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순간 멍해졌다. 시선은 시언의 모습에 고정되었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소희도 서인을 보고 유진의 두 눈이 멍하니 빛나는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서인은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강시언과 임구택 등에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몇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연희는 아심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아심아, 이제 역할을 좀 발휘해야지!”그 말에 유진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아니예요! 서인 사장님 마음은 제가 알아요. 그냥 제가 천천히 해볼게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유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그럼요! 가족인데 제가 뭐 눈치 보겠어요?”모임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아심은 가방을 찾으며 말했다.[소희야, 회사 동료가 출장 중인데 급하게 자료가 필요하대.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라 회사에 가야 해.]소희는 놀라며 물었다.“이 시간에 그렇게 급한 거야? 그럼 내가 회사까지 데려다줄게.”오늘 주말이라 소희와 임구택은 종일 본가에 머물다가 저녁 모임에 왔다. 자연히 유진은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연희는 소희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이런 건 딱 누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소희는 순간 눈빛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인에게 다가갔다. 서인은 시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결혼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시언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뭘 고민해.”서인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형은 형이니까 뭐든 맞는 말이지. 아무 말도 안 할게요. 축하해요!”시언은 웃으며 물었다.“너는 어때? 마침 소희와 구택도 있으니, 너도 누군가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보는 건 어때?”서인은 잔에 술을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생각해 본 적 없어요.”시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나도 결혼했는데 너는 아직도 생각이 없는 거야?”서인은 가볍게 술잔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이 커질까 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맞은 남자의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술기운을 빌려 서인에게 덤벼들었다.“내 뒤에 서서 움직이지 마.”서인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임유진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넓은 등이 그녀 앞을 완전히 가렸다. 이어서 서인은 다리를 뻗어 단번에 한 명을 쓰러뜨렸다.유진은 서인의 넓은 등에 완전히 가려져, 앞에서 나는 비명 소리와 고함만 들을 수 있었다. 호기심에 고개를 살짝 내밀어 상황을 보려 할 때마다 서인이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눌러 고개를 돌리게 했다.이에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나를 겁주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자신의 이런 무서운 모습을 내가 보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 걸 거야.’...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고,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안의 상황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바닥에는 네 명의 남자가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그 가운데 서 있는 서인은 고요한 눈빛으로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한 손으로는 유진을 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있었다.서인의 무심하고 냉랭한 모습은 한층 더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케이슬을 떠나 서인의 차에 올라탄 유진은, 이제야 안심한 듯 눈을 반짝이며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장님, 진짜 멋져요!”서인은 그녀를 옆눈으로 흘기며 말했다.“싸움 잘하면 멋있는 거야? 그럼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다 네가 존경해야 할 대상이겠네.”유진은 서인의 말을 듣고 얼굴이 뜨거워졌고, 입술을 깨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서인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았다. 자신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라는 것을 꼬집으며, 단순히 싸움 잘하는 남자에게 끌리는 감정은 어리석다고 비꼰 것이다.유진은 속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그
파란 치마를 입은 여자는 어려 보였고, 돌아서며 변명했다.“나도 속았어요. 돈을 많이 주고 샀는데, 알고 보니 병든 고양이를 팔았더라고요!”유진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그래서 그냥 버린다고요?”파란 치마를 입은 여자는 눈치를 보다가 오히려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돈 주고 산 건데, 내가 싫으면 버릴 수도 있죠! 당신이 뭔 상관이에요? 그렇게 착한 척하려면 당신이 데려다 키우든가. 아니면 그냥 신경 끄세요!”그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유진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여자를 쫓아가려 했지만, 서인이 그녀를 붙잡았다.“왜 그래?”유진은 땅에 놓인 종이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키우기 싫다고 그냥 버리다니요! 이건 생명이잖아요. 이런 사람들, 사랑이랍시고 하는 건 전부 가식이에요!”서인은 냉랭한 시선으로 바닥의 종이 상자를 보았다. 안에는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고양이는 아파 보였고, 힘없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작 고양이 한 마리잖아. 키울 능력이 없으면 버릴 수도 있는 거지.”“네가 그 사람한테 절약해서 고양이를 먹여 살리라고 강요할 거야? 아니면 돈을 빌려서라도 책임지라고 할 거야?”유진은 서인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고작 고양이 한 마리? 키우기로 했으면 책임을 져야죠!”서인은 냉정하게 되물었다.“책임을 질 돈이 없으면? 모두 너처럼 돈 걱정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야. 고양이 한 마리가 더 중요해, 아니면 자기 생활이 더 중요해?”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유진의 눈에는 상처받은 듯한 감정이 스쳤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잠시 후, 유진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여 종이 상자를 들어 올린 뒤 뒤돌아섰다. 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유진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유진은 서인의 차를 지나쳐 계속 앞으로 걸었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빨라졌다.서인은 유진의 팔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 차에 타.”유진은 눈물이 맺힌
