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마디는 또다시 배정우를 자극하고 말았다. 배정우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임슬기의 목을 힘껏 조였다.“임슬기, 다시 말해봐.”임슬기의 얼굴이 시뻘게졌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목구멍에서부터 전해지는 짙은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배정우, 그 손 내려놔!”진승윤은 배정우에게 주먹을 날려 손을 떼어낸 다음 힘없이 쓰러지려는 임슬기를 끌어안았다.“슬기 씨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슬기 씨 지금...”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임슬기가 옷을 잡아당기더니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질문을 던진 후 진승윤은 스스로도 많이 놀란 듯했다.‘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지? 분명 두 사람의 사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었는데...’“사실 변호사님한테 이혼 합의서를 부탁하려고 했었어요.”“지금은요?”진승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고 심지어 임슬기와 배정우가 이혼하기를 바라기도 했다.임슬기가 피식 웃었다.“전에는 이혼할 생각이었어요. 셋이서 힘들게 지낼 바엔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변호사님도 보셨겠지만 정우는 나한테 자유를 줄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고 또 잘 지낼 생각도 없고
배정우가 문을 등진 채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게 느껴졌다.임슬기는 내려달라고 진승윤을 툭툭 친 후 문에 기대어 심호흡했다.“또 뭘 알고 싶은 건데?”두려운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이런 적이 자주 있었나 보네.’배정우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면서 비웃었다.“임슬기, 난 네가 심하게 다쳐서 이젠 얌전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실망하게 하는구나.”임슬기는 진승윤의 팔을 잡고 절뚝거리며 병실 안으로
배정우는 문을 열고 휙 가버렸다.‘임슬기가 곧 죽는다고?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그냥 폐렴일 뿐이잖아. 폐렴인데 죽어? 이젠 열도 내렸고 팔팔하게 뛰어다니면서 승윤이한테까지 꼬리 치는데 죽는다고? 말도 안 돼.’배정우가 씩씩거리면서 병실로 들어갔을 때 임슬기는 안절부절못하며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겁에 질린 얼굴로 배정우를 쳐다보았다.“정우야, 나랑 진 변호사님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설명했다.“허.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이 밤중
배정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임슬기는 두려움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큰일 났어. 정우가 단단히 화난 것 같아.’그녀는 눈을 감고 목을 움츠린 채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배정우는 손을 대지 않았다.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손가락 사이로 살펴보았다. 그녀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놀랍게도 배정우가 병실에 없었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가 먼저 연다인을 괴롭히자 연다인은 거짓말로 임슬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 후
진승윤은 휴대폰을 꺼내 임슬기에게 건넸다.“어젯밤에 휴대폰을 사 왔는데 슬기 씨가 이미 잠들었더라고요.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가져갔어요. 원래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난 건 아닌데 예전 같지 않아서 새로 하나 샀어요. 데이터 다 옮겼으니까 그냥 쓰면 돼요.”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속으로는 선을 넘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자꾸만 임슬기의 눈치를 보았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배정우가 변하고 임현호가 죽은 후로 그녀를 이토록 걱정해준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강압적이지 않은 관심에 그녀는 마음이 편했
임슬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연다인, 또 무슨 짓 하려고? 함부로 하지 마!”휴대폰 너머로 연다인의 우쭐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요즘 집사님을 찾겠다고 경찰에 신고한 거 알아. 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기회 딱 한 번 줄게. 이 기회 놓치면 시신이나 거둘 준비해야 할 거야.”임슬기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하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알았어. 말해봐.”“저녁 7시 서촌에서 만나.”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면서 특별히 강조했다.“꼭 혼자 와야 해. 경찰에 신고하거나 진승윤을 찾아가면 시신
“집사님, 다치셨어요? 내가 부축할게요.”하지만 임슬기도 원래 입었던 중상이 채 낫지 않은 데다가 기력이 없어서 혼자서는 오정태를 부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오정태의 가슴을 꾹 누른 채 조급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집사님,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절대!’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하려 했지만 신호가 없었다. 신호를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오정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가씨, 연다인을 조심해요...”임슬기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알아요. 집사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내가 사람 좀 불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
진승윤도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임슬기를 안심시키듯 말했다.“일단 결과 기다려 보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 다만...”임슬기가 눈을 부릅떴다.“다만 뭐?”“너도 네 몸 상태 알잖아. 그렇게 무리하다가 현정 씨가 깨어나면 더 미안해할걸?”그 말에 임슬기는 고개를 떨구며 낮게 말했다.“나도 알아. 근데 현정이가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다만 연다인 뒤에는 배정우가 있어 혼자서 상대하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임슬기는 문득 진승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승윤아, 너 대성 그룹에서 몇 년이나 법무 맡
“배정우, 너 지금 연다인 감싸는 거야?”임슬기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이 사람이 연다인 편 드는 게 하루이틀인가. 뭘 또 묻고 있나 싶었다.연다인은 배정우 품에 안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정우야, 나 정말 억울해. 어젯밤 내내 너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그 말에 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근데 내가 언제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어젯밤이라고 바로 짚어? 내가 무슨 일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나 보네? 너도 연기하느라 참 힘들겠다.”연다인은 순
도착하자마자 임슬기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문주 씨, 혹시 실검 처리 어떻게 됐어요? 혹시 모르니까 김현정 깼을 때 못 보게 조치 좀 부탁해요.”기사를 막기 위한 정리를 끝낸 후, 임슬기는 연다인의 아파트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연다인이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임슬기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엔 뻔히 보이는 경멸이 가득했다.“임슬기, 네가 여긴 왜 왔어?”“내가 왜 왔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연다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글쎄, 모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