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집사님이 직접 만든 거야. 양념은 비밀 레시피라서 정말 맛있어.”진강남은 그녀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하얗고 고운 팔에는 아직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옆얼굴을 타고도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 물방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두 팔꿈치를 침대에 괴며 담담히 말했다.“아까 떨어질 때 복숭아 솜털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아. 좀 불편해 가렵네.”옹가희는 얼른 일어나 그의 눈을 살폈다.“어디 보자.”역시나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분명 손으로 문질러서 더 심해진 듯했다.옹가희는 어린 시절처럼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확인했다.가까이 다가오자 그녀의 몸에서 과일의 청량한 향기와 은은한 체취가 그를 감쌌다.진강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낮게 말했다.“불어 줘.”옹가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두 눈에 바람을 불어주었고 손이 아플 정도로 한참을 하다가야 몸을 일으켰다.“씻어내면 괜찮을 거야. 이물질은 못 봤어. 물로 씻으면 될 것 같아.”진강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벌써 나왔어. 안 가려워.”옹가희는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럼 와서 좀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그제야 진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옹가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팔꿈치를 책상에 올렸는데 그 순간 팔이 그의 팔과 스쳤다.순간 그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옹가희는 두툼하게 썬 소고기를 집어주고 과실주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오늘 밤은 운전 안 해도 되니까 조금 마셔도 돼. 향이 아주 좋아.”말을 마치고 자신도 한 잔을 따라 들었고 닭다리 하나를 뜯으며 시원하게 술을 마였다.먹느라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자 진강남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장화연이 손수 만든 음식을 먹는 건 오랜만이었다. 옹가희 입맛에도 잘 맞아 모르는 사이 꽤 많이 먹었고 술도 자연스레 곁들였다.집에서 빚은 술이었지만 은근히 취기가 돌았다. 반병쯤 비운 옹가희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일어나기
진강남은 눈치가 빠르고 손도 빨라 떨어지는 옹가희를 단번에 안아냈다.복숭아나무는 높지 않았지만 성인이 떨어지면 충격이 만만치 않아 두 사람은 함께 땅에 넘어졌다.순간 두 쌍의 부드러운 입술이 스치듯 맞닿았고 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부드러운 입술 익숙한 수박 맛이네.’진강남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입술은 정말 수박 맛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속눈썹은 길고 부드러워 눈앞으로 살짝 내려온 모습이 너무나 만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무심코 손을 내밀었지만 옹가희가 순간 튀어 올랐다.옹가희의 하얀 얼굴은 금세 새빨개졌고 본능적으로 입술을 닦았다.“부딪혀서... 미 미안해.”그녀의 행동을 본 진강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며 차갑게 말했다.“어리석은 건 어릴 적 그대로네.”옹가희가 손을 뻗어 그를 잡으며 물었다.“다친 데 없어?”진강남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곧장 일어나 걸어가 버렸다.옹가희는 그가 바구니를 땅에 던져 놓은 모습을 보고 자신 때문에 다치거나 화가 난 줄로만 생각했다.그녀는 바구니를 주워 들고 낮은 가지에 달린 복숭아 몇 개를 더 따 나서야 집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맴돌았다.‘진강남, 왜 이렇게 속이 좁지?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날까.’집에 돌아왔지만 진강남은 보이지 않았다.옹가희가 온 집을 둘러보자 장화연이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방에 있어.”“둘이 또 말다툼했나 봐요. 도련님께서 돌아오자마자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요.”옹가희는 사실대로 답했다. “나무 타다 부딪혔어요. 아마 아프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화가 나서 날 안 보는 것 같아요.”장화연은 급히 옹가희를 불러 자세히 살폈다.“다친 데는 없어요?”옹가희는 고개를 저었다.“없어요. 단오에게 부딪혔는데... 단오가 다쳤는지는 모르겠어요.”장화연은 위층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남자애라서 한 번쯤 넘어져도 문제없어요. 단오 도련님은 셋째 도련님 어릴 적과 비슷한 성격이에요. 말도 별로 없고 속이 좁아요.
