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소동은 항상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고 방송국에서 종종 안단희와 함께 앉아 수다를 떨며 티타임을 즐겼다. 진연에게 들은 바로는, 소동이 집에서도 매우 편안해 보였으며, 매일 밤 자신과 드라마를 봤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소동의 놀라운 디자인 초안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소시연 자신은 매일 디자인 초안을 생각하느라 거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낮에는 소유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이런 자리에서조차 디자인 초안에 대해 생각했다.‘혹시 소동은 정말 디자인 천재일까?’‘그렇다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전에 왜 아무런 반응도 없었을까?’시연은 소동을 보며 고민에 빠져 깊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시연은 소동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곧 자신의 디자인에 몰두했다. 주변의 소란과 환호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척했다.……임구택은 소희가 저녁에 소씨 집안의 축하연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고 돌핀 호텔로 소희와 함께 갔다.호텔에 도착하자, 소희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 혼자 올라갈게. 거기 가서 잠깐 시연에게 인사하고 바로 나올 거야.”하지만 구택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이미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데, 소씨 집안이 안다고 뭐가 달라져?”소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임씨 집안 사람들이 알게 된 후부터 이미 충분히 골치 아팠기에, 소씨 집안사람들까지 알게 되는 건 전혀 원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소정인 만이 아니라 마치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었다.구택은 소희의 고민스러운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난 네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갈게.”그러면서 구택은 차에서 초대장을 꺼내자 소희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소씨 집안에서도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냈어?”“응, 네 사촌 소설아가 준 거야.” 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나도 당당하게 갈 수 있겠지?”소희는 그의 의도를 잘 알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들어가면 네가 따라와.”“
“소희 언니!”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축하해, 소시연. 인터넷에서 너를 응원하는 많은 댓글을 봤어.”“내 디자인도 봤어?” 시연은 기대와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소희는 이번 주에 바빴던 탓에 사과하며 말했다. “아직 못 봤어. 며칠 정도 바쁜 거 해결하면 꼭 제대로 볼게.”“응!” 소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 시선이 어두워졌다. “아쉽게도 나는 계속 소동에게 밀려. 솔직히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해. 소동이 디자인한 옷이 내 것보다 낫더라고.”시연의 말에 찬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소동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거야?”“나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재능과 능력을 갖추게 됐을까?” 시연이 착잡해져 탄식했다.“디자인은 입는 사람의 스타일, 체형, 피부 등과 잘 어울려야 완벽해져.”“아마 소동이 안단희와 더 잘 맞추고, 그녀의 매력을 찾아서 디자인한 옷이 더 놀라운 효과를 낸 걸 거야.”“조급해하지 마, 너와 소유가 더 많이 소통하면서 소유의 특징에 맞춰 디자인을 완성하면 돼.” 소희가 천천히 말하자 시연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마치 영감을 얻은 듯 말했다. “알겠어, 열심히 할게.”세 사람은 함께 연회장으로 걸어갔고, 시연은 소희를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하순희는 자신의 자녀들이 모두 소희를 좋아하니 소희에 대한 인상도 조금 나아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희야, 이제 퇴근했니?”“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드라마 촬영이 힘들지? 생활이나 일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나는 널 우리 가족처럼 생각하니까.” 하순희가 웃으며 말하자 소희 역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숙모!”시연은 하순희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엄마,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넓어졌어? 나 정말 적응이 안 돼!”“내가 예전에 마음이 안 넓었어?” 하순희가 웃으며 묻자 시연은 반사적
하순희는 두 사람을 데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두 분은 손님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소희를 본 소해덕은 다소 놀랐지만 이내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희도 왔구나?”하순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희도 우리 소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연히 와야죠!”주변의 몇몇 손님들이 소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분이 소정인 씨의 딸이시죠? TV에서도 봤어요, 참 멋지더라고요!”“손녀들이 모두 훌륭하네요!”“모두 재능이 있고 예쁘기까지 하군요!”“소시연도 나중에 소동 씨 못지않을 거예요!”하순희는 다른 사람들이 시연을 칭찬하면서도 소동을 잊지 않고 언급하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때 한 손님이 소희를 보며 물었다. “이분도 손녀세요? 어느 집안 출신인지, 전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우리 집안 사람이죠!” 진연이 갑자기 다가와 웃으며 말하자 소동은 손을 꽉 쥐고 놀란 눈으로 진연을 바라보았다. 소희도 진연을 향해 다소 놀란 눈길을 보냈고 하순희도 진연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오, 오늘 드디어 모두 앞에서 자기 딸을 인정하려고 하는 거야?”하지만 진연은 말을 돌려 그 손님에게 계속 말했다. “저랑 소정인 씨가 함께 입양한 딸이에요.”