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집살이와 일,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한 채 버텨온 세월이었다. 남처럼 대면대면 살아온 남편도, 사춘기를 핑계로 등을 돌린 자식도 제 편은 아니었다. 그 끝에 암까지 찾아왔을 때, 제이는 밤새 빌었다. 단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이번엔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눈을 떠보니 스물다섯의 몸, 20년 전이었다. 아픈 곳 하나 없는 몸으로 살아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고도 짜릿했다. 이제 현제이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도, 사랑도, 엄마도 이번엔 모두 내 뜻대로 다시 시작한다.
View More버스에 올라탄 제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에 스치듯 비친 얼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늘어짐 하나 없는 눈매, 깔끔하게 떨어지는 턱선. 낯선데도 자꾸 눈이 갔다.
"아, 좋다."
말이 절로 나왔다. 그냥 좋았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버스에서 내린 제이는 몇 걸음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지나가던 상점 쇼윈도에 제 모습이 비쳤다.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려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평소라면 눈뜨자마자 삼십 분은 몸을 두들기고 기지개를 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걸음이 저절로 통통 튀었다.
어깨도 가뿐했고, 손끝은 희고 매끈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봤다. 코끝에 남아 있던 소독약 냄새도, 뼛속까지 짓누르던 그 묵직한 통증도 없었다. 늘 얹혀 있던 것처럼 묵직하던 속이 씻은 듯 가벼웠다. 몸 전체가 방금 포장을 뜯은 것처럼 새것 같았다.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에 비친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제이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슴 주머니에 걸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입사일: 2000년 4월 3일
오늘 날짜였다.
"미쳤다, 진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물다섯. 20년 전, 이 로비에 처음 들어섰던 바로 그날이었다.
로비를 지나가는 사람들, 안내 데스크의 화분, 벽에 걸린 회장님 얼굴까지 전부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들이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몸은 스물다섯인데, 머릿속에는 20년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이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누가 오래 남고, 누가 먼저 무너질지. 그런 사실이 그녀를 신나게 만들었다.
마치 시험답안지를 들고 시험을 보는 기분 같았다.
제이는 어깨를 펴고 사원증을 찍었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비를 지나던 제이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임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안내 데스크 직원들도 유난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오늘 회장님 방문하시는 날이라 그래요."
옆을 지나던 직원이 신입들에게 귀띔하듯 말했다.
기획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신입사원 현제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는 짧은 순간, 제이의 시선이 창가 자리에 멈췄다.
도일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도일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다.
전남편, 도일. 20년 전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미소였다.
도일은 나쁜 남편은 아니었다.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든 적도, 주식이나 코인에 손대 집안을 거덜 낸 적도 없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시어머니가 갓 낳은 딸을 앞에 두고 이불을 다시 빨라며 소리를 지르던 날도, 도일은 문 앞에 서서 지켜만 봤다.
"엄마가 원래 저러시잖아. 그냥 좀 참아."
퇴근하고 돌아온 그가 늦은 밤 내뱉은 말은 늘 그 한마디였다. 편들어주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시어머니 편을 들지도 않았다. 그냥,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었다.
제이는 그 무심함이 폭언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는 걸, 이십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 신입이시죠?"
도일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도일을 따라 자리로 걸으며, 제이는 잠깐 웃었다.
20년 만이네, 이 얼굴.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데, 복도 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임원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소리, 낮게 깔린 긴장감.
"회장님 오셨나 봐요."
수정이 목을 빼고 복도를 살피며 속삭였다.
"신입은 커피 한 잔씩 받아 오고 회의실 정리 좀 해줄래요?"
팀장이 다급하게 지시했다. 제이는 다른 신입과 함께 탕비실로 향했다.
종이컵 여러 개를 겹쳐 들고 회의실로 가던 길, 복도 모퉁이에서 제이는 서두르다 누군가와 그대로 부딪혔다.
"어, 죄송합니다!"
종이컵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커피가 튀었다. 상대의 셔츠 소매에도 갈색 자국이 번졌다.
"괜찮으세요?"
제이가 황급히 티슈를 꺼내 내밀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숨이 멎었다.
정준호였다.
심장이 순간 쿵, 하고 크게 뛰었다. 20년 뒤, 이 회사의 사장이 될 사람이었다. 사보에 실린 얼굴로 몇 번 스친 게 전부,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사원증도, 명찰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잘 갖춰 입은 손님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세탁비는 제가..."
"됐어요. 그보다, 다치지 않았어요?"
제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사원인가 봐요."
"...네."
"이름이?"
제이는 잠깐 망설이다 답했다.
"현제이입니다."
준호는 그 이름을 가만히 듣더니, 옅게 웃었다.
"조심히 다녀요."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왔던 길로 걸어가 버렸다. 코너를 돌아 회장 일행 쪽으로 합류하는 뒷모습을 보고서야, 제이는 그가 누구인지 확신했다.
