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비틀거리며 유강후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불편해요, 병원에 데려가 줘요!”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소파에 눕히고 다시 체온을 측정했다. 38.5도였다. 그는 작은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의사가 곧 올 거야, 네가 익숙한 하인도 두 명 오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온다연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불편해요, 정말 불편해요. 아저씨, 제발 저를 병원에 데려가 줘요.” 이때 이권이 유강후에게 재촉했다. “셋째 도련님, 일이 있으면 빨리 가세요. 여기는 제가 맡을게요. 온다연 씨는 그냥 열이 나는 것뿐이니까, 주 의사가 곧 올 거예요.” 온다연은 약하게 말했다. “아저씨, 제발, 병원에 데려가 줘요. 배가...” “온다연 씨!” 이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은별 씨가 자살했어요. 나은별 씨는 셋째 도련님에게 은혜를 입었어요. 도련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도련님은 그냥 한번 보러 가는 것뿐이에요.” 결국 나은별, 또 나은별! 온다연은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아프고 힘든데,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함께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나은별은 언제나 그녀보다 한발 앞서 있었고 항상 더 중요했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보다도 중요했다. 그녀는 힘겹게 바라보았고, 손바닥과 이마에 땀을 흘렸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나은별 씨를 보러 가는 게 싫어요. 병원에 데려가 줘요.” 유강후는 그녀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은별은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오늘 네가 많은 고양이를 끌어들여서 나은별이 얼굴과 몸에 많은 상처를 입었고 큰 충격을 받아서 병이 도졌어. 그러다 대동맥을 끊었고 이미 세 번이나 응급 치료를 받았어, 다연아.” 온다연은 눈을 감고 몸의 불편함을 참으며 낮게 말했다. “나은별 씨가 저보다 더 중요하죠?”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의사가 곧 도착해. 잘 있어, 가서 보고 금방 돌아올게.” 말을
이권은 그녀가 따라오는 모습을 보고 찌푸린 채 말했다. “온다연 씨, 집에 계세요. 나와서 이러지 마세요, 바깥에 눈바람이 심해요.” 온다연은 배를 감싸 쥐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배가 아파요, 병원에 데려다줘요.” 이전에 몇 번의 도망 사건이 있었던 탓에, 온다연이 도망치고 싶어 하는 습관이 이권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이것도 온다연이 만들어낸 핑계라고 생각했다. “온다연 씨, 들어가세요. 셋째 도련님이 말했어요. 어떤 이유나 핑계로도 당신을 이 방에서 내보내면 안 된다고요.” “게다가, 여기 경비가 철저하니까 이 방을 나가도 도망칠 수 없어요. 그러니 괜히 문제 만들지 마세요.” 더욱 심한 통증이 밀려오자 온다연은 거의 말을 잇지 못했다. “병원... 데려가...” 하지만 이권은 그녀의 말을 핑계로 생각하고, 그녀의 팔을 잡아 다시 방으로 밀어 넣었다. 온다연은 문에 의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통증 때문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이권 씨, 진짜 배가 아파요, 병원에... 데려가 줘요,,,”그때, 갑자기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분이 새 이웃인가요? 무슨 일이죠, 부부 싸움이라도 했나요?” 온다연이 돌아보니, 50대 중반의 중년 여성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성 옆에는 두 명의 경비원이 따라오고 있었고, 이들은 분명히 특별한 사람들로 보였다. 온다연은 구세주를 만난 듯, 문틀에서 손을 떼고 여성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두 걸음 뛰자마자 그녀는 땅에 쓰러졌다. 통증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여성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꽉 잡고 말했다. “제발... 도와줘요... 저를 가두려고 해요... 저는 임신했어요... 배가 너무 아파요... 제발, 병원에 데려가 줘요!” 여성은 즉시 화가 나서 이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상태인데 왜 병원에 안 데려가요? 범죄를 저지르고 싶나요?” 이권은 급
의사는 말을 마친 뒤 간호사한테 온다연을 휠체어로 병실까지 옮겨달라고 분부했다.응급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가 웅성거렸다.그녀의 휠체어를 미는 두 어린 간호사가 작은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듣기로는 나씨 집안 아가씨가 자살 시도를 했대. 대동맥을 그어버려서 피가 아주 사방에 다 튀었다지 뭐야.”“맞아. 벌써 네 번째로 응급처치하는 거잖아...”“심각한 우울증이라서 처음 자살 시도 하는 것도 아니래.”“그렇게 행복한데 자살은 왜 한대? 봐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받들어 모시는데!”“저 사람 예비 신랑도 왔대. 그 소문으로만 듣던 유씨 가문 셋째 도련님, 너도 알지, 연예인보다 더 잘생겼잖아.”“어디 보자, 저쪽에 있어?”“어머, 진짜네. 나씨 가문 아가씨를 안고 들어왔어. 쯧, 실물은 처음 봐!”...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유강후가 나은별을 안고 수술실에서 나오고 있었다.나은별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둘을 갈라놓을 수 없는 듯했다.온다연은 그 장면에 눈이 극심하게 아려오면서 가슴도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팠다.유연서를 제외하고, 그는 나은별에게 감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서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게 내버려 두었다. 병실에는 현진화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온다연이 나오는 걸 본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도 애는 무사한 모양이네. 유산했을까 봐 걱정했어.”그녀는 온다연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다연아, 무슨 일인지 말해 보렴. 아파트에 있던 그 사람, 애 아빠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유강후가 나은별을 안고 있던 화면을 떠올리자 그녀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약간 마비된 것 같았다.“애 아빠는 병원에 있어요.”현진화는 크게 화를 냈다.“어디 있어. 내가 가서 찾아봐야겠다. 자기 아내랑 애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한번을 안 와보니!”
