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평소에 자주 입는 흰색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도 위압감은 엄청났다.귀티가 흐르면서도 차가운 분위기가 흘러나왔다.나은별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달려가 이름을 불렀다.“강후 씨.”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도 꼈다.유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여긴 왜 왔지?”나은별은 냉담한 그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교를 부렸다.“너 너무 나빴어. 왜 며칠이 지났는데도 날 보러 안 온 거야? 그래놓고 지금 왜 왔냐는 말이 나와?”그녀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유강후를 이끌고 소파로 갔다. 잊지 않고 안주인 행세까지 하면서 말이다.“장 집사, 블루 마운틴 커피 한잔 가져다줘요. 각설탕은 하나 넣고요.”장화연은 유강후의 팔에 걸려있는 나은별의 팔을 힐끗 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합니다, 나은별 씨. 도련님께선 최근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아 집에 남아 있는 커피 원두가 없습니다. 나은별 씨가 원하는 커피는 못 드릴 것 같습니다.”나은별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블루 마운틴 커피를 좋아한다는 거 알면서 왜 미리 사다 두지 않은 거죠? 됐어요, 그냥 아무 커피나 내와요. 강후 씨가 즐겨 마시는 홍차는 있겠죠?”장화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다른 커피도 없습니다. 어제 금방 다 마셔서요. 홍차도 마침 오늘 전부 떨어졌네요.”나은별의 안색이 변하더니 유강후의 팔을 놓아주었다.“강후 씨, 혹시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거야? 그래서 다들 날 반겨주지 않는 거야?”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외라는 얼굴로 장화연을 보았다.그가 기억하기론 어제 금방 커피 원두와 홍차의 재고를 채워 넣었다. 온다연이 이탈리안 밀크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장화연은 특별히 레시피를 익혔다.그러나 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꼭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면 대홍포라도 내와.”장화연은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
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했다.“그건 아닙니다. 저는 모든 것을 셋째 도련님의 뜻에 따릅니다.”나은별은 말을 하지 않고 억울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봤다.유강후는 낯빛이 어두웠다.온다연이 헤어지자고 한 말이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듯 했다.비록 온다연이 아직도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저 화가 나서 한 말일 거라는 것을 알지만 불쾌했다.이렇게 오래 접촉을 하면서 온다연의 성격이 겉으로 보이는 듯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나른한 성격이 아니라 실제로는 고집이 세다.여러 번 달아나는 건 물론이고 오늘 임혜린을 위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제 다른 일을 겪으면 어떤 사람을 놀라게 할 행동을 할지 모른다.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유강후의 눈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장화연, 그 학교에 대해서 알아봐.”장화연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평판이 몹시 나쁩니다.”유강후가 말을 하기 전에 나은별이 눈을 붉힌 채로 유강후를 쳐다봤다. 그 모습은 아주 불쌍해 보였다.“강후 씨, 다연 씨가 어려 보여도 20살이야.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해도 진짜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떤 일은 강후 씨가 직접 관리하기도 불편하잖아. 여자 학교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나를 따르게 하면 되잖아. 내가 얼마 동안은 강후 씨 대신 봐줄게. 제대로 가르치면서.”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유강후는 낯빛이 어두운 채로 가만히 있다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이 일은 후에 다시 말하는 거로 하자.”이건 유강후의 기분이 아주 더럽다는 뜻이다.나은별은 유강후를 오래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은별의 눈에는 유강후는 자제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화낼 때가 극소수였고 언제나 늘 차가운 모습이었다.하지만 이번엔 그 고아 여자애를 위해 화를 냈다.그뿐만 아니라 온다연을 지키려고 가족들하고 모순이 생겼다는 것도 들었다. 몹시 아끼고 있었다.나은별은 원래 믿지 않았다. 도저히 항상 냉정하고 차
