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는 문을 열고 휙 가버렸다.‘임슬기가 곧 죽는다고?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그냥 폐렴일 뿐이잖아. 폐렴인데 죽어? 이젠 열도 내렸고 팔팔하게 뛰어다니면서 승윤이한테까지 꼬리 치는데 죽는다고? 말도 안 돼.’배정우가 씩씩거리면서 병실로 들어갔을 때 임슬기는 안절부절못하며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겁에 질린 얼굴로 배정우를 쳐다보았다.“정우야, 나랑 진 변호사님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설명했다.“허.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이 밤중
배정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임슬기는 두려움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큰일 났어. 정우가 단단히 화난 것 같아.’그녀는 눈을 감고 목을 움츠린 채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배정우는 손을 대지 않았다.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손가락 사이로 살펴보았다. 그녀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놀랍게도 배정우가 병실에 없었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가 먼저 연다인을 괴롭히자 연다인은 거짓말로 임슬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 후
진승윤은 휴대폰을 꺼내 임슬기에게 건넸다.“어젯밤에 휴대폰을 사 왔는데 슬기 씨가 이미 잠들었더라고요.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가져갔어요. 원래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난 건 아닌데 예전 같지 않아서 새로 하나 샀어요. 데이터 다 옮겼으니까 그냥 쓰면 돼요.”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속으로는 선을 넘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자꾸만 임슬기의 눈치를 보았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배정우가 변하고 임현호가 죽은 후로 그녀를 이토록 걱정해준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강압적이지 않은 관심에 그녀는 마음이 편했
임슬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연다인, 또 무슨 짓 하려고? 함부로 하지 마!”휴대폰 너머로 연다인의 우쭐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요즘 집사님을 찾겠다고 경찰에 신고한 거 알아. 네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기회 딱 한 번 줄게. 이 기회 놓치면 시신이나 거둘 준비해야 할 거야.”임슬기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하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알았어. 말해봐.”“저녁 7시 서촌에서 만나.”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면서 특별히 강조했다.“꼭 혼자 와야 해. 경찰에 신고하거나 진승윤을 찾아가면 시신
“집사님, 다치셨어요? 내가 부축할게요.”하지만 임슬기도 원래 입었던 중상이 채 낫지 않은 데다가 기력이 없어서 혼자서는 오정태를 부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오정태의 가슴을 꾹 누른 채 조급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집사님,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절대!’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하려 했지만 신호가 없었다. 신호를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오정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가씨, 연다인을 조심해요...”임슬기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알아요. 집사님,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내가 사람 좀 불
임슬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이틀 뒤였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스친 순간 죽지 않고 또 병원에 왔다는 걸 알아챘다.이젠 그녀의 목숨이 질긴 건지, 아니면 하늘이 그녀를 괴롭히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건 짐이 될 뿐이지 않은가?임슬기의 몸을 닦아주던 간병인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슬기 씨, 정신이 들어요? 제가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임슬기는 간병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저 며칠이나 잤어
그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임슬기에게는 한마디 말로도 그의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었다.사실 그날 밤 그녀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교차로를 두 개 지난 후 갑자기 권민에게 차를 돌리라고 했다. 임슬기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그런데 절반쯤 쫓아가다가 놓쳐버렸고 되돌아가는 택시 기사를 붙잡고 나서야 임슬기가 서촌에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서촌이 어떤 곳인지 배정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권민에게 속도를 내라고 했다.
‘하나같이 나보다 낫다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배정우는 무서운 냉기를 뿜으면서 침대에 있는 여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원래는 좋게 좋게 얘기하려 했지만 임슬기가 자꾸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그래, 임슬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배정우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그때 임슬기가 불쑥 물었다.“배정우, 내가 다른 남자들이랑 잤다고 믿는 거 아니었어? 더럽지 않아?”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상스러운 여자라 욕하고 바람을 피웠다고 믿으면서 또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