고용인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모르겠어요. 현관이랑 소파는 제가 처리했습니다. 침대 위는 미처 정리를 못했는데 도련님이 돌아오셔서...”“저희가 왔을 때 집에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문도 열려 있고 현관에 핏자국이 있어서요. 도련님, 저흰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유강후는 가슴이 심하게 아파와서 그녀를 놓고 성큼성큼 안방으로 걸어갔다.새하얀 시트 위, 온다연이 앉았던 자리에 정말로 핏자국이 있었다.많지 않았지만 눈에 띌 정도였고 핏자국은 이미 말랐다.유강후의 눈이 점점 더 붉어졌다.그 작은 하나하나의 핏자국이 날카로운 칼처럼 그의 심장을 후벼팠다.그는 그가 나갈 때 그녀가 애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온다연은 이미 아파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채 자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달라고 간청했다. 근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는 심장이 너무 심하게 아팠다. 아파서 허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었다.이 일이 있기 전에는 그는 자신과 온다연 사이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본인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근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둘 사이의 균열은 커질 대로 커져서 손도 못 댈 상황이었다.게다가 온다연을 데리고 간 사람은 연락도 안 됐다.불안한 마음은 점점 더 커졌다.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말라버린 핏자국을 쓸어내렸다.“다연아...”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눈보라가 경원시를 휘몰아쳤고 검은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거의 모든 병원에서 긴급점검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부인과가 가장 심하게 검사를 받았다.병원뿐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호텔에서도 긴급점검이 이루어졌다.한 번 검사한 걸로도 모자라서 아침부터는 두 번째 점검이 시작됐다.하루 만에 경원시 모든 병원과 호텔 사람들이 불안에 휩싸였지만 누구를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하지만 아마 찾으려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인지 점검은 쭉 계속됐다.자연스럽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누군가는 큰 사건이 발생해서 엄청 중요한 자료를 찾는 거라
온다연은 손이 떨려서 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현진화는 미간을 찡그리고 말했다.“적어도 보름은 걸려야 찾아낼 줄 알았는데 이 자식이 이 정도로 실력이 있을 줄 몰랐다. 고작 5, 6일밖에 안됐는데 상황을 뒤집고 무슨 수단을 쓴 건지 우리 집까지 알아내서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어.”온다연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현진화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그렇지만 무서워하지는 마. 그가 너를 여기서 데려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말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했다.그리고 온다연을 데리고 객실로 갔다.그때 별장으로부터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두 줄의 제네시스 차량이 빠른 속도로 오고 있었다.몇 분 지나지 않아 차들은 별장 앞에 멈춰 섰다.몇백 명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려서 별장의 절반쯤을 포위해 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자 헬리콥터의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졌다.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헬리콥터 날개는 세차게 돌아갔다. 강력한 바람에는 눈이 섞여 있었고 땅에 있는 마른 나뭇잎까지 끌어올려 별장 외벽에 부딪히는 게 분노에 서린 것 같기도 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씨가 더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유강후는 헬리콥터에서 빠르게 내려왔다.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검은 코트는 바람에 휘날려서 옷자락이 부딪히는 게 사람 자체가 차가워 보였다.유강후가 신속하게 현관으로 걸어갔지만, 경비가 그를 막아 나섰다.“여기는 개인 별장입니다. 어서 떠나주세요!”말하면서 경비는 손에 있는 총을 꽉 움켜쥐었다. 명백한 경고의 말투였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십이월의 제일 찬 서리보다도 차가웠다.그가 손을 들어 지시하자 여러 명의 보디가드들이 앞으로 나섰다.두 경비도 일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이 수적 우세가 있으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몇 번의 실랑이 끝에 그 두 사람은 제압당했고 총도 빼앗겼다. 유강후는 현관으로 들어갔다.현관에는 현진화가 집사를 데리고 차가운 얼굴로 서
“뭐라고요?”유강후는 마치 그 단어를 듣고 암살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현진화가 온다연을 데려갔다는걸 알았을 때 그는 조금 안심했다.현진화의 능력이라면 아이 하나 지켜내는 건 쉬운 일이니까 말이다.하지만 유강후에게 돌아온 것이 온다연의 유산 소식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현진화는 일부로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나한별 옆에서 얼쩡거릴 때 네 애가 없어졌다고, 못 알아듣겠어?”유강후는 누구한테 세게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거위 털 같은 함박눈이 그의 몸에 떨어졌다. 빽빽한 바늘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검 같기도 했다.온 하늘과 땅을 덮을 듯한 눈이 그를 찔러와서 아파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아이는 지키지 못했을 거란 걸 예상하긴 했지만 그는 두 사람의 아이를 여러 번 상상했었다.그는 온다연처럼 유일무이하고 하얗고, 얌전하고 귀여운, 작은 치마를 입은 아이가 그를 따라다니면서 말랑한 목소리로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화면을 상상했었다.