“고향은 운성 산골이고,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가 불쌍히 여겨 대학까지 보냈어요.”“얘가 강성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우리는 그냥 양딸로 삼았죠!”소동은 포커페이스를 지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입가에는 자제하지 못한 미소가 번졌다.하순희는 거의 웃음을 터뜨릴 뻔하며 조롱했다. “어쩌다 높게 평가했더니만!”소희는 차갑고 평온한 눈빛을 유지하며 표정에 변화가 없었고 다른 손님들은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두 내외가 정말 너무 착하셔서, 불우한 학생을 대학까지 보내주시고 딸로 입양하셨군요!”“자신이 키운 딸도 이렇게 훌륭하니, 진정한 선행은 복을 가져오는 법이에요!”“대단하네요!”한 여자 손님이 소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소희가 소씨 집안에 온 이후로부터 소동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큰 짐을 오늘에서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홀가분해진 소동은 긴 한숨을 내쉬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한편, 조금 조용한 곳에서, 소시연은 분노를 표출했다. “큰엄마가 너무 심했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소희를 양딸이라고 말했다니!”“앞으로 소희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하순희는 동정의 눈길로 소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늘 편파적이지만, 진연의 그 마음은 정말 너무 과해.”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리고 제일 어이없는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무 말도 안 하신 거예요!”하순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이미 나간 말을 어떻게 다시 주워 담겠어?”하순희는 소씨 집안 어른들이 소희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 것이 임씨 집안의 지원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소희가 임씨 집안을 뒤에 업은 것이 확실한 지금 누구도 몰랐다.소문에 의하면 소소해덕이 임씨 집안의 입찰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했다.하지만 임씨 집안이 소씨 집안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기에, 이 뒷배경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이와 반면에 소동은 확실히 소씨 가문의 명예를 빛냈기 때문에 가족들은 소동이 소씨 집안에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저 소희만 불쌍해진 꼴이 된 것이었다.하순희는 겉은 차갑지만 마음씨는 따듯한 여인이었고, 진연이 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소희에게 연민을 느낀 하순희는 머리를 돌려 소희에게 말했다.“진연이 널 딸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내 딸로 삼을게.”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소희는 이미 두 해 전에 진연의 결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상황에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진연이 자신을 딸로 부를 때 놀랐다. 소희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고 이미 오래전부터 소씨 집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포기했다.시연은 하순희에게 의미심장하
임구택이 오늘 입은 것은 짙은 남색 셔츠에 검은색과 갈색 체크무늬 넥타이였는데, 그것은 아침에 소희가 그에게 골라준 것이었다.구택의 태도는 본래 무심하고 냉담했다.이러한 진중하고 어두운 복장은 그의 고상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켜, 마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듯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구택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아는 사람들이 몰려와 인맥을 쌓으려고 애썼다.소희는 마치 팬들에 둘러싸인 연예인 같은 구택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소시연도 홀린 듯 말했다. “임구택 사장님 정말 멋있네요. 뭔가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주인공과 똑같아.”소희는 시연을 바라보며 더 밝게 웃자 시연은 소희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말했다.“웃지 마. 예쁘고 잘생긴 걸 좋아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저런 권력과 돈, 외모를 갖춘 남자가 도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할지 너무 궁금해.”시연이 말을 마치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야, 구택 씨랑 친해? 집에서 자주 보나? 혹시 짝사랑한 적 있어?”“응 있어!” 소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고 잘생긴 걸 좋아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시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보다 더 위험하네, 그런 남자는 가까이할수록 위험하니까!”소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여자 친구 있어?” 시연이 궁금해하며 묻자 소희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소희는 구택의 아내였으니, 여자친구는 아니었다.시연은 혼잣말로 말했다. “여자친구가 없다 해도 저런 남자 주변에 널린 게 여자겠지. 따지도 못할 별 쳐다보지도 말아야지.”“어차피 그런 남자 주변에는 여자가 많겠죠. 꿈꾸지 말아야겠어요.”……한편, 장연경은 구택을 보고 소소해덕 앞에서 일부러 물었다. “소설아, 임구택 사장님이 네가 초대장 보내서 온거지?”설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구택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해덕이 구택에게 초대장을 보내라고 했을 때, 그는
