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 조각이 유강후의 손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손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보며 천천히 잡아 자신의 입가에 가져간 뒤 가볍게 뽀뽀하며 말했다.“피가 나요.”유강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온다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처음부터 그녀를 지켜주지 않은 것에 후회하고 있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온다연이 유씨 집안에서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 말이다. 유하령 뿐만 아니라 유씨 집안 모두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오늘 그들의 만행을 목격한 후에야 그녀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깨닫게 되었다.그들의 괴롭힘으로 그녀는 목숨마저 잃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살아가는 것조차 문제가 되었다.심지어 이건 유씨 가문에서만 있을 때 당한 괴롭힘이었다.유씨 집안에서 나온 뒤에도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혔으니 그는 그녀를 더 깊은 심연 속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그녀는 이렇게 몇 년을 살아왔기에 괴롭힘을 당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울지도 않고 마음속에 담아두며 혼자 끙끙 앓는 사람이 되었다.어쩌면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자 마음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 더 심한 괴롭힘이 그녀를 맞이했다.그녀의 보드랍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만질 때마다 그에게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그 안에서 얼어 죽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그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헬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찍 도착해 그녀를 구할 수 있지 않았는가.이때 유하령이 쳐들어오며 온다연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천박한 X, 어디서 감히 연기해? 네가 우리 가문에서 거저먹고 잔 세월만 해도 10년이야! 은혜를 갚지 못할망정 되려 복수를 해?! 너 때문에 우리 증조할머니가 지금 화병으로 쓰러지셨다고, 알아?”말을 하면서 유하령은 달려와 온다연을 또 때
하지만 아무리 닦으면 닦을수록 불쾌했다.온다연의 몸은 튀어버린 피 몇 방울로 점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차가웠던 마음에 불에 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안 돼, 안 돼!”그녀는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멍하니 유강후를 보았다.무표정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유하령을 빤히 보고만 있는 유강후의 모습은 아주 음험했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건들지 말라고. 그런데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유하령. 이건 시작이라는 걸 알려주지.”말을 마친 그는 물티슈를 뽑아 손과 옷에 묻은 피를 닦았다.그 모습은 고귀하면서도 깔끔해 보여 꼭 방금 본 폭력적인 장면은 그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눈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고통에 울고 있는 여자는 바로 그가 어릴 때부터 아꼈던 조카였다.모든 걸 목격한 심미진이 달려오며 당황한 기색으로 유하령을 잡아당겼다.그러나 유하령은 더욱 고통스러워 더 크게 울 뿐이다.심미진은 유강후를 보며 따져 물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하령이 작은 아빠잖아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죠?”유강후는 피를 닦다가 들려오는 심미진의 질책에 고개를 확 들더니 차갑게 노려보았다.그의 눈빛에 담긴 살기에 심미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심장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안색은 하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목소리에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그, 그런 뜻이 아니라...”유강후의 목소리는 아주 싸늘했다.“그러는 형수는 온다연 친이모잖아요. 형수도 본인 친조카를 모함하는데 난 왜 이런 짓을 할 수 없는 거죠?”심미진의 눈이 커지며 그가 내뿜는 엄청난 한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분명 난방을 틀어놓은 방이었지만 그녀는 얼음 동굴에 있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전, 전 모함한 적 없어요...”소란을 들은 유자성이 방으로 들어왔다.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그는 충격에 빠졌다.그는 얼른 유하령에게 달려가 나무 테이블에 박힌 칼을 빼내곤 사람을 시켜 병원에 보냈다.현장은 아수라장
드넓은 서재에서. 미래그룹의 대표, 인정머리 없이 잔인하기도 유명한 그 남자가 경건한 자태로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그는 손을 뻗어 의자에 기댄 채 잠든 사람을 쓰다듬고 있었다. 집중하는 표정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쓰다듬는 줄 알 것이다.그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봤다. 꼼꼼히 바라보는 것이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곁에 있는 사람이 충격받을 수밖에 없는 집착이다. 더군다나 의자에서 잠든 사람은 다름 아닌 유씨 집안 모두가 싫어하는 고아였다.유자성은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따져 묻고 싶었다. 이때 장화연이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큰 도련님도 셋째 도련님의 성질을 잘 아시잖습니까. 일할 때는 방해받는 걸 싫어하십니다.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유자성은 유강후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강후 병이 또 도졌어요?”“네. 사모님이 가정의를 보내주셨으니 내일쯤 도착하실 겁니다.”“혹시 연서 물건을 온다연한테 주던가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서 아가씨 물건은 셋째 도련님께서 직접 관리하십니다.”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강후는 고아를 연서로 생각하고 있어요. 연서가 죽었을 때...”그는 말을 마저 하지 못했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안고 나왔기 때문이다. 유자성을 보고도 유강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는 그저 팔뚝에 힘을 주며 침실로 걸어갔다.유자성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는 유강후가 온다연을 유연서로 착각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유강후의 침실로 들어간 것도 망각했다.그는 밖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다. 유강후는 잠시 후 느긋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유자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령이 말을 심하게 하는 건 나도 알아. 아무리 그대로 친조카잖아. 어릴 때부터 봐온 애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유하령이 언급되자
