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단발머리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별이 가득 찬 것처럼 반짝였다.바로 임혜린이다.“입구에서 어떤 여자랑 부딪혔어. 아마 그때 떨어진 지갑인 것 같아.”한이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유강후를 바라봤다.“너도 있었어?”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이준은 갑자기 분노하더니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단번에 주먹을 막아낸 유강후는 옆으로 밀어내며 화를 냈다.“미쳤어?”한이준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퍼부었다.“X발. 넌 인간도 아니다. 내가 미친 사람처럼 찾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그걸 숨겨? 어디에 있는지 알지?”“이제부터 너 같은 친구는 필요 없어. 꺼져.”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잘 사고 있는 사람을 왜 찾아?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얼마나 잘되는지 알아? 유명한 디자이너가 됐어.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가 줄을 섰는데 네가 왜 끼어드냐고.”혹여나 한이준은 충격을 덜 받을까 봐 유강후는 모진 말을 내뱉었다.“넌 곽혜영이랑 같이 있어야지. 첼로 금상이 목표라고 하지 않았나? 얼른 돈으로 싹쓸이해서 곽혜영한테 갖다 줘.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들어야지.”“닥쳐.”한이준은 화가 나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나랑 임혜린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너희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 넌 곽혜영을 좋아해. 당연히 결혼할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일 줄은 몰랐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줄곧 과묵하던 유강후는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쉴 새 없이 말했다.그는 임혜린과 한이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임혜린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지난 2년간 한이준의 행동은 선을 넘었고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임혜린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정작 떠나자 한이준은 후회가 된 듯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임혜린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임혜린은 일찌감치 그 관계를 놓아버렸다. 경원에 있던 집도 팔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도 끊은 채 증발해 버렸다.그제야 조급해진 한
유강후가 말했다.“설무 스튜디오. 알아서 찾아봐.”한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갑을 챙기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한재민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설마 내가 부딪혔던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곽혜영을 좋아한다고 자기 마음까지 속이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가 가장 소중한 걸 놓치게 된 거지.”한재민이 물었다.“곽혜영? 예전에 이준이를 구해줬던 곽씨 가문 아가씨를 말하는 거야?”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곽혜영이 어릴 때 구해줬다고?”“도우미였는지 집사 딸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예전에 이준이랑 같이 납치된 적이 있었어. 그 딸은 중간에 도망쳤고 나중에 곽씨 가문 아가씨가 이준을 발견해서 경찰서에 데리고 간 거야. 그때 이후로 곽씨 가문을 엄청 잘 챙겨줬지. 그 집 아가씨랑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해외로 나가면서 멀어졌을 거야.”“내 추측이 맞다면 임혜린이 집사의 딸이겠네? 참 아이러니하다.”한재민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은하랑 아이들 선물 사러 나왔는데 우연히 널 마주칠 줄은 몰랐네. 가족들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그러나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익숙한 그림자가 그의 뒤에 나타났다.“재민 오빠...”한재민은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 갔다.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돌아섰다.아니나 다를까 나은별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눈앞에 나타났고 청순한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다.순간 한재민은 세 사람이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수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그때의 나은별은 몹시 순수했고 한재민과 유강후 모두 여동생처럼 그녀를 대했다.그렇게 세 사람은 어린 시절의 공통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다만 지금의 나은별은 많이 변했다.나은별은 그와 유강후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두 사람 모두 본인과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다.그때부터 그들이 관계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그 후의 일은 기억나는 게
한재민은 차 옆으로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은별,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들어. 모든 게 달라졌어. 네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거야.”한없이 차가운 한재민을 마주하자 나은별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눈물을 쏟아냈다.“내가 누군지 잊은 거야? 오빠, 나 은별이잖아. 오빠가 좋아하던 은별이라고.”나은별은 그렇게 말하며 한재민을 안으려고 다가갔다.그러자 한재민은 즉시 그녀에게서 거리를 두었다.“네가 나은별인 걸 알아. 우리에 예전에 그런 관계였던 것도 아는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은별을 달려가 한재민을 꽉 껴안았다.“오빠, 기억하고 있었구나. 날 잊은 줄 알았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나은별은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나씨 가문이 예전보다 못하니까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해. 강후 씨랑 이준 씨도 더 이상 나한테 신경 안 써. 모든 사람이 괴롭힌단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오빠가 돌아왔으면 됐어.”