나은별의 눈에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부모님도 없는 사람이 감히 이 집에 들어오다니.진짜 자신이 본가 사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나은별이 앞으로 걸어가 온다연을 찼으나 온다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나은별은 불쾌해 또 세게 온다연을 두 번 찼다.여전히 반응이 없었다.방안은 불 정상적으로 너무 조용했다.나은별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앉아서 온다연의 얼굴을 쳐다봤다.너무 예뻐서 모든 여자들이 질투를 할 만한 얼굴이었다.나은별은 눈빛이 삽시에 차가워졌다.사실 전에 온다연을 한두 번 본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리고 출생이 비천해 거의 아무런 인상이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그때는 그저 여자애가 예쁘게 자랐다고만 생각을 했지 오늘 이렇게 자세히 보니 이 얼굴은 분명히 남자를 꼬시는 무기였다.피부는 하얗고 고와 나은별이 얼마를 줘도 사 올 수 없는 것이다.이 까만 머리카락은 머리숱도 많고 머릿결도 좋아 삭발을 밀어버리고 싶었다.나은별이 손을 뻗어 온다연의 얼굴을 살짝 다쳤더니 물이 묻었다.나은별은 그제야 온다연의 몸이 젖은 것을 발견했다.하지만 이 겨울에 유강후가 아무리 온다연을 싫어한다 한들 이렇게 젖은 옷을 입고 혼자 있게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정신을 잃게 말이다.이건 분명히 땀에 젖은 것이다.나은별은 빨리 온다연의 상황을 검사해 봤다.손을 볼때 온다연의 새끼 손가락은 계란만큼 부어 있었다.나은별은 아무 말 없이 온다연의 손가락을 쳐다봤다.좀 시간이 흐르고 시선은 다시 온다연의 얼굴에 향했다.그 예쁜 얼굴이 너무 짜증이 났다. 나은별은 온다연의 얼굴을 때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렇게 이뻐서 무슨 쓸모가 있어. 그냥 천한 년이잖아.”이때 온다연의 눈초리가 움직이고는 살짝 눈을 떴다.누구인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은별은 핸드폰 플래시를 껐다.나은별이 일어서며 온다연을 차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아저씨가 잘못을 승인해도 쓸모없으니까 여기서 잘 반성하라고 말했어
장화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갔다.조금 뒤 주방에서 새로운 요리를 내어왔다.새우 고수 볶음이었다.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새우 고수 볶음이 맛이 괜찮습니다. 아가씨 많이 드세요.”새우와 고수는 아주 나은별이 싫어하는 것이다. 나은별의 얼굴색이 변하더니 눈시울을 붉히고 낮은 소리로 울었다.“강후 씨, 나 손 아파. 병원 가자.”나른한 목소리는 억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휘했다.유강후의 낯빛도 좋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장화연을 보며 말했다.“장화연, 이번 연말 보너스는 없는 걸로 알아. 요즘 일을 어떻게 했는지 제대로 생각해 봐.”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인 모습이었고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나은별이 일어섰다. 울어서 코끝이 빨개진 모습이 아주 억울해 보였다.“나 병원 좀 데려다줘. 강후 씨, 사람이 물어도 아파.”유강후는 일어나서 외투를 가지고 나은별과 함께 나갔다.두 사람이 나간 후, 장화연은 방문 앞에 왔다.노크를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가씨, 셋째 도련님께서 나가셨는데 뭐 좀 드실래요?”온다연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장화연이 또 말했다.“배고프시면 문을 두드려보세요. 제가 먹을 걸 들여다 드릴게요.”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장화연이 한숨을 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셋째 도련님 성격이 원래 이러세요. 고집부리지 마시고 좀만 고분고분 말 들으시면 고생 덜하실 수 있으세요.”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장화연이 머리를 젓고는 문 앞에서 좀 서 있다가 돌아갔다.온다연과 그동안 접촉을 하면서 어떤 성격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생각보다 고집이 세고 화가 나면 말을 안 하고 사람을 물기도 한다.오늘 방에 갇혔으니 화가 더 나서 얼마 동안 가라앉지 않는 것도 정상이다.장화연은 밖으로 나가 아까 밖에 내놓은 해바라기꽃과 붓꽃을 다시 가지고 들어와 꽂기 시작했다.붓꽃을 다칠 때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아주 귀중한 물건을 다루는 듯 했다.그러고 장화연은 공기청정기를 켜 공기를 정화
