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고로 부모를 잃고 1년간 코마 상태에 빠졌던 윤건우. 눈을 떴을 때, 연인이었던 강하나는 형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형 윤신우가 살해된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강하나는 피 묻은 집에서 건우를 찾아왔다. “신우 씨가… 죽었어.” 경찰은 강도 살인이라 말한다. 그러나 깨진 창문, 11분의 공백,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밤의 강하나. “내가 네 형을 죽였다면, 그래도 이 여자 사랑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건 강하나가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인격. 강서하. 사랑과 죄, 그리고 선택. 살아남은 자는 과연 누구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View More그날, 건우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몸은 멀쩡했다.
다만,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게 진짜가 될 것 같아서.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은 살아 있고, 더이상 그의 부모는 없다.-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1년.건우는 병실 침대 위에서 1년을 보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장례도, 화장도. 향 냄새를 맡을 겨를도 없었고,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없었다. 울지도 못했다.그건 애초에 건우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겪지 못한 채로 돌아온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그는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눈을 감으면 보였다.
부모님 얼굴이 비에 젖은 도로 위, 찌그러진 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왜 너만 살아 있냐고.
-우리는 왜 죽어야 했냐고.그 질문이 밤마다 가슴을 파고들었다.
건우는 그걸 밀어낼 힘이 없었다. 힘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으니까.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건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벨 소리가 집 안을 채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울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람은 늘 가장 늦게 도착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젖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도련님… 도련님…”
건우의 눈꺼풀이 떨렸다.
그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윤건우… 윤건우…”
강하나.
윤신우의 아내.
이제는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 그리고, 윤건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1년 전엔 그들이 함께 미래를 그렸다.
결혼을 생각했고,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웃는 소리 하나도 아까웠다. 모든 순간이. 그런데 1년 만에 눈을 떴을 때, 하나는 이미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형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고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은 혼자 회사를 떠안게 되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동생을 대신해서 모든 걸 감당했다고 했다.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있었다.
형의 아내로.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받아들이는 건 달랐다. 몸 어딘가가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기분. 설명은 가능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우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관까지 가는 게 이렇게 먼 일인 줄 몰랐다.손잡이를 잡는 순간,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을 여는 일조차 의식처럼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한 발 내딛는 의식.문을 열었다. 비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하나가 우산도 없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물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건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알아버릴 것 같아 숨이 막혔다.“하… 나… 아니, 형수님…”
목소리가 떨렸다.
자기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하나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을 삼키는 게 보였다. 몇 번이고. 비는 그녀의 어깨를 때리며 흘러내렸고, 그 물기마저 그녀를 더 작게 보이게 만들었다.“…건우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형수님이 아니라, 예전처럼.건우의 가슴이 반응했다.
그 반응이 더 참담했다.“어떡해.”
숨이 가빴다.
“신우 씨가… 신우 씨가…”
눈이 흔들렸다.
마치 한 단어만 더 말하면 모든 게 무너질 것처럼.“죽었어.”
순간,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이 잠깐 꺼진 듯했다.건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말의 의미가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어는 들렸는데, 문장이 되지 않았다.“네?”
천천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누가 죽어요?”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젓는 건지 무너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집이 엉망이었어.”
“창문이 깨져 있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어.”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신우 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배에 칼이…”
말이 끊겼다.
그 다음을 말하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끝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될 것 같아서.건우의 머릿속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침대 옆에 서 있던 그 얼굴. 말없이 물을 건네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주던 사람.이제 가족은 형밖에 없었다.
그 형이. 오늘 밤, 죽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자연스럽게 계속 돌아가고, 그 자연스러움이 건우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하나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턱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이 가져온 소식이 완전히 현실이 될까 봐.그녀의 눈빛이 집 안을 훑었다.
젖은 현관 매트, 어둑한 거실, 닫힌 방문들. 그리고 다시 건우에게로 돌아왔다.그 눈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미 확인한 사람의 눈빛.건우는 그게 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그날 밤, 그 집에서 죽은 건 윤신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도 함께,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졌다. 신우의 집 앞에는 이미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져 있었다.건우는 그 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이 아니라,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해야 할 현관이 낯설게 보였다.“가족분이십니까?”
젊은 형사가 다가왔다.