“이번 생에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정말 살아있었구나. 오빠,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특히 지난 3년 동안 너무 힘들었어. 강후 씨도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주고 계속 무시만 해. 혼자서 온갖 수모를 힘들게 버티고 있었어.”“오빠가 없으니까 모든 사람이 나한테 차가워진 것 같아. 나씨 가문도 예전만 못하고...”“마음이 엄청 쓸쓸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한재민은 천천히 그녀를 밀어냈다.“은별아,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지난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대학 이후의 일은 기억하는 게 없으니까 네 말에 공감도 못 하겠고.”그는 손을 내밀며 결혼반지를 드러냈다.“물에 빠졌다가 정말 운 좋게 구조됐는데 뇌신경이 심하게 손상되었어. 오랜 재활 끝에 일부 기억을 되찾은 건 맞지만 자세하게 아는 건 없어.”“재활하는 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우린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어.”“내가 기억하는 우리는 단지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사이야.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
“나 책임진다며.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어? 난 오빠를 3년이나 기다렸어. 계속 안 나타나면 평생 기다릴 생각이었다고.”“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정말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어.”“은별아, 임신하게 만든 건 내가 너한테 빚진 게 맞아. 어떻게서든 보상할게.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아니야.”나은별은 울부짖었다.“안돼. 이러면 안 되잖아. 나한테 평생 미안해해야지.”나은별은 대뜸 그의 팔을 잡더니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다.“오빠, 솔직하게 얘기해줘. 그 여자가 오빠를 구한 거야? 맞지?”한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날 구해준 게 맞아.”그러자 나은별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오빠, 이혼해.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이혼하고 나한테 와. 절대 탓하지 않을게.”“단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 여자랑 결혼한 거잖아.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럴 수도 있어. 오빠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잖아.”“그냥 이혼하고 위자료 주면 되잖아. 아이는 내가 키울게. 나는 안 낳아도 돼. 정말 내 자식처럼 키울 자신 있으니까 믿어줘.”“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이혼해. 은혜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잖아. 오빠는 사랑이 아니라 고마운 감정 때문에 결혼했다니까?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한재민의 잘생긴 얼굴에는 짜증이 드러났고 나은별을 밀어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미안해. 그건 안 될 것 같아. 누굴 사랑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이혼 안할거야.”나은별은 오열했다.“아니야. 그게 아니잖아.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이 말했다.“과거에 머무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 내가 잘못한 부분은 반드시 보상할게.”나은별의 머릿속에 수천 가지의 사악한 생각이 스쳤다.‘
“오빠, 변했어. 예전에는 나한테 이러지 않았는데...”한재민은 인내심이 조금씩 닳아가는 걸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 동안 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하는 건데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얌전히 살아. 그러면 남은 인생 안전하게 보낼 거야.”나은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시울을 붉히며 한재민을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야?”한재민은 더 이상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은 듯 차 문을 열더니 그 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냈다.“금액은 네가 원하는 대로 적어. 그때의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내 비서한테 연락해. 그게 아니라면 다시는 연락하지 마.”때마침 유강후와 온다연이 천천히 걸어왔다.나은별은 온다연을 본 순간 마음속에 억눌렀던 악의가 다시 들끓었다.‘이 X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지?’‘너 때문에 유강후가 3년 동안 날 무시했잖아. 돈도 조금씩 주니까 내가 투자를 못 한단 말이야.’미래 그룹의 뒷받침이 없으니 지난 3년 동안 나은별은 무슨 일을 하든 재수가 없었고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하는 일마다 본전을 찾지 못했다.그렇게 나씨 가문의 모든 자산이 바닥을 보였다.설상가상 올해 초 아버지마저 직장에서 해고되어 나씨 가문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게다가 예전에 굽신거리던 사람들도 나은별을 무시하기 시작했다.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매 순간이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버지의 복직을 돕기 위해 유강후의 별장 밖에서 3일 동안 무릎을 꿇었지만 유강후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나은별은 깨달았다. 그녀와 유강후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유강후가 모든 진실을 알았다고 의심도 해봤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온다연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면 지금껏 그녀를 살려뒀을까?비록 지난 3년 동안 유강후를 만나지 못했지만 주기적으로 돈을
