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림은 트림을 하더니 졸려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의사한테 갈 필요는 없고 그냥 침대에 눕혀주세요. 취한 거니까 잠깐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안 돼요. 전에는 250ml 이상 마신 적이 없는데, 오늘 갑자기 400ml를 마셔서 배탈이 났을지도 몰라요.”강우림이 힘없이 눈을 흘겼다.“우유를 몰래 준 걸 아빠한테 들키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달라고 했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가 억지로 줬다고 할 거예요.”이권은 갑자기 속은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강우림이 트림을 하며 말했다.“나는 취해서 30분간 자야겠어요. 그동안 일반 유치원 원복을 사 와요. 귀여운 걸로. 작은 가방도.”이권이 의문스럽게 물었다.“그걸 사서 뭐 하게요? 밖에 있는 일반 유치원에 다니고 싶어요?”강우림은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꼬맹이들이 다니는 그런 유치원에 다니고 싶대요? 일단 나를 침대에 눕히고 얼른 사 와요.”이권은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다시 병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와 아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아빠는 고열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따금 온다연 이름을 불렀고, 아들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그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꼬맹이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도움은커녕 오히려 일만 늘어났다.그가 강우림을 돌려보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꼬맹이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아, 상쾌해.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잤어.”“이제 두 사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줘요. 내가 분석해 볼게요.”이권은 어쩔 수 없이 최근 발생한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주었다.꼬맹이는 다 듣고 나서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방법이 떠올랐어요. 권예진이라는 사람이 지금 엄마랑 같이 병원에 있어요?”“네, 작은 도련님.”“그 여자가 가장 어리숙해 보이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사 온 원복을 입혀줘요.”이권은 곧바로 사 온 원복을 꼬맹이
이 말을 들은 권예진은 안쓰러워하며 말했다.“엄마가 너무하네. 싸웠다고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지. 지금 어디 있어? 이 건물 안이야? 내가 데려다줄게.”꼬맹이가 말했다.“안 돼요. 엄마는 지금 너무 화가 나 있어서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예요.”권예진은 마음이 아픈 듯 꼬맹이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그럴 리 없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없거든. 나랑 같이 찾으러 가자. 몇 층에 있어?”꼬맹이가 고개를 저었다.“사실 엄마는 몇 년 전에 집을 나갔다가 최근에야 돌아왔어요. 저는 아빠에게 사랑 못 받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예요.”꼬맹이는 눈을 가리고 우는 척했다.“제가 못생겨서 그런 걸까요? 아빠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저를 챙기지 않고 매일 먹는 분유량까지 제한해요. 엄마도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가서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고, 얼마 전에 돌아와서는 다른 아저씨를 시중들고 있어요. 엄마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이 말을 들은 권예진은 속으로 쓰레기 부부를 욕했지만 입으로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아니야. 너는 내가 본 아이 중에 가장 예쁘게 생겼어. 엄마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그녀가 거의 올가미에 걸린 것을 확인한 꼬맹이는 일어나 가방을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혹시 엄마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밖에 나가서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권예진이 그를 잡으려고 할 때, 온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진 씨, 밖에 누가 왔어요?”권예진이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온다연이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어떤 아이가 부모한테 버림받고 여기서 울고 있네요. 너무 불쌍해요.”이 말을 들은 온다연이 고개를 들었다.“아이라니요? 여기 온통 경호원인데, 아이가 어떻게 들어왔죠?”“모르겠어요. 길을 잃었나 봐요.”“그런데 정말 불쌍해요. 아빠는 병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이고, 엄마는 애를 버리고 가 버렸대요.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데, 지금 정문 계단에 앉아
꼬맹이는 입을 씰룩거리며 온다연의 다리를 끌어안더니 맑고 깨끗하면서도 서러운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권예진은 멍해졌다.“진, 진유나 씨, 이 아이가 그쪽 아들이에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맞아요, 제 아들.”권예진은 입을 딱 벌렸다.“언제 아들을 가졌던 거예요?”온다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말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얘기해줄게요.”권예진은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꼬맹이를 다시 한 번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얘가 그쪽과 유 대표님의 아들이라고요?”그녀가 이런 질문을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이 꼬맹이는 온다연과 유강후를 닮지 않았지만 보통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지 않은 뛰어난 외모를 가졌다.게다가 이 꼬맹이한테서 풍기는 약간 건방진 느낌은 유강후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온다연은 꼬맹이를 내려다보았다.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간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꼬맹이를 보고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아들이 맞아요. 