건우는 고개만 끄덕였다.“안쪽은 현장 보존 중입니다. 여기서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건우는 통제선 안쪽을 바라봤다.
거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흩어진 물건들이 보였고, 소파가 밀려 있었다. 창문 하나가 깨져 있었는데, 파손된 유리 대부분이 실내 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거실 중앙.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천 아래의 윤곽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건우의 목이 마른 듯 굳었다.형은 저 아래에 있다.
그러나 그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고작 얇은 테이프 한 줄이었지만, 그건 건너갈 수 없는 경계였다.비가 세게 내리면서 깨진 창문 틈으로 빗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현장 요원이 플라스틱 시트로 급히 막고 있었다.“사망 추정 시각은 9시 전후입니다.”
형사의 말이 들렸다.“침입 흔적은 확인됐습니다. 강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강도.
그 단어가 건우의 귓속에서 헛돌았다.
형이 강도에게 찔렸다고.그는 다시 거실을 바라봤다.
피는 이미 어둡게 말라가고 있었다.
비 냄새와 섞여 묘하게 눅진한 공기가 느껴졌다.하나는 현관 안쪽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옆에서 진술을 받고 있었다.“귀가 시간은 정확히 언제입니까?”
“9시 반 조금 넘어서요.”목소리가 낮고 고르다. 울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남편분과 최근에 다툰 일은요?”
잠시 침묵.
“없었습니다.”
짧고 단정했다.
건우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도,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자꾸 거실 중앙으로 향했다.하얀 천 아래, 형이 누워 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다.“유리 파손 방향은 안쪽으로 튄 흔적이 많습니다.”
현장 감식 요원이 낮게 말했다.“외부 충격인지, 내부에서 파손된 건지는 더 봐야 합니다.”
건우는 그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 어딘가에 걸렸다.안쪽으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창문으로 옮겼다.
비는 여전히 바깥에서 쏟아지고 있었다.“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관리인이었다.“저녁에 큰 소리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세서… 정확히는…”
말끝이 흐려졌다.
비.
모든 게 비 때문인 것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형사가 건우에게 다가왔다.“동생분이시죠. 참고인 조사 위해서 잠시 말씀 나누셔야 합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들것이 들어왔다.하얀 천이 조심스럽게 고정됐다.
윤신우의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평온함이 이상했다.
마지막 순간에 겪었을 공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저 얼굴로,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겼을까.건우는 묻고 싶었다.
-형, 그때 뭐라고 말했어.
하지만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시신이 통제선을 넘어 나갔다.비가 얼굴을 때렸다.
하나는 여전히 안쪽에 서 있었다. 조사를 마친 듯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있었다.그녀의 눈이 잠시 건우를 향했다.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 스쳤다.아주 잠깐. 건우는 그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형은 죽었고, 이 집은 지금부터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될 거라는 예감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 도로의 소음이 한 겹 꺼졌다.차가 드문 구간이었다.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붙어 있었고, 간판이 오래된 상가 몇 곳이 띄엄띄엄 보였다. 햇빛은 건물 사이로 잘게 쪼개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위로 먼지가 얇게 떠 있었다.건우는 속도를 더 낮췄다.엔진 소리가 골목 안에서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앞쪽에서 검은 세단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김도현의 차량이었다.건우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멈췄다.”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여기서?”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이곳은 특별히 눈에 띄는 장소가 아니었다.사무실도, 창고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진 골목 한가운데, 굳이 차를 세울 이유가 없어 보이는 자리였다.건우는 차를 바로 붙이지 않았다.골목 입구 쪽에 가까운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세웠다.엔진을 끄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여기서 내리진 않을 거다.”그가 말했다.하나는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왜.”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확인 중이다.”그의 시선이 앞차에 머물렀다.“누가 따라왔는지.”그 말이 떨어지자 차 안이 더 조용해졌다.서하는 뒷좌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맞네.”그녀가 말했다.“한 번에 안 들어가네.”김도현의 차량은 시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브레이크등이 약하게 켜져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실루엣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건우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이 상황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도착이 아니라, 확인이었다.하나는 낮게 말했다.“눈치챘을까.”건우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완전히는 아니야.”잠시 후 덧붙였다.“근데 감은 잡았을 거다.”그 말은 지금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김도현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하지
