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훈이 재빨리 방탄복을 입으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절 구해주셨던 그때부터 전 이미 한씨 가문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했어요. 그러니까 더는 절 설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얼른 헬기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세요. 지금 눈이 뒤집혀서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가려고 할 거예요.”한이준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 어림도 없는 소리. 날 건드린 이상, 죽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빠른 속도로 장비를 장착한 한이준은 무기를 들고 표범처럼 날렵한 걸음으로 헬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세 대의 소형 헬기는 임혜린 모자의 해외여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헬기가 상공에 떠오른 후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두텁게 쌓여있던 저택의 눈을 핏빛으로 물들게 했다.100m 상공에 있던 세 대의 헬기는 마치 사신의 낫이라도 된 듯 지면에 있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압도적인 반격에 당황한 극단주의자들은 잔뜩 겁에 질려버렸다. 불과 몇 분 사이, 그들은 감히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저택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들은 그저 가끔 의무적인 공격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헬기는 저택의 상공을 배회했다. 프로펠러가 일으킨 강력한 바람으로 인해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광란의 지옥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십여 분 후, 하나둘 저택에 도착한 로드와 지원팀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와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현장을 보고는 충격에 빠졌다. 비록 요즘 정세가 동요하고 있는 시국이긴 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이 감히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이런 사고를 일으키다니, 정말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그들이 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H 국의 재벌에게 극단주의자 소굴을 절반이나 탕진할 능력과 수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담대한 성격과 범접할 수 없는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을 맞닥뜨리면 어딘가에 숨어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한이준은 20분
임혜린은 멈추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돌아오지 않기만 해봐요. 나는 무조건 말한 대로 할 거예요.”한이준은 임혜린을 향해 등을 돌린 채 조용히 말했다.“동현이랑 여기서 조용히 숨어 있어. 어떤 소리가 들려도 나오면 안 돼. 이 방의 바닥은 20cm 특수 강철로 만들어져 있어 포탄도 뚫지 못할 거야. 스위치는 사다리 왼쪽에 있어.”말을 마친 한이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껑을 덮고 떠났다.임동현을 꼭 안고 있는 임혜린은 온몸이 떨려왔다.총기 소지 국가가 아니었던 나라에서 평화롭게만 살던 그녀가 이런 곳에서 이토록 큰일을 겪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방금까지도 평온하게 따듯한 침대에서 아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는데 지하실에 갇혀있는 현재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한이준은 위에 있는 사람들이 TV에서만 보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했다.그녀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이준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바닥을 사이에 두고도 점점 커지는 총소리와 대문을 부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이 별장은 규모도 컸고 시내에서 벗어난 교외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에는 이웃도 없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 시간이라 도움을 받기는 더욱 어려웠다.게다가 상대는 극단주의자들이라 무기도 갖추고 있어 경찰이 온다고 해도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임혜린은 아들을 꼭 안고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청각은 예민해졌고, 위에서 들리는 모든 총소리는 그녀의 영혼을 후벼파는 듯했다.임혜린은 억지로 한이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가 안전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임동현도 이미 깨어 있었다. 부모들의 대화를 듣기는 했지만, 아직 생과 사에 대해 전혀 몰랐던 아이가 지금 상황을 안전히 이해하기는 무리였다.다만 아이는 엄마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임혜린을 꼭 끌어안았다.얼마 후, 위의 소음은 점점 커졌고 집과 바닥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임동현은 참다못해 물었다.“엄마
두 사람이 깊게 잠든 뒤에야 한이준은 아이를 살짝 옆으로 옮기고 임혜린의 옆에 누워 살며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밤이 깊어질수록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졌고, 위험한 기운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새벽이 밝아오기 직전, 멀리서 뚜렷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한이준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봤다.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뜬 임혜린은 현재 국내에 있다고 착각하고 말했다.“누가 이렇게 새벽에 폭죽을 터트리는 거예요? 오늘이 초엿새라서 영업 준비라도 하는 건가?”그 순간 누군가 방문을 격하게 두드렸고, 집사는 예의를 차릴 여유도 없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대표님! 큰일 났어요!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들이 별장을 완전히 포위했어요!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전부 기관단총을 들고 대문을 향해 총을 쏘고 있어요.”한이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로드한테 지금 바로 연락해.”로드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지하 조직의 보스로, 한이준과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집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이미 늦은 것 같아요. 저놈들 미리 계획하고 들이친 것 같은데요?”한이준은 살기를 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일단 로드한테 연락하고 무기고를 열어. 우리 쪽 인원도 적지 않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말을 마친 한이준은 이불로 임혜린과 임동현을 단단히 감싼 후 서재로 달려 들어갔다.생전 처음 겪는 일에 임혜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아이를 꽉 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테러리스트예요?”한이준은 지하실을 열 수 있는 비밀 장치를 작동시킨 뒤 두 사람을 안고 내려가며 대답했다.“모르겠어. 아마 누군가 내 신분을 노출한 것 같아. 돈을 노리고 쳐들어온 소규모 무장 세력일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무서워할 거 없어. 너랑 동현이는 지하실에 있으면 돼. 여기에 2주 정도의 식량과 물이 다 저장되어 있거든. 안전할 거야.”그는 임혜린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탁자 위에 놓여있는 칼을 집어 들고 주저 없이 자기
