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연이 대답했다.“소희 언니에게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유는 그러는 시연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크게 실망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소희 씨는 기껏해야 녹화 거부로 제작진을 위협하라고 구 선생님을 설득할 거야. 하지만 단희의 배후에 있는 분은 함부로 건드려서 안 되는 존재야. 이런 상황에서, 제작진은 구씨 수선집이 가져다주는 이슈를 포기하더라도 단희 배후에 있는 그분의 심기를 건들려 하지 않을 거라고.”‘만약 구 선생님이 끝까지 소동과 합작하는 걸 거부하게 되면 제작진 측은 틀림없이 구 선생님께서 출연 거부를 한 방향으로 동영상을 편집하고, 재봉사를 따로 찾아 시연이와 합작하게 할 건데.’‘어차피 단희의 목적은 우리의 인기를 짓눌러 버리는 거고, 결국엔 그 여인이 이기게 될 거야.’‘반대로 나와 시연이는 제대로 제작진의 미움을 사게 될 거고.’그래서 소희까지 불러와 성혁과 함께 제작진에 맞서려는 시연의 행위에 대해 소유는 반대 의견을 내놓은 거였다, 제작진의 미움을 샀다간 그들은 앞으로 예능에 더 출연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터니까.하지만 시연은 결국 소희를 찾아왔고, 이에 소유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감독과 이 일을 해석해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을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적어도 난 제작진과 대항할 의향이 없었다는 걸 증명해야 해.’……소희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성혁이네 댁으로 향했다.아직 소희를 보지 못한 성혁은 계속 소동과의 합작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제작진 측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많은 조건을 제기하면서까지 성혁을 설득하게 했다. 심지어 제작진 측에서는 구씨 수선집에 대한 선전에 힘을 쓰겠다고, 출연료도 백만 단위로 올려주겠다고 승낙했다.그러나 성혁은 그들이 준 조건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단 소희를 만나겠다고, 소희가 합작하라고 한 사람과만 합작하겠다고 명확한 태도를 보였다.그래서 감독이 한창 조급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는데 마침 한 스태프가 달려와 말했다.“구 선생님
“소희 언니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소시연이 다가와 소동을 노려보며 묻자 소동이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몇 가지 사실을 알려줬지.”소희의 희고 깨끗한 얼굴은 순간 얼음장 마냥 차가워졌다. 그러면서 소동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작업실안에서 감독과 프로듀서가 소희를 보자마자 열정적으로 일어나 맞이했다.“소희 씨 맞죠? 어서 앉아요!”감독이 직접 소희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웃음을 드러냈다.“전에 소유 씨한테서 들었는데, 소희 씨가 구 선생님을 설득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줄곧 기회를 찾아 소희 씨한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거든요.”“고맙긴요. 그건 그렇고, 제가 구 선생님을 설득하면서 합작 상대를 시연이로 정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변동이 생겼다면서요?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네요.”감독이 덤덤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 우리 프로그램에서 구 선생님을 모셔온 건 프로그램의 이슈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구 선생님께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시기로 결정한 것도 그분만의 목적이 있겠죠. 그러니 서로의 목적이 최대한 실현되면 끝난 거 아닌가요? 합작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할까요?”소희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당연히 중요하죠. 구 선생님과 합작할 사람이 소동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저는 구 선생님을 설득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저 시연이 때문에 간 거지, 소동이 때문에 간 거 아니라고요.”이때 프로듀서가 다가와 소희를 향해 말했다.“소희 씨도 북국의 디자이너라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북극의 효익을 위해 이러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요.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프로그램에서 북극을 많이 홍보해 줄게요, 시연 씨에게도 화면을 많이 주고. 설령 시연 씨가 이번 회차의 포텐이 아니라고 해도 저번보다 더 대박 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어때요?”그러면서 그는 미리 준비한 카드 한 장을 소희에게 건네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물론 우리도 소희 씨에게 헛수고를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찬호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시연은 소유의 호출에 급히 전화를 끊었고, 찬호는 안절부절 못하여 결국 임유민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제작팀과 시연이 대치하고 있는 것때문에 소희가 바로 찾아갔다는 말을 들은 유민도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소희 누나 설마 괴롭힘 당하는 거 아니야?]찬호가 걱정되어 물었다.이에 유민이 눈알을 한번 굴리더니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소희 쌤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생각났으니까.”[누구?]“우리 둘째 삼촌!”유민이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구택은 한창 직원을 훈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수신 번호를 확인한 구택은 손을 들어 임원들을 나가게 하고 전화를 받았다.[둘째 삼촌, 소희 쌤이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상관할 거예요, 말 거예요?]구택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뭐?”[소희 쌤이 지금 금강시에 있어요. 아직 소희 쌤과 잘해보고 싶다면 어서 가봐요.]“금강시에는 뭘 하러 간 건데?”구택이 물으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말하자면 길어요. 아무튼 빨리 가봐요. 한 예능 프로그램이 그곳에서 녹화하고 있는데, 바로 가서 소희 쌤을 찾으면 돼요.]구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드러냈다.‘소희가 드라마 제작팀으로 출근한 거 아닌가? 언제 또 예능 녹화하러 간 거지?’하지만 구택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차를 몰고 금강시로 질주했다.