하지만 이렇게나 빨리 그 환상은 깨져버렸다.게다가 무려 그가 직접 깨부순 거였다.온다연이 과연 그를 용서할까?유강후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니, 용서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그의 옆에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오직 그의 것이었다.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그녀는 오로지 그에게만 있어야 했다!현진화가 더 뭐라 말을 하기는 했지만 유강후는 거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그가 손짓하자 가드들이 재빠르게 달려가서 현진화와 집사를 한쪽으로 밀어버렸다.그리고는 매 방마다 수색했다.그리고 마침내 바깥쪽 객실에서 온다연을 찾아냈다.그녀는 커다란 흰 스웨터를 입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다리에는 담요를 덮고 있었는데 굉장히 얇고 허약해 보였다.그녀의 눈에 더이상 예전 같은 온순함은 없고 오로지 차가움만 있었다.유강후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아이만 생각하면 심장에 만 개의 화살이 박히는 기분이었다.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마침내 그녀의 앞에
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래요.”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온다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분위기는 우울함의 정점을 찍어버렸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쯤 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온다연을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반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하니까 말이다.여기서 며칠 쉬었고 현진화의 보살핌을 받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행운을 누린 거였다. 그녀는 더이상 현진화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유강후는 두툼한 담요로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를 안은 채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우리 집에 가자.”온다연은 낮게 비웃으며 말했다. “유강후 씨, 저한테는 집이 없어요. 엄마는 죽었고, 아빠도 없고, 이모는 나 버렸고, 유씨 가문 사람들은 저를 개처럼 취급하는데. 저는 진작에 집 같은 건 없었어요.”주한이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갈 곳이 있었는데 주한이 죽고 나서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유강후는 굳어버린 채 손을 달달 떨었다.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집 있어. 내가 있는 데가 네 집이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면서 명확하게 말했다. “아뇨. 당신이 있는 곳은 감옥이에요. 나를 죽을 때까지 가둬둘 감옥! 당신은 유씨 가문 사람이죠. 그 사람들이랑 한집 식구죠.”유강후의 마음이 이미 갈가리 찢어진 듯했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억지로 가슴의 고통을 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아, 그런 말은 하지 마.”온다연이 낮게 말했다. “유강후 씨. 사실 그날 밤 병원에서, 당신이 은별 씨 안고 수술실에서 나오는 거 봤어요. 그때 저도 응급실에서 갓 나왔거든요.”온다연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매 순간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다.그녀는 가슴이 아픈 걸 참으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아끼는 사람 챙겨요. 저한테 그걸 말릴 권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왜 제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막은 거예요? 유강후 씨, 나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두세 시간 되는 거리였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량 내부는 밖 온도보다 더욱 낮은 것만 같았다.집에 도착했을 때,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온다연이 차갑게 그를 밀어내면서 얘기했다.“나도 걸을 줄 알아요.”유강후는 그런 온다연의 고집을 꺾고 온다연을 안은 채 침실에 들어갔다.그리고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내려주고 그녀가 입는 잠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온다연은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이 남자가 얼마나 강압적인지, 독점욕이 얼마나 강한지, 온다연은 상상도 할 수 없다.그와 같이 산다는 건 개인 시간이나 공간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옷이나 신발부터 바디 워시, 화장품까지 다 그가 직접 골라주는 것이다.심지어는 그녀의 속옷까지도 유강우가 직접 고른 것이다.처음에는 그저 유강후가 플레이를 좋아하는 타입인 줄 알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강후의 집착은 더욱더 강해졌다. 결국 온다연이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반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로즈향의 바디로션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몰래 인터넷에서 다른 향의 바디로션을 샀었다.하지만 한번 발랐을 뿐인데 유강후가 그걸 발견해 버렸다.그는 조용히 다시 바디로션을 바꿔놓았다. 온다연이 그 바디 로션을 다시 사려고 봤을 때, 그 매장은 이미 사라졌다.게다가 그 제품의 원료 중에 유해물질이 있다면서 영원히 판매 정지가 되었다.또 한번은 온다연이 타 먹는 밀크티를 두 번 정도 샀었다. 세 번째로 구매하려고 했을 때, 그 매장은 또 사라졌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유강호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는 지금도 온다연의 옷을 갈아입혀 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거기서 이상한 거 먹은 거 아니지? 약은 먹었어? 위는 괜찮아?”결국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