오후가 되자,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경원시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이번 겨울 들어 가장 큰 눈보라였다.집 안에는 이미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난로의 온도도 더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오후쯤 아무도 모르게 외출했던 한이준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날씨도 춥고 시차 적응도 잘되지 않았는지, 임동현은 저녁을 먹고 나서 임혜린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한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야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한이준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임혜린이 임동현을 안아 침실로 데려가려는데, 갑자기 한이준이 다가와 두 사람을 품에 껴안았다.외투를 벗었음에도 그의 몸에는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임혜린은 추위에 몸을 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놔요. 몸이 너무 차갑잖아요.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래요?”한이준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잠깐만, 조금만 안고 있자.”그제야 얼음처럼 차가워진 그의 체온을 느낀 임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추우면 따뜻한 물로 샤워나 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그때, 한이준의 비서가 다가와 원고를 임혜린에게 건네며 말했다.“임혜린 씨, 이건 한 대표님께서 구해온 헤리나 디자이너의 제품 디자인 원고입니다. 며칠 전 패션쇼에 올라왔던 디자인이에요.”임혜린은 깜짝 놀라 아이를 보모에게 넘겨주고 방으로 데려가게 한 후, 원고를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말로 헤리나의 작품이었다.그녀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헤리나의 원고는 완성품이 나오면 전부 파기해서 절대 외부에 유출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구한 거예요? 그리고 이걸 왜 저한테 주는 거죠?”비서가 말했다.“그렇죠. 원래는 파기될 예정이었는데, 대표님께서 헤리나 디자이너가 있는 건물 밖에서 세 시간을 서서 좋은 말로 간청하고 엄청난 가격을 주고 겨우 구해온 거랍니다.”비서는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한이준 씨, 나는 이럴 때마다 당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가,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던 것들을 노력해서 얻으려고 할 때마다 전부 빼앗아서 곽혜영한테 줬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아요?”과거의 일들이 떠오르자, 임혜린은 서러움에 눈가가 빨개졌다.“어릴 때, 내가 오랫동안 먹고 싶었던 케이크를 곽혜영한테 사주고는 그녀가 먹지 않겠다고 바닥에 버리니까 그걸 주워서 나한테 줬었죠? 나는 그 케이크가 당신이 나를 위해 사준 건 줄 알고 기뻐하며 먹었어요. 그때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같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케이크가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라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자신을 스스로 혐오했는지 알아요? 그깟 케이크 한 조각 때문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내가 너무 한심하고 어이없었어요. 한이준 씨, 당신은 가끔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네요. 다른 사람의 존엄을 발로 깔아뭉개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놓고 인제 와서는 나한테 주려 했던 걸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곽혜영한테 줬다고요? 20년 동안 똑같은 레퍼토리가 지겹지도 않아요? 당신이 주는 건 이제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거예요. 도저히 감당되지 않네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더 이상 사지 마세요. 내가 좋아하는 건 내가 직접 사면 돼요.”임혜린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이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내가 나쁜 놈인 건 알아. 하지만 혜린아, 그때는 정말로 그저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매번 네가 허도현과 함께 있을 때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화가 났어. 내가 허도현을 얼마나 질투했는지 넌 모를 거야. 심지어 그의 얼굴을 뜯어내서 내 얼굴에 붙이고 싶을 정도였어. 네가 허도현과 함께 있을 때마다 도저히 이성의 끈을 잡을 수가 없더라. 너한테 내 존재를 알리려고 그런 짓을 했던 거야. 혜린아, 날 때려. 내가 잘못했어. 오랜 시간 내가 정말 너한테 너무 많은 잘못을 했어. 내 남은 인생으로 보상할 테니까 제발 나를 밀
다음 날 아침, 한이준과 임혜린은 경매에 참석했다.소규모 경매였지만, 올라온 물건들은 모두 왕실의 소장품으로 각각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당연히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부자나 귀족 출신이었고 대부분은 최상위 재벌 가문의 인물들이었다.그중, 한이준은 특히 한 쌍의 앤티크 결혼반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독특한 디자인에, 소박하지만 화려함을 잃지 않는 분위기.임혜린도 반지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이 반지는 옛날 왕이 왕후에게 청혼할 때 사용했던 결혼반지였기 때문에 가격이 엄청나게 높았다.한이준은 임혜린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는 반지를 꼭 손에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다행히 결혼반지는 용도가 특별해서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경매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이 한이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청혼용으로 사려는 것임을 눈치채고 특별히 경쟁하지 않았다.결국 그는 천6백억을 내고 반지를 낙찰받았다.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왕관이었는데 유명한 공주가 아끼던 물건이었다.임혜린의 보석함이 항상 허전하다고 생각했던 한이준은 왕관을 한 번 보고는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4천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가격에 모두가 놀랐고 그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그 뒤로부터 한이준은 마치 구매에 중독이라도 된 듯, 임혜린이 한 번이라도 눈길을 준 물건은 모두 사들이기 시작했다.임혜린은 어이없어하며 그의 팔을 계속 잡아당겼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구매를 이어갔다.결국, 경매가 끝날 때까지 총 8점의 소장품을 구매했고 각각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하지만 경매가 끝난 뒤에도 임혜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한이준은 그녀가 아직 뭔가 부족한 줄 알고 근처에 있는 큰 규모의 주얼리 가게를 돌아다니려 했지만, 임혜린은 그를 무시한 채 바로 차에 올라탔다.한이준은 조심스럽게 임혜린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여보, 오늘 산 물건들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임혜린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저걸 다 어디에 써요? 배고플 때 밥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