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는 엄청 크고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온다연은 생활용품 구역으로 갔다.여기에는 특별히 비싼 브랜드는 없지만 상품이 다양하고 품목이 잘 갖춰져 있다. 그 상품들의 색상과 디자인은 꽤 잘 되어 있고 질감도 대형 브랜드와 비교할 바 있다.그녀는 매우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치약, 컵, 칫솔, 수건 모두 커플용으로 골랐다. 색상과 패턴이 귀여워 보였고 아기자기해서 다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그런데 유강후는 컵과 수건에 있는 딸기 그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이거 너무 핑크색 아니야?”온다연은 기분 좋게 고르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기분이 나빠졌다.그녀는 아까 고른 남자용 커플 아이템을 선반 위에 다시 돌려놓았다.“각자 알아서 고르는 거로 하죠.”유강후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그녀가 돌려놓은 컵과 수건을 다시 가져와서는 카트에 넣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못생겼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너무 핑크색이라서.”온다연은 차갑게 대답했다.“다른 색을 고르세요. 이건 강후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그러면서 그녀는 로봇 컵을 카트에 던졌다.“이거 강후씨한테 완전 찰떡이네요. 보는 눈은 없으면서 말은 많다니깐.”유강후는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유치한’ 컵을 집어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성격이 점점 더 나빠지네. 내가 핑크색이 너무 많다고 한마디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야 해?”온다연은 몸을 돌리더니 다른 물건을 고르러 갔다.“임신한 사람은 원래 평소보다 더 예민하단 말이에요!”유강후는 실눈을 뜨더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온다연은 그의 다리를 차면서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 나 내려놔요!”마트에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옆에 있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의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유강후는 그녀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더 꽉 안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손이 닿지 않잖아. 내가 안아줄게!”옆에 있는 어린이는 4, 5살쯤 되어 보였고 그들이 함께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손으로
이번에 유강후는 아무런 의견 없이 그저 조용히 옆에서 그녀가 물건 고르기를 내심이 기다렸다.그녀가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할 때, 유강후는 두 가지 스타일 모두 카트에 담았다.온다연은 속옷을 고를 때 얼굴이 빨개지었다. 그러고는 몇 장의 팬티를 눈에 뜨이는 족족 무심코 카트에 던졌다.이 모습에 유강후는 불만을 느끼고 그 팬티들을 꺼내며 말했다.“다연아, 좀 제대로 골라주면 안 돼? 나 이 색깔 별로고 게다가 사이즈도 작아.”온다연은 그의 허리 쪽을 슥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어느 사이즈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서 골라요!”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색깔로 골라봐. 너한테 입어 보여 줄게.”“넌 남편 사이즈도 몰라? 제일 큰 사이즈로 골라!”온다연의 얼굴은 더 빨개지였다.그러고는 말을 더듬었다.“누, 누가 강후 씨 입는 거 보고 싶댔어요! 알아서 골라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쥔 것처럼 속옷을 휙 던져 버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는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안되지, 내 속옷은 원래 네가 골라줘야 맞는 거지. 남편의 속옷을 네가 관리하지 않으면 누가 관리해?”유강후는 온다연의 귀에 숨을 살짝 불어넣었다.“다연이가 골라준 거로 하자. 그러면 내 컨디션도 따라서 좋아질 거야.”온다연의 얼굴은 너무나도 빨개서 금세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이를 꽉 악물고 말했다.“강후 씨, 이런 말 애들이 다 듣는단 말이에요! 나중에 애들한테 변태 취급 받고 싶어요?”유강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한다고?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교육해야지. ”온다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강후 씨 애들 때리기만 해봐. 나 가만 안 있어!”유강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빨리 골라, 이건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아니면 여기서 내가 너한테 뽀뽀할까? 아까 애들이 뒤에서 계속 우릴
유강후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들은 금방 크니깐 명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직접 골랐다는 거야. 엄마의 사랑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거니까.”“내가 보니까 옷들 다 품질 좋고 디자인도 예쁘던데? 당신 안목이 틀릴 리 없지.”온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말은 참 예쁘게도 한다니까.”그녀는 알지 못했다. 비록 마트는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마트는 모든 안전 검사를 마쳤고, 진열된 상품들도 전부 점검을 마쳤으며, 생활용품과 유아용품 코너의 제품들은 전부 최고급 브랜드의 상품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강후 씨, 미리 말해두지만, 아이들은 무조건 제 곁에서 키울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우림이를 훈련하듯이 키우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어.”하지만 훗날 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텐데 훈련을 시키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들이라면 우림이 못지않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 말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온다연이 출산할 때까지 그와 끝없는 싸움을 벌일 게 뻔하니까.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어릴 때 어머니 곁에서 크지 못해서 지금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한 거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울 수 없어요. 무조건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강후 씨처럼 성격이 까칠해질 게 뻔해요!”유강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성격이 까칠하다고?”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닌가요?”유강후는 그녀가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귀여워서 다시 한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나 성격 까칠해. 고칠게.”온다연이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
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둘 사이 정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지예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냉담한 기색이 가득했다.“현수 씨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저희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사라졌어요. 그는 단지 저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비참할수록 그는 더 기쁘겠죠.”“이 몇 년 동안, 그는 제 모든 디자인 도면을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넘겨줬고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씨 가문의 가정부일 뿐이에요. 그는 제 영광과 미래를 모조리 빼앗아 갔어요. 7년 동안이면 목숨 하나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지 않나요.”이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온다연은 그녀의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두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지난달, 현수 씨가 제가 동생이랑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다시 저를 감금하기 시작했어요. 어디를 가든 저를 무조건 데리고 다니면서 제가 어디로 도망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더라고요. 제가 없으면 장난감도, 화풀이할 대상도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절 데리고 나온 거예요. 저는 한 달 동안 그 방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심하게 찡그러졌다.“아직도 쇠사슬로 예솔 씨를 묶어놔요?”그녀는 지예솔의 몸에 남아 있던 끔찍한 상처들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아이가 죽은 후로는 더 이상 쇠사슬을 쓰지 않았어요. 조금이나마 자유를 얻은 게 제 아이의 목숨과 맞바꾼 거라니, 믿기지 않네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지예솔은 갑자기 온다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다연씨,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경원시를 떠나고 싶고 봉현수 씨 곁에서도 떠나고 싶어요. 