진강남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수박을 주워 옆에 놓았다.그런 다음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옹가희에게 올려놓았다.코코가 몇 번 낑낑거리자 옹가희는 천천히 눈을 떴는데 눈앞에 진강남의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그녀는 아직 꿈속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반쯤 감고 거리낌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또렷하게 솟은 눈썹, 높게 뻗은 코 그리고 그녀의 인생 계획보다도 명확하게 그어진 턱선 까지 눈이 닿는 대로 다 바라보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예쁘네.”말을 마치자마자 품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고 시선이 향한 곳은 코코였다.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코코? 단오?”“어... 여기 왜 왔어?”진강남은 그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며 물었다.“아까 뭐라고 했지? 예쁘다고?”옹가희는 순간 얼어버렸고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그녀는 꿈속이라고 생각하며 거리낌 없이 그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평가까지 했었다.그런데 진강남은 그녀의 남동생이었다.‘어떻게 여자의 시선으로 단오를 봤을까?’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서둘러 코코를 땅에 내려놓고 일어나 과일을 씻는 척하며 말했다.“수박 먹을래? 포도 먹을래?”그가 안 먹는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했다.“둘 다 먹을래.”옹가희는 할 수 없이 새로운 수박을 하나 가져와 열고 그에게 건넸다.“숟가락으로 떠먹어. 정말 달아.”진강남은 받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둘 다 같이 먹을래.”옹가희는 어쩔 수 없이 수박을 파내 접시에 담고 포도 껍질을 벗겨 하나씩 수박 속에 넣었다.‘커도 여전히 까다롭네.’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를 마쳤다.“자 됐어.”진강남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반드시 자기 손으로 포도 껍질을 벗겨야 했고 다른 사람이 벗겨주면 절대 먹지 않았다.옹가희는 커도 여전히 까다로운 그의 성격이 놀라웠다.진강남이 숟가락으로 두 개를 떠먹고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포도가 조금 시큼해.”옹가희는 그의 숟가락을 뺏어 크게 떠먹
다음 날 장화연은 옹가희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옹가희는 이곳을 특히 좋아했다. 로란에 있을 때부터 꼭 돌아오면 며칠이라도 머물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원래는 다희와 함께 오고 싶었지만 다희는 다른 일이 있어 결국 장화연만 그녀와 함께 오게 되었다.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라 아침저녁은 선선했지만 한낮은 여전히 따가웠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옹가희는 곧장 2층 자기 방으로 향했다.방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침대 시트와 이불에서는 햇살과 세제의 상쾌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창가 책상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그녀가 신발을 벗고 침대에 뛰어오르려는 순간 1층에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렸다.“아가씨, 나 수박 따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요?”옹가희는 재빨리 신발을 신고 내려가며 말했다.“네 갈래요. 제가 바구니 들고 갈게요.”계단을 내려가자 장화연은 집 중앙에서 천으로 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큰 손으로 짠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완전히 농부 차림이었다.옹가희가 웃으며 말했다.“장 집사님, 이렇게 하시면 전혀 엄격해 보이지 않아요. 평소 모습이랑 완전히 달라요.”말을 하며 옹가희는 장화연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수박밭은 집에서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박을 세네 개 골라 바구니에 담고 시원한 우물물을 큰 돌 항아리에 부었다. 그 후 포도도 따서 우물물에 함께 담갔다.한참 바쁘게 움직이고 나서 옹가희는 조금 피곤해져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의자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잠시 쉬다가 수박 하나를 안고 입을 조금 벌려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맛있다고 칭찬하자 장화연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계속 맴돌았다.너무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이곳이 너무 편안해서인지 과일과 채소 향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신 옹가희는 안고 있던 수박을 반쯤 먹은 채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그때 진강남이 마당에 들어서자 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옹가희는 헐렁한 면 원피스를 입고 시
