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 씨, 여기 있었네요. 그럼, 아내를 좀 잘 다스려요. 2년 전 같은 스캔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물론 차희라도 배정우가 두렵기는 했지만, 딸을 위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러세요? 2년 전 제 아내가 누명을 썼던 건 모르셨나 보네요?”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승윤이는 내 친구인데, 제 아내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단순히 체면을 위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건지 의아해졌다.순간 임
‘은혜를 갚는다고?’비록 임슬기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김현정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마침, 김현정과 눈이 마주친 임슬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진승윤, 그래서 보내야만 하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명인 시에 머무르면 배정우든, 연다인이든, 김씨 가문이든 김현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김현정은 임슬기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결국 임슬기 대신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만약
“배정우 씨.”갑자기 김서우가 배정우에게 다가와 임슬기의 말을 가로막았다.“정말 다인이를 버리는 거예요? 만나러 갔었는데 애가 완전히 야위어 있었다고요.”배정우는 김서우를 무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임슬기를 추궁했다.“뭐가 없다고?”김서우의 등장에 정신이 번쩍 든 임슬기는 배정우의 질문과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방금 임슬기는 배정우에게 자신도 신장 하나가 없으며, 그것도 연다인과 같은 위치라는 사실을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폐암도 믿지 않는 그가 이를 믿을 리 없었다.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비웃었다.“뇌
배정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떠나려는 찰나 김서우는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배정우 씨, 지금 연다인한테 가는 거예요?”“손 놓으시죠?”배정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서우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뒤따라가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다인이는 배정우 씨한테 진심이었어요.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면 안 되죠.”배정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김서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시죠.”말을 마친 배정우는 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무슨 냄새지? 너무 역겨운데.’임슬기는 역겨운 냄새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납치된 건가? 누가 이런 짓을?’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고통으로 인해 임슬기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기절했다....‘숨 막혀...’임슬기가 갑자기 눈을 뜨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암실에 갇힌 건가?’하지만 손과 발이 모두 장애물에 닿자, 그제야 임슬기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며 땅을 적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빗물이 진흙을 섞어 경사진 곳을 따라 흘러내렸다.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커브를 돌며 진흙물을 튀기고는 언덕 위에 멈춰 섰다.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급히 내려 초조한 얼굴로 비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누런 흙뿐이었다. 게다가 빗물까지 섞여 지면의 모든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다.그때, 조수석에서 한 남성이 내려 우산을 들고 빠르게 다가오며 말했다.“대표님, 범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배정우? 하지만 배정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는데. 그는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인데...’머리가 흐릿한 와중에 임슬기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죽어서 혼이라도 된 건가? 배정우, 내가 죽으면 너는 날 위해 울어 줄까?’...빈 공터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여기 있어요! 찾았어요!”순간 모두가 그곳으로 달려갔다.얼굴이 창백해진 배정우는 급하게 달려가 넘어지듯 땅에 무릎을 꿇고 피로 물든 손으로 빠르게 흙을 파
익숙한 얼굴에 임슬기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하며 물었다.“현정아? 너 왜 여기 있어?”김현정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조절한 뒤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그건 내가 물을 말이에요. 절 버리지 않겠다 약속해놓고 왜 거짓말했어요? 심지어 수면제까지 타서 먹였잖아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절 내쫓아야 했어요?”임슬기가 반박하려 했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혀 창백한 입술만 달싹거렸다.김현정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언니, 전에 제가 왜 계속 언니 옆에 있겠다고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