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고로 부모를 잃고 1년간 코마 상태에 빠졌던 윤건우. 눈을 떴을 때, 연인이었던 강하나는 형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형 윤신우가 살해된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강하나는 피 묻은 집에서 건우를 찾아왔다. “신우 씨가… 죽었어.” 경찰은 강도 살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깨진 창문, 11분의 공백,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밤의 강하나. “내가 네 형을 죽였다면, 그래도 이 여자 사랑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건 강하나가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인격. 강서하. 사랑과 죄, 그리고 선택. 살아남은 자는 과연 누구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View More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형사는 그 답을 기록하지 않고, 먼저 건우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고,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넓은 답이었다. 건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좁히지 않고, 열어두기 위해서.형사는 잠깐 침묵한 뒤, 캡처 사진을 한 장 더 앞으로 밀었다.“그럼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사진 속에는 더 가까운 각도로 잡힌 실루엣이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작고 어두운 물체. 우산은 아니었다.건우는 그 물체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 차가운 감각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칼.그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형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놓치지 않고.“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건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직은 없습니다.”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이라고 붙인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한 부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손을 얹은 채,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부터 같이 찾아보죠. 윤신우 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집 안에 들였는지.”그 말이 끝났을 때, 건우는 처음으로 이 사건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바깥에서 들어온 그림자, 하나가 스친 기억, 서하가 끝까지 알고 있는 밤, 그리고 자신이 외면했던 선택이 이제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표 위에 놓이려 하고 있었다.그 시간표가 완성되면, 누가 가장 먼저 무너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진술실 안의 공기는 현장보다 훨씬 건조했지만, 건우는 오히려 그 건조함이 더 숨 막히게 느껴졌다. 신우의 집에서는 비 냄새와 피 냄새, 젖은 바닥의 감각이 모든 것을 덮고 있어서 생각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이곳에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놓인 사진
하나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이해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잠시 뒤 형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있었고, 수첩은 품 안에 넣어 젖지 않게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조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두 분 모두 경찰서로 이동해주셔야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확인하기 어렵고, 시간대 정리가 필요합니다.”건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를 한 번 보았다. 하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건우가 대신 말했다.형사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하나에게도 시선을 옮겼다.“괜찮으시겠습니까.”하나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 잠깐 멈췄고, 곧 더 작고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지는 않은데, 갈 수는 있어요.”그 대답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꾸민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사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차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 동안, 건우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우의 집은 여전히 불빛을 품고 있었고, 그 불빛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조금 전까지 자기 안에서 열렸던 그 밤의 장면은 다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경찰서로 향하는 현실의 시간이 더 강하게 앞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차 안은 좁고 차가웠다. 하나는 뒷좌석 한쪽에 앉았고, 건우는 그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손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그 간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멀게 느껴졌다. 경찰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빗줄기가 길게 번졌고, 골목의 불빛들이 뒤로 밀려났다.하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 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눈. 그 눈을 보면서 건우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하나는 전부를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관리실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처음보다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빗줄기 자체가 줄어서라기보다 눈이 그 리듬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건우는 현관 처마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섰고, 방금 모니터 안에서 지나갔던 흐릿한 실루엣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성별도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존재 하나만으로 사건의 방향은 바뀌었다.형사는 그 실루엣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리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형사에게 영상 확보를 지시했고, 입구와 엘리베이터, 건물 뒤편까지 연결되는 모든 화면을 따로 빼두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 전까지보다 분명한 집중이 들어 있었다. 그건 건우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루엣이 생긴다는 건 외부 용의자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표가 더 촘촘해진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하나는 현관 옆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는지, 젖은 어깨 위에 얇은 담요 같은 것이 걸쳐져 있었지만, 그 담요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워 보였고, 얼굴은 비와 눈물의 경계가 섞인 채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녀 쪽으로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관리실에서 확인한 장면을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짐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읽어야 했다.하나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봤어?”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일부러 낮춘 건 아니었다. 힘이 빠져 그런 것에 가까웠다.건우는 그녀 앞까지 걸어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노란 테이프와 빗물, 그리고 조금 전 모니터 속에서 생긴 새로운 시간이 함께 놓여 있었다.“누가 있었어.”그가 말했다.“네가 오기 전에, 건물 주변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 더 잡혔어.”하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관리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젊은 형사가 모니터를 가까이 들여다보듯 몸을 숙였고, 경비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건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었다. 사건이 이제부터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예감, 그리고 그 복잡함이 자기에게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아주 냉정하고 불편한 계산이 동시에 올라오고 있었다.“이 사람은 누굽니까.”형사가 경비원에게 물었다.경비원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입주민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됩니다.”형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 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건우는 그 순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했다. 지금 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 사이의 균형이 중요했다.“형이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네요.”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선을 모니터에 둔 채로, 생각이 입으로 흘러나온 것처럼 들리게.“문을 강제로 연 흔적이 없다는 쪽이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낯익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형사는 그 말을 듣고 건우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 가능성도 포함해서 보겠습니다.”동의였다. 적어도 지금은.건우는 더 보태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 지금 필요한 건 ‘가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스스로 그 방향으로 걸어가도록 길만 열어두는 것이었다.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나가고,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건우와 하나가 함께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장면까지 화면에 잡혔다. 그 모든 장면이 순서대로 놓이자,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어둠이 가득한 방, 건우는 숫자를 다시 적었다.9:129:189:37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을 덧붙였다.‘왜.’-형은 왜 전화했는가.-위험을 알리기 위해?-아니면 누군가의 도착을 확인하기 위해?그는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형이 전화한 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면.그 생각은 섬뜩했다.만약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다면.9시 18분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건우는 펜을 내려놓았다.기억은
비는 오지 않았는데도, 저녁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창문을 열어두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숫자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9:129:189:37그 아래, 어젯밤 그가 덧붙인 한 줄.‘조용했다.’그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보았다.조용했다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움직이지 않았다면,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그 생각이 목을 죄었다.하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건우는 문득 물었다.“그날… 진동 느
밤은 쉽게 오지 않았다.건우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불을 켜지도 끄지도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하나의 말. 나가려는 목소리였다.유림의 말. 두 문장이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다.형이 나가려 했다면, 문은 열렸어야 한다.문이 잠겨 있었다면, 형은 나가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혹시 문을 잠근 사람이, 형이 아닐 수도 있다면. 그 생각은 곧바로 밀어냈다.너무 빨랐다. 너무 직접적이었다.아침, 하나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부엌에서 접시를 정리하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았고, 창문은 닫힌 채였다.건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지 못했다.9시 12분.9시 18분.6분.그 짧은 시간이 자꾸 마음을 긁었다.집에 들어서자, 현관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빛이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하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그대로 거실에 섰다.“유림 씨 말, 어떻게 들렸어?”그녀가 먼저 물었다.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근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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