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반나절을 갔을때 길 양옆은 한뙈기 한뙈기 고무원으로 변했고 산기슭까지 이어진것이 족히 몇만 헥타르는 되여보였고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졌다. 한 길목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고, 차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몇 개의 마을도 지나가면서 차에 탔던 사람들이 속속 차에서 내렸고, 그 젊은 커플마저 어떤 다리 옆에서 내리자 결국 차에는 소희 혼자만 남았다.서래마을은 산기슭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거의 고무원에 둘러싸여 있었고 마을의 20여개의 집들 또한 모두 고무원에서 일했다.고무밭 주인은 인근 마을의 길을 닦아 주었기 때문에 자동차가 질퍽거리는 길을 지나갈 필요가 없었다.점심이 다 되어갈 때 차는 서래마을에 도착하였고 소희는 차에서 내려 사방을 대충 둘러보며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을은 산과 맞닿아 있고 비도 많아 주변에는 모두 높고 무성한 나무들이 햇빛을 막아주어 기온은 단번에 몇도정도 내려갔다.지금 이 시간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고무원에서 일하다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마을에는 노약자와 부녀들 그리고 어린이들만 있었다. 현지 옷을 입은 두 노인이 나무 아래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소희를 보고는 눈도 깜박이지 않은채 빤히 쳐다보았다.마을은 모두 지세에 근거하여 지은 조각루들이 있었는데 담장, 1층은 가축을 기르거나 창고로 사용했고 2층은 사람이 살았으며 옥상에는 산에서 자라는 일종의 풀같은것을 깔았는데 이는 굉장히 튼튼했고 비도 잘 막아준다. 소희는 마을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곧장 앞으로 걸어갔고 마을과 가장 가깝게 있는 한 가정집에 도착하였다. 담장에는 두건을 쓴 부인이 우물에서 물을 기르고 있었는데 소희가 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자 소리쳐 물었다.“아가씨, 여행 왔어요?”고무밭 직원들과 안면을 터야한데다가 가끔 밖에서 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표준어를 구사할줄 알았다.완전히 표준적이지는 않지만 대충 의미를 파악할수 있는 정도였다.소희는 들어가서 비어 있는 물병을 흔들며 물었다.“물 좀 주실수 있으신가요?
반시간정도 지났을까, 부인은 밥을 다 차려놓고 소희를 불러 밥을 먹게 하였다.밥은 일반적인 흰 쌀밥이고 그 외에 두 개의 볶음 요리가 있었는데, 하나는 현지야채를 볶은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에 있는 고기와 산버섯을 볶은것이였다.이정도면 이 마을에서는 아주 푸짐한 밥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소희는 밥상에 자신의 밥만 올려져 있는것을 봤고, 부인은 아이를 안고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소희가 나긋하게 말했다.“이리로 와서 같이 먹어요!”그러자 부인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아마 같이 먹으면 소희가 돈을 안 줄것 같았기 때문이였다.“제가 애들한테 사주는걸로 하시죠. 이리로 와!”소희는 요리 두 접시를 가운데로 밀었다.부인은 그제서야 아이를 데리고 왔고 옥수수밥 두 그릇을 더 떠서 함께 밥상에 앉아 먹기 시작하였다.남자아이는 먼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은 후 눈길은 줄곧 접시 속의 고기를 주시하고 있었다.여자아이는 줄곧 야채를 먹었고 고기를 다친 적이 없었지만,가끔 참지 못하고 한 번씩 흘겨봤다.소희는 그녀에게 한 조각을 집어주었고, 여자애는 자신의 어머니를 한 번 보고선 다시 동생에게 고기를 집어주었다.부인은 소희에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딸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채 밥을 먹었다.밥을 다 먹고 소희가 돈 두장을 부인에게 주자 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받았다.그러나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변해선 뒤를 돌아보고 훈계했다.“너, 뭐하는 거야?”소희는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고 아마 여자애가 설거지를 할 때 몇 사람이 먹다 남은 접시에 고기가 하나 더 있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먹을려고 했던것 같았다.부인이 부르자 여자애는 놀라서 바들바들 떨자 손에 든 고기가 땅에 떨어졌고, 옆에 있던 남자아이도 놀라서 크게 울기 시작했다.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옆에 불을 지피는 막대기를 들고 소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때렸다.첫 번째엔 여자애의 목을 가격했고, 여자는 감히 울지 못하
