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 정우가 나한테도 약속했었어. 나의 오늘이 너의 내일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임슬기!”배정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아직도 다인이를 모함해? 다인이가 사정하지 않았더라면 널 절대 용서하지 않았어.”“정우야, 그러지 마...”그는 연다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다친 데는 좀 나았어?”연다인은 그의 품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 근데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면 더 빨리 나을 거야.”“다인아, 앞으로 슬기 잘 감시해.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게 해선 안 돼.”연
임슬기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연다인은 똑똑히 들었다.‘방에 갇힌 신세에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치는 거야?’“임슬기, 정우가 네 끼니를 나더러 알아서 주라고 했다는 거 잊지 마. 굶어 죽을 작정이야?”임슬기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머리를 이불 속에 파묻었다.밖에 있던 연다인은 임슬기가 아무 말이 없자 더욱 심통이 났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오정태 시신을 내가 어디에 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러게 누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래? 그 늙은이를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렸어. 아마 지금쯤 물고기 밥이 돼서 뼈도 남지 않았을 거
연다인이 차갑게 웃었다.“임슬기, 널 생각해서 밥 먹으라고 한 건데. 네 주제를 알아야지.”“그럼 문 열어. 문을 잠그고 밥 먹으라는 게 날 생각한 거라고? 가식적인 것.”“먹고 싶으면 날 기쁘게 해줘야지. 그럼 개처럼 짖어봐. 마음에 들면 문 열어줄게.”연다인이 흉악스럽게 웃었다.‘아주 제대로 망신당하게 해주겠어.’그런데 들려오는 건 임슬기의 차가운 목소리였다.“개처럼 짖어보라고? 꿈 깨.”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연다인이 문을 두드리며 협박했다.“뻔뻔한 것. 지금 안 먹으면 오늘 아무것도 못 먹을 줄 알아. 재간
연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정우 네가 밖에서 문 잠갔잖아.”그 말에 배정우가 차갑게 쏘아보았다.“밥을 줬다고 하지 않았어? 준 다음에 또 잠갔어?”연다인은 그의 눈빛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슬기를 풀어줬다고 혼낼까 봐 그랬지...”“됐어.”배정우는 그녀의 변명을 듣기 싫은 듯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임슬기, 내가 문 부수고 들어가길 기다리는 거야?”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배정우가 문을 걷어차려던 그때 연다인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그의 품에 쓰
배정우는 임슬기의 방문 앞을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거두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차를 몰고 반도를 나섰다.그는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머릿속에 자꾸만 임슬기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임슬기는 잘 울지 않았다. 심지어 손에 피가 흘러도 얼굴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연다인은 울보였고 늘 억울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귀찮아졌다.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배정우의 곁을 지켜준 사람은 연다인이었고 심지어
이성은 그녀에게 이건 그저 덧없는 꿈일 뿐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배정우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슬기야, 그날 서촌에서 네가 불길 속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갔어. 그때 우리 둘이 함께 거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임슬기는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배정우가 이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서촌이라니... 정말 서촌에서 날 구해준 사람이 승윤 씨가 아니라 정우였단 말이야?’진승윤이 말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게
“흥, 임슬기.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차피 정우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지껄여 봐.”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임슬기를 어떻게 괴롭혀 둘의 이혼을 더 빨리 진행시킬지 생각했다.지난 2년 동안 배정우는 반도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연다인은 그녀가 들어와 살게 되면 배정우와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임슬기를 대하는 배정우의 태도만 더 좋아졌다.완전히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돼버렸다.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에 앉지 못하면 단 하루로 편히 살 수 없었다.부엌으로 들어가던 연다인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
“무슨 일이야?”연다인이 임슬기를 보며 훌쩍거렸다.“슬기가 화를 내면서 내 몸에 국을 쏟았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걱정돼...”휴대폰 너머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연다인은 전화를 끊자마자 약 올리듯 웃으며 말했다.“임슬기, 우리 둘 중에 누가 벌을 받게 될까?”그녀는 절대로 배정우와 임슬기가 다시 만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13년 전의 비밀이든 2년 전의 비밀이든 영원히 이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었다.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다인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