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로라 베넷은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팔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차갑고, 감춰진 집착으로 가득한 부유한 남자 리처드 캘러웨이와 강제로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로라는 자신이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 이선 캘러웨이가 리처드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삶은 악몽으로 변해 버렸다. 같은 저택에서 함께 살아가게 되자 감춰져 있던 비밀과 욕망, 그리고 오래된 상처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조종과 질투, 그리고 모두를 무너뜨릴 스캔들 속에서 오로라는 과거의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점점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남자를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View More제1장
반쯤 열린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오로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학 가방은 거실의 모습을 보는 순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파 옆에는 꽃병이 산산조각 나 있었고, 테이블 서랍은 모두 뒤엉킨 채 열려 있었으며, 가족사진 액자마저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가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다섯 살 난 남동생 조나스의 목을 거구의 남자가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오로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로리!”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엄마 아네타가 조금 전 자신을 거칠게 밀친 남자의 팔을 붙잡은 채 울부짖었다. “어서 도망쳐!” “닥쳐!” 남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오로라는 곧장 동생에게 달려갔지만, 다른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키 크고 덩치 큰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끼어들지 마.” 오로라는 숨을 삼켰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귀가 울릴 정도였다. 아버지를 찾던 그녀는 식탁에 힘없이 앉아 있는 베르탄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아빠...” 오로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일이에요?” 베르탄은 몇 초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빠가... 빚을 졌단다.” 그 한마디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오로라를 멍하게 만들었다. “빚이라고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되물었다. “무슨 빚인데요?” 베르탄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아네타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오로라는 엉망이 된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최근 몇 달 동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늦게 귀가했고, 쉽게 화를 냈으며,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 정도까지 악화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조나스의 목을 조르던 남자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 조나스는 곧바로 심하게 기침을 하며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돈은 어디 있지?” 문신한 남자 하나가 식탁 근처에서 물었다. “우리 보스가 이미 충분히 시간을 줬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베르탄이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반드시 전부 갚겠습니다.” 남자는 비웃듯 웃었다. “약속으로는 이자도 못 갚아.” 오로라가 앞으로 나섰다. “얼마인데요?” 베르탄은 숫자를 말하기 부끄러운 듯 눈을 감았다. “삼백만 달러다.” 오로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작은 집이 갑자기 더욱 좁게 느껴졌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 농담이죠?” “투자를 잘못했어.” 베르탄이 다급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투자요?” 오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지난달에 우리 집이 거의 압류될 뻔했잖아요!” 아네타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도박도 했잖아요... 그렇죠?” 오로라가 낮게 말했다. 베르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순간, 오로라는 모든 답을 알아버렸다. 차가운 한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거구의 남자들조차 곧바로 자세를 바로 세웠다. 오로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롱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조금 전 빚쟁이들의 고함보다 더 무서웠다. 관자놀이에는 희끗한 흰머리가 살짝 섞여 있었고, 날카로운 눈빛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차가웠다. “리처드 캘러웨이 씨...” 오로라의 아버지 베르탄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오로라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 이름을 바로 알아봤다. 뉴욕에서 리처드 캘러웨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유명한 부동산 사업가. 억만장자. 그리고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험한 남자. 리처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멈추자 오로라는 침을 삼켰다. 그 시선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리처드는 엉망이 된 거실을 천천히 둘러본 뒤 베르탄 앞에 멈춰 섰다. “베넷 씨, 난 충분히 기다려 준 것 같은데.” 베르탄은 창백한 얼굴로 급히 일어났다. “리처드 씨... 제발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리처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단 근처에 굳어 서 있는 오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로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불편했다. 마치 무언가를 평가하는 것 같았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베르탄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 집도 팔 수 있습니다...” “이 집으로는 이자도 못 갚아.” 리처드의 낮고 담담한 목소리는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로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용기를 내 앞으로 나섰다. “제발 시간을 주세요.” 리처드는 아무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오로라는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했다.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무슨 돈으로?” 리처드가 차분하게 물었다. 