소희는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후 도망가려는 부인을 덥석 잡아 부엌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놀라 벌벌 떨고 있는 부인은 얼굴색마저 하얗게 질린 채 연신 손을 흔들었다."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마당에서 펑펑 울고 있는 남자아이와 놀라 멍해진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소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불곰은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을에서 남존여비를 고집하고 있는 집을 찾아 일부러 부인더러 그녀의 면전에서 아들을 편애하고 딸을 학대하라고 했던 거겠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경각심을 늦추게 하려고.하지만 불곰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진작에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를 동정하지만, 이로 인해 경각심을 늦출 정도는 아니다."그들이 당신더러 날 기절시킨 후 어디로 보내라고 했어?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해?"소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부인은 못 알아들은 척하며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계속 고개를 저었다.이에 소희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들어 올려 도마 위에 짓누르고 옆에 있는 칼을 들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마지막으로 묻지. 어떤 방식으로 그들과 연락을 해? 말하지 않으면 난 당장 이 아이를 죽일 거고, 너희 온 가족은 오늘 저녁에 고기를 먹어야 할 거야."부인의 놀란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바로 "풍덩"하고 무릎을 꿇었다."내 아들을 죽이지 마! 말할게, 내가 말할게!"부인의 말에 소희가 손에 든 칼을 돌렸다. 무거운 쇠칼이 의외로 그녀의 손바닥에서 빠르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부인은 놀란 나머지 눈만 크게 부릅뜨고 숨마저도 크게 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들은 나더러 아가씨를 기절시킨 후 나무판 수레로 고무원 밖 감 언덕까지 끌고 가라고 했어. 그곳에 예전에 폐기된 고무 가공 공장이 있거든."부인이
그러다 수레 옆으로 다가온 후 한 사람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나무판 수레에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그중 한 명이 영어로 하찮다는 듯 물었다."이 여인이 바로 서희야?"다른 한 명이 성의 없이 한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아마도?""불곰은 이 여인이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거야?"남자가 말하면서 소희의 코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보려고.그런데 바로 그가 손을 뻗은 찰나, 소희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의 손에서 차가운 빛이 한번 번쩍이더니 남자의 손목이 바로 잘려 나갔다.잘린 손목은 나무판 수레에 떨어졌고, 남자는 울부짖으며 비명을 질렀다.소희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손목을 자른 후 훌쩍 일어나 다른 남자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피 묻은 비수로 남자의 가슴에 힘껏 꽂았다.남자는 눈을 크게 부릅뜬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소희는 가볍게 날아올라 바닥에 멈춰 섰다.눈 깜빡하는 사이에 남자 두 명을 처리했다.소희에게 손목이 잘린 남자는 비틀거리며 옆에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반쯤 뛰어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아!""사람 죽었어!"이때, 옆에서 갑자기 한 여인의 겁에 질린 비명이 들려왔다.소희가 고개를 돌려 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녀와 같은 여관에 묵었던 젊은 커플이었다. 두 사람은 산에서 하루를 걷다가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당장 여기를 떠나.""너 사람을 죽였어, 너 사람을 죽였어!"여인이 소희를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산에서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남자도 놀라 멍해져서는 두 다리를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소희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당장 쫓으려 했지만 페기된 공장 건물에서 갑자기 20여 명이 달아 나왔다. 위장복을 입은 그들은 하나같이 키 크고 흉악했고 손에는 전부 칼