복도를 빠져나오자, 아까와 같은 사무실인데도 온도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누군가는 여전히 보고서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전화를 받으며 웃고 있었지만, 건우의 감각은 그 평온함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마주한 짧은 대화가, 이제부터 이어질 시간의 방향을 분명하게 틀어 놓았기 때문이다.건우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 비상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가 더 또렷하게 울렸다.문을 밀고 들어간 계단실은 조용했다.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와, 위층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문 여닫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하나는 뒤에서 문을 닫으며 물었다.“왜 여기로 왔어.”건우는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시간 벌려고.”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정되어 있었다.하나는 한 발짝 다가섰다.“뭘.”건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지금쯤.”잠시 후 덧붙였다.“움직이고 있을 거다.”그 말은 추측이 아니라, 이미 계산된 흐름에 가까웠다.김도현은 방금 건우를 만났다.메일의 내용도 확인했고, 건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대략 짐작했을 것이다.그 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하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증거.”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지우거나.”그의 말이 이어졌다.“옮기거나.”서하는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사람은.”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숨길 게 생기면 손이 먼저 움직여.”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중요한 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건우는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짧게 번호 하나를 눌렀다.전화는 한 번에 연결됐다.“네, 검사님.”낯익은 목소리였다.건우는 낮게 말했다.“지금 회사 내부.”잠시 후 덧붙였다.“서버 로그 확인 가능합니까.”전화
메일이 발송된 뒤, 사무실의 시간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갔다.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낮은 대화가 이어졌고, 복도를 오가는 발걸음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온함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건우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을 켜 둔 채, 아무 작업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선은 사무실 안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조금 전. 김도현이 사무실을 나왔다.그리고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 있었다.“봤지.”그녀가 낮게 말했다.건우는 짧게 대답했다.“응.”그의 시선은 복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평소보다 빠르다.”그 말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김도현은 원래 움직임이 느린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항상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금은 달랐다. 걸음이 짧았고,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하나는 조용히 말했다.“메일 봤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하다.”잠시 후 덧붙였다.“내용도 이해했고.”그 말이 떨어지자,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이제 상황은 분명해졌다.정보는 전달됐다.그리고, 상대는 반응했다.서하는 창가에 기대 선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생각보다 빠르네.”그녀가 말했다.건우의 시선이 백미러 대신 창가 쪽으로 향했다.서하는 가볍게 웃었다.“급한 사람일수록.”잠시 후 덧붙였다.“첫 반응이 티 나거든.”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은 사실이었다.완전히 준비된 사람은 움직임을 숨긴다.하지만, 갑작스럽게 흔들린 사람은 움직임이 먼저 나온다.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나는 그를 바라봤다.“어디 가.”건우는 짧게 말했다.“확인.”그는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나도 뒤따라 움직였다.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건우의 시선은 주변을 훑고 있었다. 직원 몇 명이 서류를 들고 지나갔고, 멀리서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지만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의 발걸음과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건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얇은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숨어 있는 균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층수가 올라갈수록 숫자가 하나씩 바뀌었고, 그 단순한 변화가 오히려 긴장감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문이 열리자 복도가 나타났다.형이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었다.건우는 잠시 그 복도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하나는 그의 옆을 따라 걸었고, 서하는 조금 뒤에서 느리게 발걸음을 맞췄다.사무실 문을 열자 직원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오셨습니까.”짧은 인사가 오갔다.건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향했다.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자리에 앉은 건우는 노트북을 켰다.화면이 켜지는 동안, 그는 잠시 사무실 안을 훑어봤다.이곳 어딘가에서. 김도현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하나는 건우 옆에 서서 낮게 말했다.“어디서부터 시작할 거야.”건우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작게.”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확실하게.”하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모든 정보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단서만 흘린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건우는 메일 프로그램을 열었다.수신자 목록을 잠시 훑다가 몇 명을 선택했다.재무팀, 감사팀, 그리고 몇몇 임원들.김도현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하나는 그 화면을 보며 물었다.“내용은.”건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문장은 길지 않았다.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최근 일부 계좌에서 반복적인 자금 이동 패턴이 확인되었습니다.특정 개인 계좌와 연결된 흐름이 있으며,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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