오로라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리처드는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 가족은 거의 1년 동안 빚을 갚지 못했어.” “제가 일하겠습니다.” 오로라가 서둘러 말했다. “조금씩이라도 갚을게요.” 리처드 뒤에 있던 남자 하나가 피식 웃었다. 오로라는 창피함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리처드는 여전히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이름이 오로라 맞지?” 오로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이지?” “스물한 살입니다.” 리처드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작은 미소는 오히려 오로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아네타가 급히 일어나 오로라의 손을 붙잡았다. “이 아이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리처드는 몇 초 동안 아네타를 바라보다 다시 오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 가족의 모든 빚을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베르탄이 희망에 찬 얼굴로 물었다. “무슨 방법입니까?” 리처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숨이 막힐 만큼 오랫동안 오로라만 바라보다가,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로라가 나와 함께 가면 된다.” 오로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베넷 가문의 모든 빚을 없애 주겠다.” 리처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신 그녀는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아네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슨 뜻이죠...?” 리처드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오로라를 바라봤다. “난 당신 딸에게 관심이 있다.” 잠시 말을 멈춘 뒤,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 그 말은 조금 전 유리 깨지는 소리보다도 더 강하게 방 안을 뒤흔들었다. 오로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요...?” 숨이 턱 막혔다. 아네타는 곧장 오로라를 자신의 뒤로 감쌌다. “안 됩니다.” 리처드는 여전히 침착했다. “거절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시오.” “이 아이는 아직 어려요!” 아네타가 울면서 외쳤다. “제 딸을 돈으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베르탄은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 오로라는 리처드 씨를 따라가는 게 맞아.” 아네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우리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베르탄이 소리쳤다. 오로라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니...”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아빠, 농담이죠?” “오로라...” “아빠는 절 팔겠다는 거예요?” “우리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야!” 베르탄의 외침이 작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오로라는 눈물을 머금은 채 평생 믿어 왔던 아버지를 바라봤다. “전 아빠 딸이에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베르탄이 머리를 헝클며 절규했다. “하지만 지금 돈을 갚지 못하면 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끝장낼 거야!” 오로라는 두려움에 울고 있는 어린 동생 조나스를 바라봤다. 아네타는 오로라의 손을 꼭 붙잡고 애원했다. “안 된다고 해... 엄마가 부탁할게.” 하지만 베르탄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로리, 아빠 말 들어. 이 방법밖에 없어.” 오로라는 한참 동안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몇 걸음 떨어져 침착하게 서 있는 리처드에게 옮겼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쓰라림을 삼키며 물었다. “제가 따라가면... 정말 제 가족은 무사한 건가요?” 리처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오로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인생은 완전히 무너졌고, 거부할 기회조차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텅 빈 눈으로 리처드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제129장 (최종장)일 파라디소 로비에 감돌던 위스키 잔향과 팽팽한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색한 정적이 채웠다. 루나—아니, 오로라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붉은 벨벳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애수 어린 그녀의 두 눈은 리처드의 팔에 여전히 올려져 있는 바네사의 손을 직시했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통증과 함께 고집스러운 질투심이 불길처럼 치밀어 올랐다.앞에 선 여자의 몸이 경련하듯 굳어지는 것을 감지한 리처드는 차가우면서도 단호한 동작으로 자신의 팔을 쥐고 있던 바네사의 손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그는 아까부터 자신의 직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던 확신을 확인하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리처드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주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패닉에 빠진 루비가 루나의 손목을 불쑥 낚아챘다."루나, 당장 뒷문으로 나가자! 니콜라스 오빠가 우리를 데리러 보디가드 팀을 보냈을 거야!" 루비는 거의 친구를 소파에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하며 외쳤다.자신의 비밀이 폭로될까 봐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인 오로라는 즉시 몸을 돌려 루비의 이끌림을 따라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끌리는 적포도주색 드레스 자락과 서두르는 발걸음이 얽히면서, 그녀는 미끄러운 로비 복도의 시야를 놓치고 말았다.쿵!뒷골목으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려던 바로 그 순간, 루나의 날씬한 몸이 관리사무실 방향에서 막 걸어 나오던 한 남자의 넓은 가슴에 세게 부딪혔다. 제법 강했던 충격 탓에 오로라는 균형을 잃고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남자의 단단한 두 손이 잽싸게 앞으로 뻗어 나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루나의 가는 허리를 잡아채어 받쳐주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반사 신경 탓에, 루나의 머리 뒤에 매여 있던 가면 끈이 남자의 양복 소매 버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툭.은색 자수가 놓인 상아빛 베네치아 가면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 챙그랑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어스름한 로비