장화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상후는 이미 방안에 들어왔다.어두운 광선아래, 장화연이 바닥에 무릎을 절반 꿇은 채로 온다연을 자기 무릎에 기대게 하고 얼굴을 쳤다.“온다연 씨, 온다연 씨. 정신 차려보세요...”유강후의 심장은 덜컹했다. 앞으로 가서 온다연을 안았다.손을 온다연의 이마에 대니 열은 나지 않았지만 땀범벅이었다.유강후는 가슴이 아파왔다. 후회가 밀려왔다.몸을 보니 아침에 입은 흰색 티는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이때, 장화연은 온다연이 누워있었던 바닥을 만져보더니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말했다.“땀이 많이 나서 바닥도 젖었습니다.”유강후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뉘우침과 노여움이 뒤섞여 복잡한 마음이었다.뉘우침은 이렇게 오래 가둬웠으면 안 됐었다는 것이고 노여움은 온다연의 고집이 점점 더 세진다는 것이다. 온다연은 이 방안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가.잘못했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을 침대에 눕히고 온다연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봤다.눈같이 하얀 얼굴이었다. 몸에 흐른 것이 땀이 아니라 피인 것 같았다.부끄러워하던 눈은 꾹 닫혀 있었고 평소에 흔들리던 눈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따뜻한 우유 갖고 오고 주 의사님 모셔 와.”말을 하고는 온다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낮은 소리로 불렀다.“다연아.”온다연은 장소가 바뀐 것을 느꼈는지 눈을 천히 떴다. 눈에는 초점이 없어 보였고 그저 한 눈 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그 모습은 허약해 눈을 뜰 힘도 없어 보였다.유강후는 침대 끝에 앉아 온다연을 안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이렇게 고집을 부려야겠어? 나랑 꼭 이럴 거야?”온다연은 대답이 없이 힘없이 머리를 유강후의 어깨에 기댔다. 다친 손가락은 더 부었고 이미 보랏빛이 돌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연이 따뜻한 우유를 갖고 왔다.유강후는
유강후는 당시 문이 무언가에 막혀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것 같았다.그게 바로 온다연의 손가락이었다.그렇게 나른한 손이 원래도 작은 손이 문에 끼여 부러졌다는 것인가?극심한 고통에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린 것인가?아파서 정신을 잃은 것인가? 그 방안에서 하루를 누워있었던 것인가? 얼마나 아프면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린 것인가?얼마나 고집이 셌으면 아파 죽을 거 같아도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은 것인가.극단적인 감정이 유강후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M 국에서 몇십, 몇백조의 투자가 눈앞에서 물 건너가려고 해 안씨 가문이 상대편에게 넘어가기 직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인생에서 처음으로 잃을지도 모르는 당황감을 느꼈다.안된다.절대 안 된다. 온다연은 자신이 지배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유강후의 눈에는 냉기가 흘렀다. 집착적이었고 무서웠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침대에 눞히고 잠옷을 꺼내 갈아입히고는 담요로 온다연을 감싸고 안고 나갔다.이권은 유강후가 온다연을 안고 나오는 것을 봤다. 유강후의 얼굴에는 얼음장마냥 차가웠다.술을 마신 원인으로 유강후의 걸음은 안정하지 않았다. 이권이 앞으로 가서 온다연을 받으려고 했다.“셋째 도련님, 제가 할게요.”“다치지 마. 당장 운전하고 병원으로 가.”유강후의 말투는 아주 냉철했다.이권은 깜짝 놀랐다.유강후를 오랫동안 따르면서 처음으로 유강후가 이토록 냉철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즉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하지만 이권은 더 묻지 않고 차를 몰고 왔다.병원에 간 후, 의사가 이 상황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뼈가 끼여 끊어진 시간이 너무 오래됐고 분쇄성 골절이라 부분적 조직이 이미 다 파괴돼 잘라내는 것을 권유했다.유강후는 화를 내지 않고 그저 과실의 모든 사람에게 한마디 했다.“만약 온다연의 손가락을 고치지 못하면 모든 과실에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이 있지 못할거예요.”지난번 온다연이 찬바람