제이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을 주워 담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나도 알은척은 안 해줄게요.
기획팀으로 돌아온 제이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래의 사장님과 마주치다니.
신기한 우연이었지만, 그뿐이었다.
퇴근길, 건물을 나서던 제이는 지하철역 입구 약국 앞에서 걸음이 느려졌다.
진열장에 놓인 소화제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맘때쯤이었다. 엄마가 자꾸 체한다며 저 소화제를 사다 달라고 하던 게.
지하철에 올라탄 제이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병원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다짜고짜 병원 가라고 하면 엄마 성격에 또 됐다고 넘길 텐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가게 만든다. 이번엔 늦지 않을 거니까.
휴대전화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친정엄마 번호였다.
이맘때쯤, 엄마는 자꾸 체한다며 소화제만 삼키고 있었다. 병원 한 번 안 가고 버티다가, 2년 뒤에야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
"어, 우리 딸. 첫 출근 잘했어?"
"어, 잘했어. 사람들도 다 좋고. 엄마는 저녁 먹었어?"
"먹었지.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속이 더부룩한지 모르겠다. 체했나."
제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저 말이었다. 2년 뒤 병을 키운 첫 신호가,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저 한마디였다.
"엄마, 요즘 계속 그랬어?"
"...그건 왜 물어?"
"그냥. 이번 주말에 병원 한번 가보자. 나랑 같이."
"뭘 그런 걸로 병원을 가. 유난 떨지 마."
익숙한 그 말투에, 제이는 잠깐 숨을 골랐다.
"유난 아니야. 이번 주 토요일, 내가 데리러 갈게. 꼭 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제이는 어깨에 힘이 풀렸다. 겨우 한 고비 넘긴 기분이었다.
원룸 방문을 열자 형광등이 깜빡이며 켜졌다. 낡은 이불과 작은 밥상이 전부인 좁은 방이었다. 20년 뒤, 그 넓다던 병실보다도 훨씬 초라했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쉬어졌다.
제이는 이불 위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지나갔다. 가벼워진 몸, 그리고 도일의 얼굴.
제이는 손끝으로 이불의 거친 면을 문질러봤다. 감촉이 선명했다.
꿈일까, 아닐까.
만약 꿈이라면, 이렇게 손끝이 시릴 정도로 생생할 리 없었다. 그런데 또 만약 진짜라면,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방금까지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봤다. 그래도 방은 그대로였다. 낡은 벽지도, 형광등 불빛도.
내일 눈을 뜨면, 다시 마흔다섯의 병실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스치자 제이는 저도 모르게 이불깃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내일이 오면 정말로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었다.
20년을 통째로 되돌려받은 여자에게, 오늘부터 되돌려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인천공항 출국장,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박진철은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사십 년 넘게 몸담았던 회사도, 익숙했던 서울의 풍경도, 이제 그의 뒤편에 남겨질 것들이었다.어제까지도 분주했던 마음이,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공항 안은 이른 시간임에도 여행객들로 분주했지만, 그의 주변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졌다.정지훈이 배웅을 나왔다.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 새벽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온 걸음이었다."이거, 어머니 갖다 드리세요, 꼭이요."정지훈이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제가 좋아하던 한과예요. 한국 오시면서 사 오셨던 그 가게 거요.기억하시죠? 어릴 때부터 실장님이 오실 때마다 늘 사 오시던 그거요."박진철은 그 가방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옅게 웃었다."기억하다마다. 네가 어렸을 때, 이 한과 하나 때문에 울고불고했던 것도 기억하는데.그 조그맣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그때 얘기는 그만하세요."정지훈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공항의 아침 안내 방송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도 드문드문했다."실장님."정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당분간 한국에 좀 더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박진철의 눈빛이 흔들렸다."회사 일 때문이냐.""아니요."정지훈이 고개를 저었다."정 회장님을, 조금 더 알아가 보고 싶어서요.어제 처음으로, 단 둘이서만 저녁을 먹었습니다.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정원도 함께 걸었는데,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곳이라고 하시더라고요."박진철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떨궜다.복잡한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안도와 씁쓸함, 그리고 어쩌면 옅은 질투까지도.사십 년 동안 홀로 짊어져온 그 이름이, 이제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그래야지."한참 만에, 그가 낮게
박진철이 떠난 다음 날, 정 회장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오늘 저녁, 혹시 시간 있느냐."전화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정지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사무적인 용건이 아니라, 그저 저녁을 함께하자는 말이었다.사십 년 넘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제안이었다.회사 일도, 유산 문제도, 그 어떤 무거운 안건도 없이, 그저 밥 한 끼를 나누자는 말이 이토록 낯설게 들릴 줄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있습니다."그가 겨우 답했다."그럼, 오늘 저녁 일곱 시에 본가로 오너라."전화를 끊은 뒤에도 정지훈은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다실에서의 격정적인 첫 만남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초대였다.그저 평범한 부자지간이 나눌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자리였다.그는 옷장 앞에 서서, 오늘 무엇을 입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사십 년 넘게 준비해온 만남이었지만, 정작 이런 사소한 고민은 처음이었다.