임유진은 말했다.“우리 회사 맞은편에 바로 애완동물 병원이 있어요. 이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진찰 좀 받아주세요. 저는 위로 올라가서 자료를 찾고 금방 병원으로 갈게요!”서인은 그녀가 안고 있는 상자를 한 번 쓱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이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거야?”유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버릴 순 없잖아요!”서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서인이 그렇게 간단히 수락하자, 유진은 비로소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30분 후, 서인의 차는 임유진이 근무하는 사무실 건물 앞에 도착했다. 유진은 상자를 서인에게 건네며 맞은편 병원을 가리켰다.“저기 보여요? 저곳이에요. 평소에도 회사 사람들 반려동물을 맡아주곤 하거든요. 먼저 가 계세요. 저는 자료를 보내고 바로 병원으로 갈게요.”서인은 무심한 듯 물었다.“오늘 주말인데 회사에 사람 있어?”유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금방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왜요, 저 걱정되세요?”서인은 눈빛을 살짝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자를 들고 길을 건넜다. 유진은 입가에 미소를 마금으며 그를 향해 크게 말했다.“고양이 조심히 다뤄요! 작은 아이라서 놀랄 수도 있다고요!”서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순식간에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진도 미소를 머금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사무실에 도착한 임유진은 컴퓨터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 출장 중인 동료에게 보냈다. 이후 동료와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통화로 논의하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시간을 확인한 유진은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건물 밖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서인이 병원에서 나와 유진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유진은 서인을 보자마자 물었다.“고양이는요?”서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병원에 맡겨뒀어. 아프긴 한데 심각한 상태는 아니야. 치료가 필요해서 일주일 정도는 거기 있어야 해.”유진은 다시 물었다.“무슨 병인데요?
“필요 없어!”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아.”애옹이의 생사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말에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도 곧 좋아하게 될 거예요!”“절대 좋아하지 않아.”“꼭 좋아하게 될걸요!”서인은 유진과 이런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진은 자신이 이긴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밝게 웃었다.두 사람이 케이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두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창 떠들며 강시언과 강아심에게 건배를 요구했다. 두 사람도 대범하게 술잔을 들고 기꺼이 함께 마셨다.이어서 장명원이 긴 줄에 매달린 체리를 꺼내며 말했다.“이번에는 두 분이 동시에 한입에 체리를 물어야 해요!”모두가 흥겹게 웃으며 분위기가 더 뜨거워졌다. 서인이 들어오자 장명원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이 줄 좀 잡아 줘요!”과거 싸운 적이 있었지만, 그 일 이후로 둘은 의외로 친해졌고, 지금은 조금 더 가까워진 사이였다. 시언은 소파에 앉아 이 상황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조백림이 웃으며 말했다.“명원이 서인 사장님한테 줄을 맡기면, 이거 체리를 직접 시언 형님 입으로 보내겠다는 소리 아니야?”명원도 농담을 던졌다.“이게 바로 서인 형님이 공개적으로 사적인 감정을 풀 기회죠!”모두가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서인을 바라보며 기대했다. 서인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잘하는 건 조준이야. 조심하지 않으면 진짜로 시언 형님 입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 후에는 노래방 기계가 켜졌고, 다들 함께 노래를 부르며 카드 게임도 하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파티는 밤 11시가 되어도 끝날 줄 몰랐다.“다들 조용히 좀 해봐요!”갑자기 명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자. 순식간에 방 안은 조용해졌고,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명원은 옆에 있는 간미연을 끌어안으며 자랑스럽게 외쳤다.“저 곧
간미연의 임신 소식에 방 안은 금세 축하의 물결로 넘쳐났고, 그녀는 단숨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중심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미연이 소희, 성연희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장명원이 형인 장시원 곁으로 다가갔다.시원이 물었다.“아직도 너희 둘이 밖에서 따로 살고 있어? 미연인 누가 돌봐?”장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가 미연이 임신했다고 하니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긴 했어요.”“그런데 미연이 이달 말에 대회가 있어서 끝날 때까진 집에서 따로 지내기로 했고요. 그동안은 내가 미연일 돌볼 거예요.”시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대회? 임신했는데도?”명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미연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나도 말리긴 했죠. 근데 미연이 화날까 봐 강하게 말은 못 하겠더라고. 