다연씨라면 절 도와주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이틀만 시간을 줘요. 그동안 예솔 씨는 일단 계속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모든 일을 그의 뜻에 따르면서 경계를 풀게 만들어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기서 나갈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게요.”그때 봉현수의 부하가 들어왔다.“예솔 씨, 약 먹을 시간입니다.”그는 미리 준비한 약을 지예솔 앞에 내밀었다.지예솔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먹을 테니까 먼저 나가주세요.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요.”그 사람이 대꾸했다.“주인님께서 예솔 씨가 약 드시는 걸 직접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버린다고 하더라고요.”온다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나가세요. 제가 예솔 씨 약 먹는 걸 볼 테니. 여기서 저희 두 사람 방해하지 마세요.”온다연이 나서자 그는 마지못해 문가로 물러났다.“예솔 씨, 모두 다 예솔 씨 좋아지라고 준비해 둔 약이에요. 버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사가 다가와 다실의 문을 닫았다.지예솔은 약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전부 쓰레기통에 던졌다.온다연이 물었다.“무슨 약이에요?”지예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예요. 3년째 먹고 있어요.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온다연이 말했다.“그래도 약은 먹어야죠. 아프면 치료도 하고. 예솔 씨에겐 동생도 있잖아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죠.”지예솔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이 다시 물었다.“여길 나가면 무슨 계획이에요?”지예솔은 담담하게 말했다.“다 생각해 놓았어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온라인에서 일감을 받을 거예요. 제 디자인 스타일이면 먹고사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온다연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계획이 있다니 참 다행이네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길 벗어나는 것 까지만 도와줄 수 있지, 그 뒤에 일은 예솔 씨가 알아서 해야
사실 눈치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지예솔과 그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봉현수는 그 일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예솔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면서 그가 지예솔한테의 태도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들의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두 사람이 모두 마음을 열고 과거를 내려놓지 않는 한, 이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아무리 큰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솔 씨를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다가 예솔 씨 잘못되기라고 하면 어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예솔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거야? 다연아, 제발 이 일에 끼어들지 마. 현수 씨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다연이가 제일 말 잘 듣지. 정말 예솔 씨가 좋다면 둘이서 약속이라도 자주 잡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 현수 씨가 거절하진 않을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온다연은 인츰 말을 돌리었다.“맞다, 로운 씨는 어디 있어요? 진 씨 가문 쪽에 일이 좀 있어 그러는데 그에게 맡기려고요.”유강후가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하면 돼.”온다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 무능한 건 싫거든요?”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알겠어, 알겠어. 화내지 마. 로운이더러 당신한테 연락하라고 할 테니까, 무슨 일이든 편하게 지시하면 돼.”봉현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지예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내가 너한테 덜어준 반찬, 왜 안 먹었어?”지예솔은 조용히
소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웠다.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는 순간, 신분 차이가 극명한 그들의 사랑은 절대로 부모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탐닉했고 상대의 숨결마저도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어두운 작은 방에서, 깊은 밤 적막한 후원에서,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껴안았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그녀가 그에게 다가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분과 봉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으로서 누릴 영광과 부귀. 더 치욕적인 것은, 그녀가 감히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그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은 꿈속에서조차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어 그를 숨 막히게 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가 불행하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지옥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망할. 대체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지?’봉현수는 몸이 몇초간 굳어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닥쳐. 네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나 있어? 다시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내가 가만두나 봐.”지예솔은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저 좀 놔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요즘 계속 옛날 꿈을 꿔요. 그때의 우린 참 좋았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네요.”봉현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옛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지예솔, 또 도망칠 속셈이냐? 다시 가두어 놓아야 정신 차리겠어?”지예솔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눈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것은 오늘 지예솔이 직접 봉현수에게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해줬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믿어서도 안 됐었다.“지예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이렇게까지 빨리 내 곁에서 도망치고 싶어?잘 들어, 내가 죽기 전까지 넌 절대 봉씨 가문을 떠날 수 없어!”“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너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널 내 손으로 먼저 죽일 거니까!”지예솔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수야, 나 이젠 너무 지쳤어.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나 미쳐버릴 것 같아.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난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 증명해 보일 거야. 내 마음속엔 언제나 너 하나밖에 없었어.”봉현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이 작은 행동은 예전에 두 사람이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그를 달래곤 했다. 그렇게 그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작은 행동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질 줄이야.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이 사실이라고 쳐. 그런데 넌 왜 자꾸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거야?”지예솔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우리 아이를 죽였으니까. 그때 난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어.”그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봉현수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그때 그는 생각했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지만 지예솔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몰래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도했다.화를 참지 못한 그는 그녀와 격렬하게 다퉜고, 그 과정에서 지예솔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악화되었다.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그는 그녀가 소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