결국 그는 가장 무난한 셔츠를 골라 입고, 몇 번이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저녁 일곱 시, 정 회장의 넓은 본가.가사도우미가 조용히 상을 차리고 물러났다.넓은 식당에는 정 회장과 정지훈, 단둘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상 위에는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한식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은은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벽에 드리워져 있었다."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정 회장이 먼저 수저를 들며 말했다."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이런 음식이 낯설 수도 있겠지.""아닙니다."정지훈이 수저를 들며 답했다."어머니가 늘 한식만 해주셨어요. 오히려 이런 음식이 저한테는 더 익숙합니다.특히 이 나물 무침은, 어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것과 맛이 비슷하네요."그 말에 정 회장의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하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갔다.그의 시선이 잠시 정지훈의 젓가락질을 향했다가, 다시 조용히 거두어졌다.식사는 조용히 진행되었다.두 사람 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알지 못했
박진철의 마지막 출근일이 다가오면서, 사내 곳곳에서는 그와의 작은 작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복도를 오갈 때마다, 그를 알아본 직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어떤 이는 그저 고개를 숙였고, 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짧은 감사의 말을 남기고 갔다.몇몇 젊은 직원들은 그의 얼굴조차 낯설어했지만, 그마저도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었다.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이 회사 곳곳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었는지, 그는 그제야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오랫동안 그와 함께 일해온 재무팀장이 먼저 그를 찾아왔다.두 사람은 회의실에 마주 앉아, 오래된 프로젝트 이야기부터 시작해 지나온 세월을 하나씩 되짚었다.창밖으로 비치는 오후 햇살이 회의실 테이블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실장님 밑에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재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숫자만 보던 저한테, 사람을 먼저 보라고 가르쳐주신 분이셨죠."박진철은 옅게 웃었다."내가 언제 그런 거창한 말을 했나. 그냥 잔소리였을 텐데.""아닙니다. 실장님이 하신 말씀들, 지금도 종종 떠올립니다.힘든 협상 앞에서는 항상, 숫자보다 사람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라고 하셨잖아요.그 말씀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회의실 안에는 오랜 세월 함께 쌓아온 신뢰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오후에는 물류 현장 관리자들이 단체로 찾아왔다.사십 년 가까이 박진철과 함께 현장을 뛰어온 이들이었다.거친 손과 볕에 그을린 얼굴들이 회의실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박진철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들은 낡은 사진첩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저희끼리 몰래 모은 겁니다."한 관리자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실장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들, 죄다 모아봤어요. 다들 한 장씩 갖고 있던 걸 긁어모으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박진철은 그 사진첩을 천천히 넘겨보았다.젊은 시절의 자신과, 지금은 은퇴했거나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얼굴이 빼곡히 담겨 있
박진철의 사무실, 오전.사십 년 동안 쌓여온 서류와 짐들이 상자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있었다.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서류철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그 안에 담긴 시간들을 마지막으로 되짚어보는 듯했다.창밖으로 익숙한 사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매일 아침 지나쳤던 복도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이제 이 소리를 듣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아릿하게 만들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이 서류들은 어떻게 할까요, 실장님.""인수인계 목록에 있는 것들은 후임자에게 넘기고, 개인적인 것들만 따로 챙겨주세요."박진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는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물건들을 발견하곤 했다.낡은 만년필, 색이 바랜 명함, 그리고 아주 오래전 정 회장과 함께 찍었던 사진 몇 장.그는 그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젊은 시절의 자신과, 아직 세상의 무게를 다 짊어지기 전이었던 정 회장의 얼굴.그 시절에는, 이렇게 사십 년이 흘러 씁쓸한 이별을 앞두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조심스럽게 그 사진들을 상자 안에 넣었다. 버리지 못할 기억이었다.원망도, 애정도 모두 담긴 그 시절의 조각들이었다."실장님."비서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쉬움이 옅게 스쳐 있었다."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박진철은 옅게 웃었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그의 지친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나야말로, 자네들 덕분에 오래 버틸 수 있었지. 고생 많았네."그는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사십 년 동안 그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던 공간이었다.창가의 화분, 벽에 걸린 낡은 시계, 늘 앉아 있던 그 자리까지, 모든 것이 그의 시선 속에 천천히 담겼다.이제 이 방을 나서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그는 상자를 양손으로 안아 들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문턱을 넘기 직전, 그는 다시 한번 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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