옹가희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진강남을 힐끗 쳤다. 뜻밖에도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진강남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감히 오래 쳐다볼 수 없어 바로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서른 살 전에는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어. 난 지금 사업과 학업이 가장 중요해. 남자는 그저 칼 뽑는 속도만 늦출 뿐이야. 이제 나를 ‘커리어우먼 가희’라고 불러줘.”자매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진강남뿐이었고 그의 눈빛은 심오하면서도 쉽게 읽을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점심과 저녁 식사는 당연히 매우 푸짐했다. 온다연은 은행 호텔 요리사를 불러 옹가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냈고 유진수도 함께해 온 가족이 긴 식탁에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즐겼다.장화연은 이미 은퇴를 앞두고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고향으로 돌아가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다희는 대성통곡했고 온다연도 계속 마음 아파했기에 결국 절충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는 장화연이 고향으로 피서를 가고 나머지 세 계절은 경성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다행히 그곳은 경성 인근의 성이었고 유진수는 작은 마을을 다시 개조해 길을 닦고 장화연을 위해 큰 집을 지었다. 집 뒤의 산도 통째로 빌려 과일나무를 많이 심었다.장화연은 사람들을 지휘해 밭 몇 군데를 개간하고 양어장을 만들고 오곡과 채소를 심었다. 뒷뜰에는 훌륭한 헬기 착륙장도 완성했다.여름이면 온다연이 유진수를 데리고 몇 주씩 그곳에서 지냈고 다희와 열한 몇몇 사람들이 틈틈이 번갈아 가며 살았다.나중에는 송지원, 한이준, 봉현수 등이 함께 작은 건물 세 채를 세웠고 헬기 착륙장 하나로는 부족해졌다.그 집은 사계절 내내 휴가만 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때로는 갑자기 흥이 난 사람들이 밤에 비행기를 몰고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장화연은 정성을 다해 과일과 채소를 가꾸었고 현재 이 대가족이 먹는 채소와 과일 대부분이 그녀의 뒷산에서 생산되었다.남
옹가희는 잠시 멍해져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나는... 다희 얘기를 묻는 게 아니야. 큰오빠의 약혼 상대를 묻는 거라고.”진강남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핸들 위에 올려놓고 눈을 내리깔며 낮게 말했다.“큰오빠와 다희가 약혼할 거야.”옹가희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 손에 든 강아지가 너무 세게 쥐어져 낑낑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네 말은 다희와 큰오빠가...”진강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마치 대단치 않은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이어갔다.“형과 다희는 이미 2년째 만나고 있어. 반년 전 형이 아버지께 솔직히 고백했고... 그날 이후 집안은 며칠 동안 시끄러웠지. 원래 아버지는 결사반대하셨어. 그런데 형은 아버지 서재 앞에서 사흘 내내 무릎 꿇고 버텼어. 물도 밥도 거부하다 결국 쓰러졌지. 어머니는 가슴 아파 계속 우셨고 장화연 씨도 괴로워서 집을 나가버렸어. 결국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승낙하실 수밖에 없었지.”옹가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큰오빠와... 다희가...’예전부터 함께 보아왔던 수많은 장면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왕자님처럼 맑고 고귀했던 양우림은 식사 자리마다 다희의 생선을 발라주었고 그녀가 남긴 음식조차 싫은 내색 없이 먹어주곤 했다.다희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온 가족보다 먼저 달려가 걱정했고 밤새 곁을 지키며 잠조차 이루지 않으려 했다.한번은 한 남학생이 다희에게 연애편지를 전했다가 거절당하자 집안의 권세를 믿고 길에서 억지로 붙잡고 밥을 먹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다희는 얼굴에 상처까지 입었다.며칠 지나지 않아 그 남학생의 집안 기업은 순식간에 파산했고 그 가족은 학교에 찾아와 울며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가장 극적이었던 건 다희가 고등학교 시절 군사훈련에 참가했을 때였다. 일주일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자 양우림은 훈련장 정문 앞에서 꼬박 7일을 버텼다.37, 38도에 이르는 늦여름 더위 속에서 그는 사람을 시켜 얼음을 들여보내 사제들의 더위를 식혀주었고 결국 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