네 살 됐어요.”권예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이 아이가 말한 무책임한 부모가 두 분이에요?”온다연은 난감하게 웃으며 쪼그려 앉아 소매로 얼룩진 꼬맹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너 왜 여기 혼자 있어? 너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은?”요 며칠 유강후한테 화가 나 있어 확실히 꼬맹이를 신경 쓰지 못했다.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몇 달 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꼬맹이를 진심으로 아꼈다.그녀는 갓난아기 때 말랑말랑했던 꼬맹이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꼬맹이는 설움이 북받쳐 눈시울을 붉히며 온다연의 팔을 잡았다.“아빠가 병으로 곧 죽을 것 같아요. 모두가 울고 있길래 몰래 도망쳐 나왔어요.”온다연이 잠시 멍해졌다.“아빠가 죽을 것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꼬맹이는 온다연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는 온다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의사
이권이 울고 있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다연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작은 사모님, 저 눈이 좀...”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다연이 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이권이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눈이 불편해서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문에 들어서자, 유강후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고, 침대 머리에는 수액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혼수 상태였고, 고열 때문에 입술이 갈라 터진 것이 보였다.“강후 씨...”그녀는 울먹이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강후 씨, 일어나요...”위독한 상태라고 건너짚은 그녀는 손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자 그 생각을 더 확신했다.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 모서리를 잡고서야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이때 아이가 권예진과 함께 병실에 들어서더니 울음보를 터뜨렸다.“엄마, 아빠가 위독한 거 맞죠? 계속 엄마 이름만 부르는데, 엄마는 오히려 다른 아저씨를 보살피고 여길 이제야 오셨어요.”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엄마, 진짜 저를 버린 거예요?”꼬맹이는 진심으로 울었고, 실제로 눈물을 흘렸다.아직 자기가 유강후의 양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온다연이 친모라고 굳게 믿는 그는 모성애에 대한 갈망이 극에 달했다.게다가 지난 몇 년간 유강후와 함께한 시간도 적었던 터라 조숙하고 IQ가 높은 아이는 엄마의 품을 수백 번 환상했었고, 온다연의 사진을 수천 번 들여다보았다.그러니 그날 배에서 온다연을 한눈에 알아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엄마,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제가 생각나지 않으셨어요? 이번에도 아빠를 외면하시는데, 또 저를 버리실 건가요?”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더욱 아이한테 미안해졌다.혈연관계는 없지만, 이 아이는 확실히 그녀의 아들이고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그녀는 돌아서서 아이를 안아 침대에 앉히고 나
온다연은 아이를 안아 다시 침대에 눕힌 후, 붉어진 눈시울로 아직 작은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방울들을 닦아주며 말했다.“정말이야. 맹세할게.”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며 말했다.“그럼 맹세 제대로 해요. 앞으로는 저 안 떠날 거라고. 아무리 바빠도 제가 보고 싶다고 하면 바로 달려와서 같이 있어 준다고 해요.”온다연이 아이에게 맹세했다.“그래, 맹세할게. 앞으로는 우림이 옆에 많이 있어 줄게. 예전이랑은 다를 거야.”강우림은 온다연의 말에 배시시 웃더니 그녀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엄마, 엄마가 없을 때 아빠가 절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세요? 우유도 안 주고. 그래서 키가 갑자기 안 큰 거라고요.”아이의 말에 온다연의 시선이 유강후에게로 옮겨졌다. 벌써 눈을 뜬 그는 힘없는 눈길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유강후는 마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온다연을 보며 중얼거렸다.“다연아, 정말 너야?”눈을 뜬 유강후를 보던 온다연은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심각해요?”그때, 타이밍 좋게 돌아온 이권이 온다연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도련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폐렴 때문에 열이 펄펄 끓고 있어서.”온다연은 속상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몸을 돌린 그녀가 낮게 말했다.“폐렴이면 뭐, 죽을병도 아니니까 먼저 갈게요.”온다연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던 유강후는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빼고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유강후는 느껴지는 어지럼증에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걸음이 빨랐던 온다연은 어느새 유강후와 한참 멀어져 있었다.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쫓은 끝에 유강후는 모퉁이 쪽에 다다라서야 온다연을 잡을 수 있었다.유강후에게 옷자락을 잡힌 탓에 온다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이거 놔요!”온다연은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