밤 12시, 온다연에게 미열 정상이 나타났다. 이건 감염의 징조다.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음울해졌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그 차가운 눈빛만 봐도 한 과실의 사람들을 소름 돋게 한다.새벽 3, 4시쯤 되어 신구시에서 의학교류회에 참석하고 있던 국제에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가가 경원시에 도착했다.수술은 그제야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극히 복잡하고 세밀한 수술 후, 전문가는 유강후에게 손가락은 지켰지만 쓰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그리고 불구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온다연의 새끼손가락이 전처럼 영활하게 움직일 수 없다고 기본 상 확정할 수 있었다.유강후는 이 말을 듣고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온다연이 수술 후 얼마 동안 자고 있었다면 유강후는 얼마 동안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운 것이다.온다연이 깨어나 장화연이 유강후에게 알리러 갔을 때 테라스에는 담배꽁초가 가득했다.장화연은 침묵을 하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셋째 도련님, 온다연 씨 깨어나셨습니다. 들어가 보실 겁니까?”유강후는 즉시 온다연을 보러 가지 않고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직접 온다연이 좋아하는 계화 디저트를 만들었다.유강후는 거의 주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인들은 유강후가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잘리는 게 아닌가 하고 긴장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디저트가 식고 나서야 들어갔다.들어가 보니 온다연은 이미 깨어있었다.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 채로 침대 머리에 기대있었다.유강후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온다연은 다른 반응 없이 아이패드에 나오고 있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하룻밤 사이에 유강후는 온다연이 더 마른 것 같았다.얼굴에 겨우 살이 조금 오른 살이 하룻밤 사이에 다 빠지고 턱이 뾰족해 진듯했다.유강후가 입을 열기 전에 온다연은 아이패드를 치우고 유강후가 가져온 도시락통을 받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 감사합니다.”다친 손은 왼손이어서 오른손은 정상적으로 쓸 수 있었다.유강후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고 온다연은 숟가락을
유강후가 화를 낼까 봐 무서웠는지 온다연이 말했다.“다음에는 꼭 도움을 청할게요.”온다연의 말소리는 아주 작았다. 마치 이번 일이 별로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유강후의 마음을 찔렀다.유강후는 마음이 아팠으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보며 물었다.“계속 정신을 잃고 자고 있었어?”온다연은 창밖을 쳐다보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잘 모르겠어요. 중간에 누군가 들어왔던 거 같아요.”온다연이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쳐다봤다.“아저씨가 저 보러 들어오셨어요?”눈동자는 까맸고 아주 맑아 아주 무고해 보였다.유강후가 온다연을 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은별이가 들어갔는데 네가 물었어.”온다연의 눈에 이상한 빛이 스쳐 갔으나 금세 평정심을 되돌아왔다.온다연이 고개를 떨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다 제가 못나서 그래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당시 정신이 흐릿해서 누가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제가 누굴 물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온다연이 유강후를 바라봤다.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나은별 씨는 어떠신가요? 많이 엄중해요? 아저씨, 전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왜 제가 물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보며 마음은 점점 무거워 났다.유강후가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괜찮대.”온다연은 계속 유강후를 쳐다봤다.“아저씨가 병원에 데리고 가셨어요? 엄중하대요?”유강후가 말했다.“봤어. 의사 선생님이 괜찮대. 그냥 파상풍 주사 맞았어.”온다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으면 다행이에요.”귀하신 나은별 아가씨께서 자기절로 자신을 물고 파상풍 주사를 맞다니. 자신은 손가락이 끊어지고 하루 동안 갖춰있었는데 끊어진 손가락을 밟히다니.이게 바로 대비다.운명은 참 불공평하다.온다연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아저씨 나은별 씨하고 결혼하실 거예요?”유강후의 손이 멈칫하더니 손끝으로 온다연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