소희는 민첩하게 한 남자의 팔을 따라 미끄러내려 종아리를 세게 걷어찬 후 손에 든 비수를 힘껏 남자의 목덜미에 꽂았다.살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소희는 여유롭게 덩치가 큰 남자들 사이에서 공격을 날렸다. 그녀는 비록 보기에 많이 수척했지만 순발력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모든 공격에는 보여주기식이 전혀 없었고 전부 급소만 공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세 명의 남자가 쓰러졌다.불곰은 사람들 뒤에 서서 소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는 한 번도 눈앞의 소녀를 얕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비록 C국 경내라는 이유로 이만한 인원들밖에 데려오지 못했지만, 하나같이 정예였고, 목숨을 바칠 마음가짐을 안고 이곳까지 왔다. 그는 오늘 반드시 서희를 이곳에서 죽여야 했다.요 몇 년 동안 서희 수하의 추격 때문에 그는 곳곳에서 제약을 받고, 끊임없이 숨어다니는 바람에 장사와 수하가 전부 격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소희를 죽이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숨어다니며 살아야 했다.C국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삼각주에 관한 일에는 절대 관여할 수 없고, 용병들 앞에서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건 진언이 그녀에게 정한 규칙이다.마찬가지로 C국은 그가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서희를 죽도록 증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런데 마침내 이번에 누군가가 그에게 이 기회를 제공했으니 그는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체하지 않고 왔다.서희가 직접 그를 죽이고 싶은 만큼 그도 그녀를 죽이고 싶었으니까.자신이 데리고 온 부하가 네다섯 명이나 서희의 손에서 죽어나가자 불곰의 눈에는 순간 포악한 빛이 번쩍였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데려와!"방안에서 두 사람이 한 남자를 끌고 나왔다.남자는 온몸에 힘을 잃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서희, 누군지 한 번 봐봐."불곰이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싸우고 있던 쌍방이 모두 멈추었다. 중간에 포위된 소희의 하얀 얼굴에는 피가 잔뜩 튀었다. 그녀는 칠흑
장명원은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발버둥 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결국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칼이 자신의 발목을 향해 날아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땡-소희가 걷어찬 돌멩이 하나가 불곰의 칼에 부딪히자 칼은 순식간에 방향이 틀려 옆의 진흙에 꽂혔다.장명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별안간 고개를 들어 소희를 바라보았다.불곰도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냉담하게 말했다."이래도 모른다고?""너희들이 죽이려는 건 나잖아. 다른 사람과는 무관하니 무고한 사람을 연루시키지 마."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불곰, 저 사람은 풀어줘. 나 혼자 여기에 온 건 바로 우리의 일을 우리끼리 조용하게 해결하고 싶어서야.""너의 능력은 나도 잘 알아. 이 사람을 살리고 싶으면 무기를 바닥에 버려."불곰이 말했다."그러지."소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장명원은 그제서야 그를 납치한 사람이 불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로 소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이 사람의 말을 듣지 마요!""닥쳐요 그냥!"소희가 장명원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고는 불곰을 쳐다보며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앉아 비수를 발밑에 놓았다.그녀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어 손에 든 주사기를 소희의 어깨에 세게 박고 힘껏 아래로 눌렀다.하지만 거의 동시에 소희가 손을 들어 그 사람의 손에 있던 주사기를 빼앗고, 그 사람을 장명원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그 후 바로 하늘로 날아올라 한 발로 불곰 앞에 있는 남자의 가슴을 걷어차고 몸을 돌려 다른 사람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에 든 주사기를 그 사람의 팔에 꽂아 3분의 2의 약을 전부 주입했다.그녀의 동작은 엄청나게 빨라 불곰 쪽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이 연달아 죽었다.소희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바로 불곰을 향해 달려들었다.그녀의 몸에는 이미 3분의 1의 약이 주입되었고, 그녀는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불곰이 반드시 저 여인을 죽일 겁니다."해가 점점 져가고 있었다. 