……한편 작업실 안에서 감독과 소희는 여전히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감독이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지만, 소희는 여전히 조금도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그리고 소희가 북극 작업실을 대표해 그렇게 큰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는 인맥을 통해 진석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고, 진석에게 자초지종을 알려주며 타협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다른 방식을 통해서라도 이득을 많이 주겠다는 조건을 걸면서까지.그러나 진석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내던졌다.[저는 소희의 의견을 존중합니다.]프로듀서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임구택은 제작진의 임시 사무실이 있는 곳에 도착한 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안단희가 구택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경악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구택을 맞이했다.“임 대표님, 안녕하세요. 전화 한통이면 되는 일을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거예요?”소동과 소시연 등도 구택을 보더니 분분히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면서도 시연은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구택이 소동을 도와줄지 소희를 도와줄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구택이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소희는?”시연이 듣더니 즉시 대답했다.“안에서 감독님과 이야기하고 있어요.”이에 구택이 바로 긴 다리를 들어 안으로 들어갔고, 그러는 구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동이 단희를 향해 물었다.“임 대표님이 정말로 우리를 도와줄까요?”“당연하지, 이번 일은 임 대표님이 직접 방송국에 연락해서 지시한 건데. 구은서의 체면이 소희보다 더 크다고.”처음엔 단희도 서수연과 마찬가지로 소희가 구택의 조카딸인 줄 알았다. 그러다 나중에 유민의 가정교사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반대로 구은서는 임 대표와 같이 자란 절친인데, 당연히 구은서의 지위가 더 높겠지.’그러나 지난번에 구택이 소씨 가문에서 소희의 편에 섰던 장면이 생각나 다소 불안해진 소동은 단희더러 따라 들어가 보라고 했다.이에 단희가 한참 생각하더니 결국 구택을 쫓아가 함께 감독 만나러 들어갔다.그러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즉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감독님, 프로듀서님, 임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감독과 프로듀서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놀라운 표정을 드러내며 구택을 쳐다보았다.“임, 임 대표님!”프로듀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구택과 악수했다.“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 저희 지금 북극 작업실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소동 씨와 구 선생님이 합작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소희도 고개를 돌려 구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희의 얼굴색은
임구택이 소희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왔다니!제작진은 방금 소희에게 한 말을 생각하며 등골이 서늘해졌다.구택이 제작진과 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이 더 필요한 건가요?”제작진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공손한 태도로 소희에게 사과하자 감독도 연신 사과하였다.“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임구택 사장님과 소희 씨 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소희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 있었지만, 이런 기회주의자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구택도 소희를 따라 나갔다.소희가 나가자, 소시연과 소동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 시연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희를 불렀다.“문제는 해결됐어. 넌 계속 구성혁 선생님과 협력해. 앞으로는 아무도 너희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시연은 놀란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정말이야? 소희야, 너 왜 이렇게 대단해?”소희는 자조적으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대단한 게 아니야, 구택 씨가 대단한 거지.”시연은 놀라서 구택을 바라보았고 구택은 소희의 비꼬는듯한 어투에 표정이 어두워졌다,둘 사이에 이미 오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번 일은 그들의 오해를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소희는 떠나기 전에 구성혁 선생님을 만나 본인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 피해를 주게 된 점을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그러자 성혁은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뭐가 대수라고. 이익을 위해 서로 물고 뜯는 일은 정말 많이 봤고 내가 쉽게 당할만한 인물은 되지 못해.”소희는 성혁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만약 제작진이 불편하게 만들면 그게 언제가 됐든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해결할 테니까.”“걱정 마.”성혁은 소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소희는 성혁과 작별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성혁은 소희를 배웅하기 위해 같이 집에서 나왔고 밖에 서 있던 남자를 보더니 소희한테 물었다.“네 남자친구야?”“아니에요!”소희는 일말의 망설
구은서는 목이 메 말했다. “나 아직 이지민 감독님 영화 촬영 중이야. 지금 그만두면, 감독님이 내 분량을 다시 촬영해야 하고, 소희 씨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촬영 끝나면 그때 강성에서 떠날게. 떠나기 전까지 소희 씨 안 괴롭히겠다고 약속도 할게. 그리고 이 시점에 떠나면 소희 씨가 당신이 찔리는 점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구택은 눈을 감고,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말했다.“소희 건드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택의 말에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강성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소희는 자신의 서재에 콕 박혀서 디자인했는데 한번 했다 하면 몇 시간은 걸렸다.소희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되었고 거실 불은 꺼져 사방이 깜깜했다. 구택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긴 기럭지도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굉장히 서글프고 외로워 보였다.