까요. 다들 재밌게 놀기 바랍니다."이때 이 감독이 일어서서 말렸다."소희 씨, 이 술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다 같은 팀의 식구들인데, 이렇게 허비할 필요 없어.""괜찮습니다. 다들 마음껏 즐기면 됩니다."소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이에 여민이 기뻐하며 웨이터를 불러와 술을 따게 하고는 모든 사람의 술잔에 따랐다.이정남이 소희를 노려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 미쳤어? 수백만 원짜리 술을 그렇게 막 사도 돼? 오늘 네가 쏘는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야?"그러자 소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진 게 아니에요."이정남이 듣더니 잠깐 멍해졌다. 그러다 곧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여민이 일부러 그런 거야?"마침 이현과 여민이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소희의 얼굴에 순간 한기가 올랐다.‘주범은 여민이 아니야.’‘멍청이, 전에 그렇게 이용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다니.
웨이터가 명세서를 소희에게 건네자 이 감독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명세서를 빼앗으려 했다."그냥 내가 계산할게!""아닙니다."그런데 소희가 웃으며 명세서를 가지고 가서는 휴대폰을 꺼내 계산할 준비를 했다.이에 이정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돈이 충분해?""네."이때 옆에 있던 이현과 여민이 눈길을 마주쳤고, 여민이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속이 깊긴 깊네, 다들 보는 앞에서 난폭하게 화를 내며 추태를 부리지 않다니."그러다 또 실망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재밌는 연극은 물 건너갔네. 진짜로 계산할 돈이 있었으니."이현은 의외로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필경 소희가 임구택과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임구택이 소희를 박대할 리가 없었으니까.그녀는 고개를 돌려 류 조감독에게 눈짓을 했고, 류 조감독이 접수하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소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대범하고도 자상하게 말했다.."소희가 갓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술을 쏠 돈이 있겠어? 이 술은 내가 소희를 대신해 지불할게."말하면서 그는 휴대폰을 꺼내 진짜 계산하려고 했다. 사실 그는 소희가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혀 막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그래서 몸을 돌려 떠보듯이 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야, 내가 대신 낸다?"그러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감사합니다, 류 조감독님."류 조감독의 미소가 순간 살짝 굳어졌다.그가 소희를 대신해 지불할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왠지 소희의 태도가 수상했다.이때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 웃으며 말했다."류 조감독님, 정말 통이 크시네요."이미 한 말이 있으니 류 조감독은 번복할 수가 없어 명세서를 들고 꾸물거리며 620만 원을 지불했다.돈이 카드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그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이 감독이 류 조감독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하듯 말했다."류 조감독, 이렇게 대범한 모습은 처음 보네."류 조감독이 듣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소희에게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하지만 그녀도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류 조감독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화가 나서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지경이었다.그래서 연속 이틀 동안 촬영할 때 여민에게 좋은 태도를 보이지 못했고, 마음이 불쾌한 여민은 이현을 찾아가 하소연했다."그 620만 때문에 류 조감독이 지금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현이야,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이현은 자신이 소희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아이디어를 낸 거였는데, 소희의 반응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날 줄은 몰랐다.그래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류 조감독이 다시 너를 찾게 되면 말해 줘, 그 620만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도록 하겠다고."이현의 말에 여민의 눈빛이 반짝였다."내가 보기엔 소희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닌 것 같아. 계속 물어뜯었다간 우리도 다칠 수 있을 것 같아.""아무리 강한 상대도, 무서운 게 있는 법이야."......류 조감독은 소희 앞에서 감히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여전히 매일 꽃을 보냈다.그리고 그 모습에 제작진 중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일부 소녀들이 소희를 엄청 부러워하고 있었다.아무래도 류 조감독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고, 제작진에서 또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희에게 ‘일편단심’이기도 했으니.이정남이 소희의 사무실 문밖에 놓인 한움큼의 분홍색 장미를 보더는 웃었다."정말 껌딱지가 따로 없잖아. 아무리 쫓아내도 들러붙는 게,"소희는 전혀 보지 못한 듯 일에만 전념했다."보지 않으면 돼요."이에 이정남이 차가운 목소리로 또 말했다."그건 그렇지만 역겹잖아!"*이틀 후, 여민이 저녁에 고명계를 따라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마침 임구택도 있었다.여민은 고명계의 곁에 앉아 끊임없이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고명계를 한번 보고는 또 시종 단아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임구택을 쳐다보았다. 순간 이현이 왜 임구택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술을 몇 잔 마신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