산비탈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었고, 소녀도 피범벅으로 되었다. 그녀 자신의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싸움은 멈추지 않았고 숲 바람은 메스꺼운 피비린내를 휘감고 불어왔다.소희의 체력은 점점 소모되고 있었다. 특히 이름 모를 약물을 맞은 후 체력은 더욱 빨리 소모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통증도 마비시켜 그녀로 하여금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등에는 두 곳 베이고 팔에도 부상을 많이 입었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그녀의 동작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에게 목표라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불곰을 죽이는 것이다.자신이 데려온 사람들이 전부 소녀의 발밑에 쓰러지자 불곰은 드디어 당황하기 시작했다.그는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어 소희의 목덜미를 향해 힘껏 날렸다.소희가 마침 비수로 한 사람의 명치를 찌르고 있어 미처 뒤로 물러설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겨우 몸을 피했고 칼날은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공중에 흩날렸다.불곰은 그녀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소희는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몸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약물이 발작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더는 피할 수 없었고 칼끝은 순간 그녀의 어깨에 박혔다.불곰이 손에 힘을 주자 소녀의 신음과 함께 선홍색 피가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불곰의 눈에는 순간 피비린 흥분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다시 한번 칼로 힘껏 찌르려 했지만, 소녀가 갑자기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소녀의 손에는 어느새 짧고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나타났고 그 비수는 신속히 불곰의 목덜미를 향했다.불곰은 순간 놀라움에 빠졌다. 소녀가 자신을 미끼로 삼아 고의로 그를 가까이로 유인했던 것이다.그는 급속히 후퇴했다. 하지만 소녀도 양보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고 다가갔다.그러다 불곰의 등이 굵은 나무에 부딪혔다. 그가 손에 든
심명은 숲속에서 달려 나와 전기 막대기로 불곰의 수하 한 명을 기절시켰다. 그러고는 또 전기 막대기를 휘두르며 불곰의 다른 수하와 뒤엉켰다.소희는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더니 바로 피를 토했다. 그러다 몸이 나른해져 땅에 쓰러진 채 이를 악물고 힘주고 있던 눈을 감았다.드디어 불곰을 죽여 백양 그들을 위해 복수했어.시름 놓고 전우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네."소희야!"심명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목숨을 걸고 그녀에게 달려갔다.그의 손에 있는 전기 막대기의 강도가 매우 세서, 순간 길을 뚫을 수 있었다.그는 소희의 발 옆에 주저앉았다. 눈빛과 얼굴에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소희를 보며 그는 어디를 먼저 다쳐야 할지 몰라했다.그러다 손을 들어 그녀의 배에 난 상처를 움켜줘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팔마저 덜덜 떨고 있었다."소희야, 소희야, 내가 너무 늦었어!"무지개 촌에서 소희를 찾지 못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근 산에서 돌아다니다 우연히 겁에 질린 커플을 만났고, 그들이 한 소녀가 이쪽에서 포위되었다고 알려 주었다.그래서 듣자마자 서둘러 왔는데도 늦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희는 눈을 살짝 뜨고 심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흐리멍덩해지고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빨리 가, 나를 상관하지 말고.""소희야, 죽지 마. 제발 죽지 마!"심명은 어찌할 바를 몰라 벌떡 일어나 소희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불곰의 수하를 향해 소리쳤다."자, 죽여!"불곰의 수하는 4~5명밖에 남지 않았고 모두 부상을 입었다. 소희가 불곰을 죽인 장면을 목격한 몇 사람은 소희와 심명을 노려보며 다시 달려들었다.심명은 손에 든 전기 막대를 꼭 쥐고 양쪽으로 휘두르며 공격을 막았다. 비록 그에겐 아무런 무공도 없었지만 눈이 돌아간 채 목숨을 걸고 전기 막대기를 휘두르는 탓에 불곰의 수하들은 더는 소희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어느덧 해는 지고 어둠의 장막이 깃든 숲속은 차고 쓸쓸했다.심지어 쌩쌩 불어오고 있는 바람에도 숙연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