제128장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가 배경 기둥 근처로 구석에 몰린 루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루나의 매끄럽고 땀에 젖은 목덜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광기 어리게 번뜩였다. "이 바보 같은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 좀 볼까, 예쁜이?"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더러운 손가락을 뻗어 루나의 목 피부 표면에 닿으려 했다.루나는 극심한 두려움의 눈물을 참아내며 두 눈을 감았고, 그녀의 몸은 격렬하게 떨렸다.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퍽!묵직하고 거친 주먹 하나가 갑자기 새틴 셔츠를 입은 남자의 턱에 정확히 꽂히며 끔찍한 뼈 소리를 냈다. 취한 남자의 몸은 붕 떠올라 무대 바닥 위로 나뒹굴었고, 몇 개의 술병을 끌고 가 산산조각 내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루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는 억센 체구의 남자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슴을 위아래로 크게 헐떡이고 서 있었다. 리처드 캘러웨이는 여전히 단단히 쥔 주먹을 든 채, 굶주린 짐승처럼 덤벼들던 주변의 남자들을 향해 서슬 푸른 눈빛을 쏘아보고 있었다."누구든 저 아이에게 다시 손을 대는 놈은, 평생 그 손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리처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바리톤 목소리가 치명적인 지배자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번개처럼 울려 퍼지자, 다른 취객들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무대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본 루비는 즉시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요! 잘하셨어요, 기사님!" 루비가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며 외쳤다.한편, 루나라는 신분 뒤에 숨어 있던 오로라는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불과 몇 인치 앞에 있는 리처드의 단단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가슴속을 채웠던 패닉은 이제 다른 종류의 두려움으로 바뀌어 요동쳤다. 한때 자신의 몸을 차지했던 이 중년의 남자에게 자신의 위장이 파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리처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루나에게 다가섰다. 여자가 피할 겨를도
제127장단 하나의 사파이어빛 조명이 천장에서 내리꽂히며 메인 홀의 어둠을 가르고,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루나의 날씬한 실루엣에 꽂혔다. 바이올린 연주곡의 선율이 하프 튕기는 소리와 섞여 천천히 흘러나오며, 신비로우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루나는 베네치아 가면 뒤에서 깊은숨을 내쉬었다.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체형을 감싼 적포도주색 실크 드레스가 유연하게 나부꼈고, 허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밤바람에 놀아나는 한 송이 깃털처럼, 회전하고 튀어 오르는 그녀의 발놀림은 지극히 가벼웠다. 허공을 그리는 길쭉한 손가락의 움직임은 신비로운 무용수의 매혹에 완전히 매료된 수백 쌍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의 시끄러운 수군거림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숨이 막힐 듯한 열정과 감탄이 섞인 시선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하지만 그 마법은 VIP석 맨 앞줄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선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은 무대를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용수의 날렵한 움직임은 서서히 아득해졌고, 그 자리를 뉴욕의 가랑비 속에서 애교 있게 웃던 오로라의 잔상이 채웠다. 빌어먹을, 가슴을 짓누르는 이 답답함은 오히려 가슴을 더욱 강하게 죄어왔다.바로 옆에 앉은 리처드 역시 같은 표정의 일렁임을 내비치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위스키 잔을 세게 쥐고 있었다. 가면을 쓴 무용수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상하기는커녕, 리처드의 눈에는 저택에서 오로라와 보냈던 마지막 밤의 잔상이 투영되고 있었다. 떠나기 전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저택의 온기를 모조리 빼앗아가 버린 그날 밤이. 오로라라는 이름은 두 캘러웨이 남자의 머릿속에서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관객석 뒷줄에서는 니콜라스의 양복 주머니 속에 든 전화기가 강렬하게 진동했다. 27세의 남자는 기기를 꺼내 들었고, 화면에 떠오른 수석 비서의 이름을 확인하
제126장오로라는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가면 뒤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가슴을 막아서는 고통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려 탈의실을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양심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과거의 죄악에 짓눌려, 걸음을 옮기는 매 인치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한때 이선과 나누었던 금지된 관계, 그리고 리처드의 오만함 앞에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야 했던 기억은 그녀가 돌아갈 자격을 박탈하는 두꺼운 벽이 되어버렸다. 소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그 현실이 계속해서 맴돌며, 멀리 떠나 있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되새겨주었다.한편, 여전히 긴장의 잔재가 감도는 로비 구석에서 오드리는 손가락에 쥐어진 손수건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녀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는 이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의 시선을 파괴적인 과거의 소용돌이로부터 돌리려 애썼다."이선 씨,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고요." 오드리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사의 단단한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오늘 밤 메인 홀에서 특별 무용 공연이 있어요. 자, 안으로 들어가서 관람해요. 머릿속의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잊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이선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꽉 다물어진 입술 틈새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오드리. 오늘 밤은 머릿속이 너무 가득 차서 그 어떤 것도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선이 쉴 대로 쉰 헛헛한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머릿속이 가득 차 있으니까 더더욱 비워내셔야죠." 오드리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이선의 눈가에 남아 있던 축축함을 다시 한번 닦아주며 채근했다. "어서요, 적어도 이선 씨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요."이선이 오드리의 청을 따라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순간, 클럽 일 파라디소(Il Paradiso) 로비의 유리문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딸랑거렸다. 정장 차림의 검은색 맞춤 양복을 입은 억센 실루엣이 압도적인 지배의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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