“아마도 소희일 거야.”소정인의 추측에 진연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소희 얼굴이 그렇게 대단히 예뻐?”“일단 그건 접어두고, 임구택 사장님이 오셨으니 인사를 해야 해. 당신도 잠시 후에 소동이 데리고 같이 와.”소정인은 진지하게 당부한 후 말을 더 붙였다. “어쨌든 오늘은 소동의 축하연이니, 임구택 사장님이 오셨으니 소동이가 직접 가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해.”진연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소정인이 떠난 후, 진연은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소동을 불러다가 조용히 물었다. “임구택 사장님이 오셨어. 봤어?”소동은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도 꼼짝 못 하시는데, 어떻게 보지 않았겠어요?”진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소동아, 넌 남자친구 없지?”“없어요, 없어!” 소동은 즉시 부인했다.“그럼 됐어!” 진연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사실 우리 소씨 집안과 임씨 집안은 예전부터 교류가 있었어.”“비록 지금은 임씨 집안에 미치지 못하지만, 네가 이렇게 뛰어나니 연합이 불가능하지 않아.”소동은 진연의 말에 놀랐다. “엄마, 내가 구택 씨와 결혼할 수 있다는 거예요?”소동은 구택 같은 남자가 자신에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예전에는 나도 상상조차 못 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넌 유명하고, 재능도 있으며, 예쁘기까지 해. 진짜로 부잣집 딸이야!”“구택이 네 축하연에 왔다는 건, 아마 TV에서 널 보고 매우 감탄했기 때문일 거야!” 진연은 점점 흥분하며 말했다. “그러니 이젠 가능하다고 생각해!”소동의 얼굴에 수줍은 붉은 기가 돌았다. “소설아 언니가 나보다 더 뛰어난데, 구택 씨 곁에서 몇 년을 보냈어도 여전히 비서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구택 씨가 저를 좋아할 리가 있나요?”“설아처럼 강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많지 않아. 남자들은 유능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자를 좋아해. 이 점에서 넌 설아보다 우위에 있고!” 진연은 이어서 말했다. “소동아, 엄마가 너에게 남자친구를 사귀지
임구택은 고개를 돌려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마치 소동이 들고 있는 차를 보지 못한 듯, 받지도 않았다. 소동은 여전히 차를 건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물러서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소동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장연경은 참지 못하고 킬킬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눈에 띄었고, 진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흘깃 쳐다보았고 소정인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임구택 사장님, 차 드세요!”구택은 고개를 들어 소정인을 보았지만, 소동을 아예 무시한 채 일부러 물었다. “소희는 어디에 있나요?”소동은 얼굴색이 바뀌며, 꽉 깨문 입술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구택에게 무시당하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어쩔 수 없이 차를 구택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소정인은 바삐 말했다. “소희는 방금 전에 여기 있었는데, 아마 소시연과 함께 놀러 갔을 거예요. 임 구택 사장님이 찾으시면 제가 지금 불러오겠습니다.”진연은 소정인에게 눈짓을 보내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희는 이런 장소에 익숙하지 않아요. 불러오지 마세요.”구택은 거만한 자세로 앉아, 무심한 눈으로 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희가 왜 이런 장소에 익숙하지 않다는 거죠?”진연은 구택의 의도를 몰라, 당황하며 말했다. “소희는 시연과 함께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해요.”옆에 앉은 전자 산업 관련 회사의 이사는 소씨 집안과 임씨 집안이 친하다고 생각하고, 소씨 집안에 아첨하려고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임구택 사장님이 말씀하신 건 소정인씨와 진연 부부가 후원하는 그 입양된 여자인가요?”“제 생각에는 유전자가 지능과 발전을 결정한다고, 그 여자는 소동 씨에 비할 바가 못 돼요!”구택은 고개를 돌려 윤상현을 쳐다보며, 얇은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오? 그럼 사장님은 소희가 소동에 비해 어디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상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에는 어느 면에서도 못 미칩니다. 소동 씨는 강성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어요
소희의 심장은 두근거리며, 자신이 임구택의 아내가 된다면 강성에서도 상류층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설레었다.구택은 담배를 입에 물고 다시 소정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조소가 감돌았다. “소희는 당신이 입양한 딸인가요?”소정인의 등에 한기가 돋았지만,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진연이 말했다. “네, 소희는 우리가 후원하는 가난한 대학생이에요.”“강성대학에 입학한 후, 우리가 소희를 입양했죠. 하지만 소희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고, 평소에는 온라인 게임만 해요.”소정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진연을 끌어당겨 말을 줄이라고 시그널을 보냈다.이에 구택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물었다. “사모님은 왜 소희를 그렇게 싫어하나요?”진연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좀 더 열심히 하기를 바랄 뿐이죠. 저와 소정인이 소희를 위해 애쓴 걸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요.”“애쓴 거라고요? 당신들이 소희에게 어떤 정성을 쏟았는지 말해보세요. 소희의 대학 등록금은 당신들이 낸 게 아니잖아요.”“소희가 졸업 후 어떤 일을 하고,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애쓴 거’라고 말할 수 있나요?”“당신들은 어떻게 소희한테 정성을 쏟았다는 건가요?”구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어마다 찬기가 담겨 있었는데, 마치 시베리아 한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진연은 임구택이 소희를 위해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말했다. “우리는 평소에 소희를 좀 소홀히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와 함께 살지 않아서 소희와 친하지 않았거든요.”주변의 손님들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소정인 부부가 소희의 대학 등록금을 대줬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말이 바뀌었다.“소희는 당신들 곁에서 자라지 않았죠. 친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희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소희에게 아무런 은혜를 베푼 적이 없으니까.”구택의 얼굴은 차가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