그냥 잘 챙겨주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요.”그는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사실 아침마다 속이 안 좋아서 토하니까 보는 내가 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살이 찐다는데, 미연인 오히려 더 말랐거든요.”시원이 물었다.“입덧인가 보네?”“그렇겠죠. 병원에도 가봤는데 의사 말로는 정상적인 증상이래요. 그냥 견딜 수밖에 없다더라고요.”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더 신경 써서 잘 챙겨줘야겠네.”명원은 결연하게 대답했다.“그럴 거예요!”...이날 모임은 시언과 아심의 결혼 소식을 시작으로, 장명원과 간미연의 임신 소식으로 마무리되며 새벽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이윽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너무 늦은 시간이라, 시언과 아심은 가까운 아심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심이 시언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꼭 작은 고양이처럼 애정을 구하는 모습이었다.시언은 아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몸이 안 좋아?”그는 오늘 밤 아심이 술을 꽤 많이 마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반쯤 취
장시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청아, 내가 널 이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청아는 시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발끝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알아. 한 시간 안에 끝낼게. 당신 먼저 자.”시원은 청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네가 항상 말하던 개인 작업실 열겠다는 계획, 생각은 정리됐어?”청아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아직은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타이밍도 좀 이른 것 같고. 지금은 그냥 스승님 밑에서 배우는 게 훨씬 즐겁고 보람차.”청아의 스승님은 고명기였다. 처음엔 농담처럼 시작된 관계였다. 고명기가 일과 디자인에 대해 그녀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자, 청아가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고명기는 웃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명분이 생기는 거죠.”청아는 장난삼아 스승님이라고 불렀고, 그 호칭은 그대로 굳어졌다. 지금은 회사에서도 모두가 두 사람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알고 있었다.“그럼 빨리 끝낼게!”청아는 시원을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그를 안아주고는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었다. 이후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시원은 청아가 연일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만큼은 쉬게 하고 싶었지만, 청아는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시원은 주방으로 가서 우유를 데운 후 서재로 들어갔다.“이거 마시고 일해. 너무 늦지 않게 자. 난 기다릴 테니까.”시원은 우유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청아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청아는 시원의 배려에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문까지 닫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졌다.청아는 데운 우유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컴퓨터를 끄기로 결심했다....시원이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방으로 들어왔다.침대 옆 테이블에서 자료를 집어 들고 읽으려다, 이불 속에서 삐죽 나온 작은 머리 하나를 발견했다.청아가 하얀 얼굴에 장난기 어
다음 날, 장시원은 우청아와 함께 고명기를 위한 선물을 고르고는, 두 사람은 요요를 데리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점심시간, 세 사람은 우임승과 함께 식사를 했다. 우임승의 얼굴빛과 기력은 훨씬 나아져 있었고, 특히 요요를 볼 때는 눈이 기쁨으로 반달처럼 휘어졌다.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던 중 우임승이 물었다.“네 새언니,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지?”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런 것 같아요.”청아는 한동안 우씨 집안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깊게 신경 쓰진 않았다.오후에 요양원을 떠난 뒤, 시원은 요요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청아가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다음 날 월요일, 청아는 회사로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동료들이 연달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청아 씨, 좋은 아침이에요!”“청아 씨, 이틀 못 봤더니 더 예뻐졌네요!”“청아 씨, 오늘 점심 내가 쏠게. 꼭 와요!”...청아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한 명씩 답례한 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장씨 그룹 빌딩 설계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 청아는 업계에서 이미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청아를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그녀의 명성을 듣고 직접 찾아오는 이들이었다.게다가 스승인 고명기가 청아를 크게 신뢰하며 지지해 준 덕분에, 회사에서도 동료들 사이에서 청아는 매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자리에 앉자마자, 동료들인 이지현과 몇몇 사람들이 청아 자리로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청아 씨, 오늘 아침 회의에서 고명기 부팀장님 승진 소식이 발표된다면서요? 축하해요!”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진하시는 건 제 스승님인데, 다들 스승님께 축하를 전해야죠.”지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저희 부서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부팀장님께서 제일 아끼는 제자가 청아 씨인 건 다들 알잖아요.”“부팀장님 승진이면 청아 씨도 바로 뒤를 따라 승진할 것 같은데요?”다른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스승님 인맥이고 뭐고, 청아 씨 실력이면 이번 연말에 고급 디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