경악 속에 빠져있던 권예진이 다급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괜찮아요. 한 가족이신데 같이 시간 보내셔야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이는 다시 온다연의 손을 잡고 병실로 돌아왔다.이권을 발견한 강우림은 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저 우유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책도 사다주세요. 유치한 동화책 말고 좀 유식한 책으로요.”그 말에 이권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아까 네 병이나...”뒤따라 들어오는 유강후를 발견하자마자 이권은 곧바로 대답을 바꾸었다.“알겠어, 알겠어. 지금 사 올게.”이권이 병실을 나서자 온다연의 무릎 위에 앉은 강우림이 안아달라고 칭얼거렸다.유강후는 강우림은 곧바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안돼, 엄마는 너 못 안아줘.”그러자 아이가 소리쳤다.“왜요?”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강우림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배 위에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엄마 배 속에 아기가 있어서 당분간은 우리 우림이를 안아줄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림이가 의젓하게 기다려줘야 해. 아기가 태어나면 매일 안아줄게.”강우림은 눈을 크게 뜬 채 한참이나 온다연의 아랫배를 바라보았다.“정말 엄마 배 속에 아기가 있어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정말이지.”그 말에 입술을 삐죽이던 강우림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럼 엄마는 이제 아기만 좋아해 주고, 저는 버릴 거예요?”온다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아니야. 다 내 자식인데, 어떻게 한 명만 예뻐해?”온다연의 대답에 강우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아이는 고개를 들어 유강후의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갈 엄두는 나지 않아 강우림은 그저 입술만 삐죽이고 있었다.“엄마, 저 음료수 마시고 싶어요. 권이 아저씨한테 사 오라고 해주세요.”온다연은 어딘가 의아했지만 여전히 아이의
아이는 이미 유강후를 다루는 법을 완전히 익힌 듯 온다연의 다리를 꼭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엄마, 저는 우유 계속 먹고 싶어요. 아빠가 멋대로 끊은 거잖아요. 저 키도 안 크는데, 이대로 가면 영양부족으로 머리까지 멍청해질 거예요.”온다연은 아이를 품에 안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착하지, 우림이. 아빠 말 듣지 말자. 우유 조금 더 오래 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조금 더 크면 끊는 거야. 어때?”강우림은 온다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어린아이의 장단에 놀아난 유강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온다연의 앞이라 참아야만 했다.“알겠어. 엄마 말대로 해야지.”온다연은 강우림은 침대에 앉히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강우림을 의자에 앉힌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레 부축해주며 말했다.“쟤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몸무게는 꽤 나갈 거야. 홑몸도 아닌데 무슨 애를 안는다고 그래.”그 말에 표정을 굳힌 온다연은 당장이라도 떨어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곁에 아이를 두고 그런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강우림은 불만 섞인 얼굴을 하더니 시샘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아기 생겼다고 제 우유 끊으려는 거죠? 쪼잔해요!”아이는 작은 주먹을 꽉 쥐더니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앞으로는 우윳값 제가 다 낼게요! 그러니까 제 입으로 들어가는 거 아까워하지 마세요!”어렵게 온다연과 시간을 보낼 기회를 얻게 된 유강후는 시끄럽게 구는 강우림이 너무 거슬렸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참았다.하지만 아이는 그런 유강후의 마음도 모르는지 계속 유강후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너 한마디만 더 하면 당장 내쫓아버릴 거야.”그러자 온다연이 유강후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렇게 거슬리면 아저씨가 나가면 되잖아요.”그러자 유강후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머리가 너무
예전이었다면 분명 사람이라도 시켜서 강제로 곁에 두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온다연의 원망 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느껴지는 고통이 전보다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유강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저 온다연이 살아만 있어 준다면, 얼굴이라도 한 번씩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는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아이는 온다연이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온다연이 강우림의 손에서 우유병을 빼내려던 그때, 아이가 몸을 돌려 온다연의 팔을 끌어안으며 갓난아기처럼 중얼거렸다.“엄마...”그 말에 온다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더니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다.그녀는 이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었다.떠나려고 마음먹을 때부터 강우림을 데리고 떠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림이 양준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그녀는 강우림을 데리고 떠나려던 생각을 접었다.강우림에게도 그 아이만의 삶이 있을 것이고, 이곳에 두고 가기만 한다면 양씨 가문의 막대한 자산을 물려받을 터였다.온다연은 강우림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아이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던 때, 온다연은 정말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강우림은 온다연이 마음으로 낳은 친자식이었다. 여느 모자들 같은 끈끈한 유대감도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온다연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부드럽게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강우림이 깊은 잠에 빠진 후에야 온다연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온다연이 떠날 기미가 보이자 유강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다연아, 요즘 제대로 못 먹고 다닌다며? 셰프한테 네가 좋아하는 음식 준비해두라고 했는데, 먹고 갈래?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온다연은 그런 유강후를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려 했지만 배 속에서는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온다연은 배가 고팠다.이틀 동안 입덧이 더 심해진 탓에 온다연은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조금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