유자성의 말투는 마치 유강후가 효심이 없다고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유강후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내가 가서 소용없어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아닌 아들이니까요.”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는 우리 중에서도 널 가장 좋아해. 네가 그런 짓을 했으니 화내는 것도 당연하지.”“좋아해요?”유강후는 피식 웃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강씨 가문의 산업이 가져다줄 이익만 노리는 거겠죠.”“유강후! 네 외할머니 되는 사람이야!”유강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가능하면 아니길 바라고 있어요.”“너...!”유자성도 슬슬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해가 안 됐다. 말수 적고 차분하던 유강후가 왜 한낱 고아 때문에 이렇게 변했는지를 말이다.‘이렇게까지 죽은 연서가 그리웠던 건가?’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강후야, 너도 이제는 잊고 넘겨야지. 연서가 세상을 뜬 지도 수년이야.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서 살래?”“애초에 관심 없던 남들은 모르겠지만, 당사자한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에요.”“그렇다고 해서 온다연을 연서로 착각해?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냐고.”유자성이 말을 마친 순간 거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숨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정적이었다.아무도 몰랐다. 복도의 한쪽 끝에 서 있던 온다연이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던 것을 말이다.물론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 못 했다. 강해숙이 입원하고 유재성이 유강후를 병원으로 부른다는 것만 이해했다.‘나를 연서로 착각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연서는 누구야? 누구길래 나를 통해 그리워해야 하는 거지?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은별이 아니었나?’이때 장화연이 지나가다가 온다연이 맨발로 문어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다연 씨,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서 쉬세요.”온다연은 거실을 힐끗 보고 나서 방 안에 들어갔다.거실에서 유강후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말했다.“날 형이랑 똑같게 생각하지 마요. 난 아내가 우울증에
유강후는 안색이 변하며 온다연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턱을 잡으며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언제 엿들어도 된다고 했지?”그의 힘에 온다연은 턱이 아팠다. 금방 녹기 시작한 마음도 다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일부러 들은 건 아니에요. 목말라서 물을 찾다가 듣게 됐어요.”그녀는 유강후의 손을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자꾸 이렇게 잡지 마요. 아파요. 입 안도 아프고...”유강후는 이제야 그녀를 풀어주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그 이름 언급하지 마.”“...네.”유강후는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았다.“혼자서도 잘 수 있지? 난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다녀와야 해. 네가 깨어난 다음에 영원으로 돌아가자.”그는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서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잘 자.”유강후는 해가 지고 밤이 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잘 만큼 자고 일어난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유강후의 서재에는 책이 아주 많았다. 서재의 벽면을 전부 채우고도 모자라서 창고까지 있었다. 이곳에는 주로 경제학에 관한 책이 있었다. 같은 책도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된 버전이 있었다.온다연은 영어로 된 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그녀는 사진을 주워들었다. 약간 색이 바랜 사진은 비닐까지 씌워져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예쁜 원피스를 입고 이젤 앞에 앉아서 환하게 웃었다.순진한 미소는 한없이 아름다웠다. 이젤에는 그리다 만 해바라기가 있었다. 이 사진을 본 순간 온다연은 손을 흠칫 떨었다. 사진의 모퉁이에는 자그마한 글씨가 있었다.[사랑하는 연서.]수려한 글씨체는 전문가의 교육을 받은 적 있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심장이 너무 아팠다. 호흡도 서서히 가빠졌다.‘이 사람이 연서... 인 거지?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던 거구나. 아저씨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나은별도 나도 비
온다연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구월이랑 놀고 있었어요. 이제 영원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는데, 구월이는 가기 싫은가 봐요.”그녀는 또 구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앞으로는 비싼 사료 사주지 마요. 너무 곱게 키우면 오히려 더 쉽게 탈 나요.”유강후는 이제야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그렇다고 해서 안 좋은 걸 먹일 필요는 없어. 입맛에 맞는 대로 계속 좋은 걸 주면 되지. 불안하면 내가 차라리 인수해 버릴까?”“너무 곱게 키우면 안 된다니까요.”유강후는 무언가 생각난 듯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경고의 의미로 말했다.“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떠나서 절대 날 떠날 생각하지 마. 안 그러면 다리를 확 부러뜨릴 테니까. 내 말장난 아닌 거 알지?”온다연은 대답 대신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녀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한참이나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가 아프다고 버둥거릴 때까지 말이다.