충격을 받은 한재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은별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그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죽지 않으니까 그냥 냅둬. 괜히 손 더럽히지 말고.”한재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은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강후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야. 은별이가 됐든 네가 됐든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조금이라도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희망을 준 순간 껌딱지처럼 달라붙는다고. 그걸 떼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더 이상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유강후마저도 속은 적이 있다.함께 자란 옛정과 한재민의 부탁을 생각해서 유강후는 줄곧 나씨 가문에 관대했고 나은별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용서했다.그런데 김원도와 손을 잡고 온다연을 다치게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건 백번 천번 죽어도 싸다.하지만 이대로 죽인다면 나은별에게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천천히 피를 말릴 생각이었다.“형수님이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다며?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은별한테 갈 거야? 형수님이 오해하기를 원해?”유강후는 싸늘했다.“두고 봐. 10분만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데려갈 거야.”이때 나은별은 기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마는 온통 피투성이고 흰 치마에도 핏자국이 많아 매우 안쓰러워 보였다.나은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불쌍한 눈빛으로 한재민을 바라봤고 마치 마지막 연민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그러나 한재민은 유강후에게 꽉 잡혀 있었다.“강후야.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을 보내는 건 괜찮잖아.”유강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경호원에게 손짓했다.“한 대표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한재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야?”유강후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이해 못 하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나은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해?”유강후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죽고 싶다며? 그럼 빨리 죽어.”“동정표를 얻으려고 이제 죽는 쇼까지 하네? 그게 먹힐 것 같아?”“나은별, 경고하는데 한재민을 건드리는 순간 나씨 가문은 영원히 경원에서 사라질 거야.”나은별은 유강후가 그녀에게 이런 독한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또 온다연 그 X이네.’‘뭘 기억하고 뒷담화를 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는 거지.’나은별은 울먹였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독하게 굴어? 난 그냥 나씨 가문을 도와달라고 한 것뿐이잖아. 싫으면 싫다고 해. 이렇게 날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야?”유강후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나은별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나은별은 몸을 떨며 한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뭘 했는데?”살기를 드러낸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더 이상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아참, 그리고 그 더러운 수법을 한재민한테 쓰는 순간 너랑 나씨 가문은 끝장이니까 잘 생각해.”말 섞는 것조차 불쾌했던 유강후는 곧바로 차에 탄 후 기사에게 말했다.“차 한 대 대기시키서 누가 데리러 오는지 영상 찍고 한재민한테 바로 보내.”“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가 떠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소이섭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가 나은별을 부축했다.“괜찮아? 차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저쪽으로 가자.”나은별은 유강후의 차가 떠난 방향을 주시하더니 차갑게 말했다.“온다연이랑 한재민 둘 다 살아있어요. 진짜 예상도 못 했는데...”소이섭은 그녀를 부축해서 차까지 걸어가며 말했다.“온다연이 살아있는 건 이상할 게 없는데 한재민이 살아있을 줄은 나도 몰랐네. 우리가 그 바다에 상어
나은별은 비웃었다.“설마 나이 먹었다고 나 싫어하는 거예요?”나은별은 이미 서른이 되었다. 철저하게 관리한 덕분에 겉모습은 소녀처럼 보이지만 눈꼬리에는 어느새 미세한 주름이 많았다.어느 날 아침 소이섭은 나은별에게서 흰머리를 발견했고 그때부터 눈빛이 돌변했고 나은별은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왜 좋은 남자들은 나한테 눈길조차 안 주고 매번 소이섭 같은 쓰레기만 엮이는 거지?’소이섭같은 바람둥이는 이용하고 버리기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전에는 말이라도 잘 들었는데 이제 슬슬 기어오르는 것 같으니 조만간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소이섭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나이가 들다니. 그런 생각 하지 마. 예전에 네가 학교 다닐 때 모습이랑 닮아있어서 조금 더 챙겨줬을 뿐이야. 추억 회상이랄까? 정말 다른 마음은 없어. 믿어줘.”나은별은 속으로 흐뭇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아무튼 난 싫으니까 처리해요.”그러자 소이섭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다른 부서로 옮길게.”“부서 이동이 아니라 당장 해고하라고요.”“알았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아참,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누군데요?”“너랑 아는 사이라던데? 예전에 강씨 가문에서 3, 4년 정도 집사로 일했다고 얘기하면 기억할 거래.”나은별은 의아해했다.“임청하?”“마침 찾아보려고 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요. 아마 온다연 그X이 돌아오고 나서 쫓겨났을걸요?”소이섭은 구급상자를 꺼내더니 나은별에게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그래? 한번 만나볼래?”“당연히 만나야죠. 알고 있는 게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에요.”강씨 가문 별장.유강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들어갔고 온다연이 씻고 나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막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집사 오진숙이 다가왔다.“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전부 사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지금 바로 차릴까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준비해 주세요. 강후 씨랑 같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