소희가 나오자 구택은 스탠드 등을 켰고, 따뜻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녁 준비했는데 식었을 거라서 데워줄게.”“괜찮아, 잠깐 나갔다 올 때 먹고. 밖에서 먹고 올게요.” 소희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차가웠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구택이 곧바로 일어나 따라나섰다.“소희야!”구택의 부름에 소희는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비록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소희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따라오지 말고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지도 마. 안 그러면 내일 바로 이사 갈 거니까.”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소희에 구택의 눈빛은 어두웠고 낮고 느린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소희야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나한테 이러지 마.”구택의 말에 소희는 목이 메어 대답했다.“나한테 생각 할 시간을 줘.”구택은 상처받은 눈빛이었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 결론 나면 알려줘. 여기서 기다릴게.”“지금의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소희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돌아서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구
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미나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미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남자친구가 날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때,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어요. 난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결국엔 거절했죠.” 미나는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거든요. 화해해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을 거고 전 제 전 남자친구를 다시 믿을 수도 없게 될 거예요. 그래서 이왕 아프게 된다면 길게 아파하는 것보다는 짧게 아픈 게 낫죠. 그리고 이미 헤어진 마당에 지나간 인연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아요.”소희는 미나의 말을 들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지 눈을 내리깔았다.그러자 미나가 소희에게 물었다“제가 한 선택이 맞는 거일까요? 아니면 다시 한번 기회를 더 줘봐야 할까요?” “그건 미나 씨가 그 사람한테 기회를 줄 여부를 결정하셔야 하죠.”소희의 말에 미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는요, 그 사람이 문자로 다른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나를 폄하하고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미묘한 기류가 가득 맴도는 대화를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역겨워서!”이에 소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나 씨는 뭐가 올바른 선택인지 사실 알고 있잖아요. 전 남자친구의 달콤한 말에 속지 말고 본인 생각 굽히지 말아요.”미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쓰레기 같은 남자는 멀리해야죠!”소희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맞아요!”오후 퇴근하는 길에 우청아가 소희에게 전화해서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소희는 길을 가다가 디저트 가게에 들러 요요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샀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요가 소희를 부르며 달려왔다.“소희 이모!” 소희는 한 팔로 그녀를 안아 들고 한 손에는 디저트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엄마는 어디 있어?”청아가 주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방을 지나다가 체격이 제법 큰 두 남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임구택은
임구택은 많은 요리를 준비했고, 장시원은 가져온 와인을 열었다. 네명은 평소처럼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구택과 소희의 불화로 인해 분위기는 다소 침체되었다.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청아는, 구택이 발코니로 전화 받으러 간 사이, 걱정스레 물었다. “소희야,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싸웠어?”소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원이 소희에게 와인을 따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구택이를 지켜본 내가 제일 잘 알아. 구택이는 너를 진짜 사랑해. 너희 둘 겪은 일이 그렇게 많이 있었음에도 이겨냈잖아. 사소한 일로 감정 상하지는 마.”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감정이라는 건 당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거야.”소희의 대답에 청아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희는 차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알려줄게.”“소희야 너랑 구택오빠의 사랑은 내가 유일하게 믿는 진실한 사랑이야. 둘이 꼭 잘 될 거야!”청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시원이 청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청아야, 내가 여기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날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 아니야?”청아는 그런 시원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사랑이 뭔지는 알아?”청아의 말에 자신이 제대로 무시를 당한 것 같아 언짢은 시원이었다.잠시 후, 구택이 곧 돌아왔고, 그들은 다시는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식사하는 동안 시원과 청아만 가끔 장난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았을 뿐 소희랑 구택은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식사를 마친 소희는 위층으로 돌아갔고, 구택도 함께 인사를 하며 떠났다.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며 침묵했고, 위층에 도착한 후 소희는 집으로 바로 걸어가려 했지만, 구택이 소희의 팔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물었다.“생각은 정리됐어?”소희가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눈빛으로 거부감을 드러내자 구택은 입술을 앙다물고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만약 피임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