그날 밤, 두 사람은 바로 영원으로 돌아갔다. 이번 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았다. 온다연은 계속 호텔에서 지내다가 가끔 날씨가 좋을 때만 구월이를 데리고 공원 산책에 나섰다.가끔 외출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들이 온 뒤로 호텔에는 사람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외국인 한 명이 들어온 것 같았다.외국인은 유강후와 비슷한 외형에 친구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벌써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별 관심이 없었다.근처의 공원에는 언제부터인가 구조물을 세우기 시작하더니, 나무와 호숫가 기둥에도 조명을 걸어 놓았다. 일부는 특별한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밤이 되면 네온사인이 공원을 한가득 채워서 아주 아름다웠다. 온다연은 한 번 다녀온 뒤로, 저녁 식사 후 종종 구월이를 데리고 나갔다.영원은 경원처럼 국제적인 대도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도시인 것도 아니다. 이곳에 조명 장식이 설치된 후 한동안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운동복을 입은 남자는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귀가 빨개진 채로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저... 혹시... 연락처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저도 이 근처에 사는데... 나올 때마다 그쪽이 보여서...”온다연의 시선은 그의 옷 단추에 닿았다. 그러고는 멀지 않은 곳의 나무 그늘을 바라봤다. 네온사인 덕분에 주변은 아주 밝았다. 치밀하게 숨은 줄 알고 있을 상대도 진작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녀는 곁에 있던 장화연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돼요?”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온다연은 다시 남자의 옷 단추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이 근처에 사는 거 알고 있었어요?”온다연이 대답하자 그는 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밤마다 여기 있길래...”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저쪽에서 고양이랑 같이 앉아 있었잖아요. 매일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카톡 친구 추가해도 될까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공원에서 나오며 온다연은 다정하게 장화연과 팔짱을 꼈다.“집사님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오늘 일 아저씨한테 얘기 안 할 거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모습이었다.“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서 뒤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저 여자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 같이 혼내줄까요?”장화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온다연이 또 말했다.“제가 다른 남자한테 연락처 준 걸 알면, 아저씨가 저를 죽이려고 할까요?”장화연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그건 가능할 것 같네요.”온다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무서운 생각은 금방 지나갔다. 그녀는 장화연과 팔짱을 낀 채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집사님만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집사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집사님의 취향도 너무 훌륭해요. 집사님이 골라준 물건은 전부 마음에 들었거든요. 아쉽
장화연은 말수가 아주 적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온다연에게는 항상 다정했다. 더욱 짜증 나는 건 자신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미소를 장화연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장화연과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머리까지 기댔다.심지어 그녀는 라떼까지 사다가 장화연과 함께 마셨다. 그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장화연에게는 마실 것까지 사다 주면서, 그에게 준 것은 곰돌이 커프스밖에 없었다.이때 온다연은 구월이를 장화연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심지어 자신의 라떼를 그녀에게 맛 보이기도 했다. 유강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온다연!”어디에서 들어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목소리였다. 온다연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나무 아래에 서 있는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유강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그는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추위보다도 싸늘한 기운이었다.그는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기는 했지만 화려한 네온사인보다도 눈에 띄었다.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몰랐던 온다연은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강후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리 와.”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와서 몸을 오소소 떨리게 했다. 라떼도 조금 전처럼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그녀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유강후의 냉기는 더욱 짙어졌다.“이리 오라니까!”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온다연은 구월이를 장화연의 어깨에서 내리더니 꼭 끌어안고 유강후를 향해 걸어갔다. 유강후는 그녀가 가까이 걸어오기도 전에 손을 뻗어 확 낚아챘다.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라떼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뭐야?”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조금 전처럼 신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라떼예요.”유강후가 규정한 식단에 존재하지 않는 음식이었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마셔도 된다고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