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사고로 부모를 잃고 1년간 코마 상태에 빠졌던 윤건우. 눈을 떴을 때, 연인이었던 강하나는 형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형 윤신우가 살해된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강하나는 피 묻은 집에서 건우를 찾아왔다. “신우 씨가… 죽었어.” 경찰은 강도 살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깨진 창문, 11분의 공백,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밤의 강하나. “내가 네 형을 죽였다면, 그래도 이 여자 사랑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건 강하나가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인격. 강서하. 사랑과 죄, 그리고 선택. 살아남은 자는 과연 누구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Ver mais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밤이 지나도, 숨이 정리되지 않았다.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의 장면이 반복됐다.닿을 듯 말 듯한 거리. 같은 얼굴, 다른 눈. 그리고 마지막에 겹쳐진 목소리.“나… 무서워.”그건 분명 하나의 목소리였다.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의 웃음이 겹쳐졌다.건우는 이마를 짚었다.자신이 붙잡고 있는 건 누구인가.자신이 붙잡히고 있는 건 또 누구인가.아침이 왔다.하나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부엌에서 접시가 닿는 소리가 났다.건우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하나는 평소보다 더 단정한 차림이었다.머리를 묶고,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다.눈 밑이 조금 부어 있었다.“일어났어.”그녀가 먼저 말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다.식탁에 마주 앉았지만, 시선은 오래 닿지 않았다.하나는 물컵을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어제.”그 한 단어에 건우의 심장이 잠깐 멈췄다.“나… 또 이상했어?”그 질문은 두려움이었다.확인을 원하는 게 아니라, 부정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건우는 잠시 생각했다.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면, 하나는 조금은 안심할 것이다.그런데.“어제는.”건우는 천천히 말했다.“네가 아니었어.”하나의 손이 멈췄다.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기억은.”“없어.”그녀가 먼저 말했다.“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어.”하나는 웃으려 했지만, 웃지 못했다.“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던 느낌만 남아 있었어.”건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나.”하나가 낮게 말했다.“점점 네 앞에 서는 게 무서워.”그 말이 날카롭게 와닿았다.“왜.”“네가 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떠올릴까 봐.”건우의 숨이 흔들렸다.하나는 더는 피하지 않았다.“그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아도, 네가 느끼는 감정이 전부 나한테 향한 게 아닐까 봐.”그녀의 말은 정확했다.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침이 왔는데도 밤은 다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창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희미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어젯밤의 말들이 지워지지 않았다.“서하.”자신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냈던 순간.그건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그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었다.변명할 여지를 하나 지워버리는 일이었다.건우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실로 나왔을 때, 부엌 쪽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하나였다.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뒷모습이 낯설 만큼 조용해 보였다.밤에 본 얼굴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건우는 문득 이상한 죄책감에 휩싸였다.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한 것처럼.“일어났어?”하나가 먼저 돌아봤다.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조금 낮고, 조금 조심스러운.“응.”건우는 짧게 답했다.하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어제… 늦게까지 안 잤지.”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좀.”하나는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나… 요즘 이상해.”그 말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건우는 시선을 들었다.“어떻게?”하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듯 섰다.“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모르는 감정이 남아 있어.”건우의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어제도.”하나는 천천히 말했다.“일어나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어.”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좋은 꿈을 꿨던 것도 아닌데.”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감정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자신은 알고 있었다.하나는 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나… 혹시 너한테 실수한 적 있어?”그 질문은 불안에서 나왔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없어.”거짓말은 아니었다.최소한,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하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건우는 시선을 피했다.“근데.”하나가 말을 이었다.“네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다.하나는 설거지를 하고, 건우는 싱크대 옆에 서서 물 한 모금을 마셨다.다정함은 없었고, 적대감도 없었다.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닿으면 깨질 것 같은 투명한 거리만 있었다.“나 먼저 들어갈게.”하나가 말했다.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하나가 방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건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 집은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야만 했을까.그는 거실 불을 끄지 못했다.불을 끄면 어둠이 오고, 어둠이 오면그 이름이, 그 발소리가, 그 눈빛이 따라올 것 같았다.그런데도.건우는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는, 이상하게도 언제나 가장 정직한 몸짓으로 드러났다.건우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겼다.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문 쪽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들렸다.노크는 없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도 과장되지 않았다.대신, 집 안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같은 얼굴이 들어왔는데, 눈빛이 달랐다.서하였다.그녀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다.화장이 짙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노골적이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더 위험해 보였다.마치 ‘유혹’이 아니라 ‘확인’을 하러 온 사람처럼.서하는 거실 불빛을 한 번 쓸어보듯 바라보다가, 건우를 보았다.“불 켜놨네.”그 말투는 낮의 하나와 달리 말끝이 단정했다.감정을 숨기려는 게 아니라,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굳이 흔들지 않는 목소리였다.건우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조용하네.”서하는 천천히 걸어와 소파 끝에 앉지 않았다.그녀는 건우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어젯밤처럼 숨이 닿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몸이 서로의 온도를 느낄 만큼은 가까웠다.“조용하면 안 돼?”“너는 보통 그렇게 안 들어오잖아.”서하의 입꼬리가 아주 얕게 올라갔다.“넌 내가 들어오는 방식을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척하지.”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
그날 밤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 건우는 스스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불을 끄지 않았다.서류도 펼쳐두지 않았다.그저 소파에 앉아 있었다.기다린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그래서 스스로에게 변명했다.잠이 안 와서, 그냥.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이번엔 놀라지 않았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하나의 얼굴. 그러나 시선이 달랐다.서하였다.오늘은 일부러인 듯 화장이 짙었다.머리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얇은 셔츠 단추 하나가 더 풀려 있었다.계획적이었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건우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서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기다렸어?”그녀가 묻는 방식은 가볍지 않았다.확인에 가까웠다.건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거짓말.”그녀가 웃었다.“불 안 끄고 앉아 있잖아.”그 말이 정확해서 건우는 반박하지 못했다.서하는 소파 등받이를 돌아 건우의 바로 앞에 섰다.거리는 일부러 좁혀졌다.“오늘은 도망 안 가?”그녀가 낮게 물었다.“도망친 적 없어.”“그래?”서하의 손이 소파 팔걸이를 짚었다.건우의 어깨와 거의 닿을 거리였다.“그럼 왜 어제는 고개를 돌렸어.”그 말이 바로 들어왔다.건우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넘으면 안 되는 선이었으니까.”“선.”서하가 고개를 기울였다.“그 선이 누구 거야.”건우는 말하지 않았다.“형?”그녀가 먼저 던졌다.“아니면… 하나?”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건우의 시선이 흔들렸다.서하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믿는 게 아니라”“아니.”그녀가 말을 잘랐다.“확신 못 하잖아.”정확했다.그 말이 정확해서, 건우는 화를 낼 수 없었다.서하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건우와 눈높이를 맞췄다.“난 솔직해.”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지금 이 순간, 난 너한테 끌려.”건우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그건…”말이 이어지지 않았다.“하나가 아니야.”서하가 덧붙였다.“난 걔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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