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이라니?'연다인을 안고 있던 배정우의 손이 경직되었다. 그와 임슬기는 알고 지낸 지 4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7년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하, 정말 갈수록 뻔뻔해지네. 17년이라고? 그딴 시간은 대체 어떻게 계산한 거지?”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자꾸만 찬 공기만 들어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그는 잊은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다. 그저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해 하늘이 그와 그녀를 이어준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에야 알게 되
임슬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녀는 그저 자신의 주치의에게만 폐렴이라고 검사 결과를 고쳐달라고만 했다. 그런데 연다인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임슬기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그러니까 누가 병원 사람들을 매수해 제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건가요?”“네, 간호사까지 전부 매수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임슬기 시가 매수한 사람이라고,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문까지 냈더라고요. 그래서 임슬기 씨 남편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그런 거였다니...'임슬기는 픽 웃었다. 연다인
연다인은 임슬기의 앞으로 다가가 길을 막아서며 이 말을 던진 것이다. 임슬기는 그대로 얼어붙게 되었다. 현재 상황에서 연다인이 원한다고 한마디만 한다면 배정우는 바로 사줄 것이 분명했으니까.대성 그룹에 140억이란 아무것도 아닌 돈이었다. 하지만 임씨 가문 저택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었고 그곳엔 부모님과 오정태, 그리고 임종현과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집 안에는 예전에 쓰던 물건도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연다인이 범죄를 저지른 증거도 있었던지라 절대 연다인의 손에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본가 저택을 손에 넣어서 뭐하게?”
다시 진승윤을 떠올렸을 때는 며칠이 지난 후였다. 어차피 진승윤과 별다른 사이도 아니었고 진승윤은 배정우의 친구였으니 떠오르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였기에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진승윤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역시나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들 중 행복한 결말을 맺은 사람은 없었다.진승윤은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괜찮아요. 심각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미안해요.”“정말 괜찮다니까요...”연다인이 비웃으며 끼어들었다.“슬기야, 정우가 자꾸 오해하고
당황한 임슬기를 본 진승윤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매번 슬기 씨를 볼 때마다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인데 변호사로서 어떻게 그냥 보고 지나쳐요. 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구해주려고 했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행여나 임슬기가 오해하고 부담이라도 느낄까 봐 계속 설명했다.“정우도 지금 날 의심하고 있진 하지만 전 정우의 방법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정우는 제 친구니까 정우 대신 슬기 씨를 돌봐주고 있는 거예요.
‘놀이 상대?'‘빌려주겠다고? 내가 자기 거라면서. 평생 자기 여자라고 했으면서 이젠 놀이 상대로 된 거야?'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되어 가슴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정우가 온 건가? 왜 온 거지?'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점점 정우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불편해졌다. 그 순간 머리채 잡힌 그녀는 강제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배정우는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바싹대며 이를 빠득 갈았다.“임슬기, 그새 못 참고 또 남자한테 꼬리 치고 있었던 거야?”“아니야... 난
배정우가 나간 뒤 한참 지나도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물은 말라버려 얼굴에 자국을 남겼고 빛을 잃은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보았다.감방에서 나오긴 했지만 배정우가 언제 다시 감방으로 보낼지는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임씨 가문 저택이 매매로 나왔으니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부모님의 사망 원인도 알아내지 못했고 오정태도 구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인 임종현도 만나지 못했다...그녀는 혀를 꽉 깨물자 바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배를 만졌다. 그녀에겐 죽는 것도 허
“네. 그동안 저 대신 저희 부모님 묘지를 관리해주셔서 감사해요.”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이건 제 자그마한 성의예요.”묘지기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슬기 씨가 얼마나 효녀인지 저도 알고 있거든요.”임슬기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참, 혹시 오늘 CCTV를 돌려볼 수 있을까요?”“왜요? 물건이라도 잃어버렸어요?”“그건 아닌데 엄마 묘비 앞에 꽃이 놓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놓은 건지 보려고요...”그러자 묘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
진승윤도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임슬기를 안심시키듯 말했다.“일단 결과 기다려 보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 다만...”임슬기가 눈을 부릅떴다.“다만 뭐?”“너도 네 몸 상태 알잖아. 그렇게 무리하다가 현정 씨가 깨어나면 더 미안해할걸?”그 말에 임슬기는 고개를 떨구며 낮게 말했다.“나도 알아. 근데 현정이가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다만 연다인 뒤에는 배정우가 있어 혼자서 상대하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임슬기는 문득 진승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승윤아, 너 대성 그룹에서 몇 년이나 법무 맡
“배정우, 너 지금 연다인 감싸는 거야?”임슬기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이 사람이 연다인 편 드는 게 하루이틀인가. 뭘 또 묻고 있나 싶었다.연다인은 배정우 품에 안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정우야, 나 정말 억울해. 어젯밤 내내 너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그 말에 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근데 내가 언제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어젯밤이라고 바로 짚어? 내가 무슨 일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나 보네? 너도 연기하느라 참 힘들겠다.”연다인은 순
도착하자마자 임슬기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문주 씨, 혹시 실검 처리 어떻게 됐어요? 혹시 모르니까 김현정 깼을 때 못 보게 조치 좀 부탁해요.”기사를 막기 위한 정리를 끝낸 후, 임슬기는 연다인의 아파트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연다인이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임슬기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엔 뻔히 보이는 경멸이 가득했다.“임슬기, 네가 여긴 왜 왔어?”“내가 왜 왔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연다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글쎄, 모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