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대인배였던 남하윤은 곧바로 미소를 되찾고 대답했다.“대표님의 충고,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저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이윽고 그녀는 유강후의 곁에 있는 온다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이분이 바로 다연 씨죠? 저희 만난 적 있잖아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쁘신 것 같은데요.”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하윤 씨.”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희의 눈빛에는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온다연은 그 눈빛에 미세하게 표정을 찡그리며 유강후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낮게 말했다.“아저씨, 우리 그냥 돌아갈까요? 저 조금 피곤해요.”하지만 유강후는 덤덤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고 가자. 결혼식에 쓸 피아노 연주곡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보고 괜찮으면 우리 결혼식에 쓰지, 뭐.”그 말에 주희가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온다연의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급히 유강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이런 얘기는 밖에서 하지 말라고요, 제발.”남하윤은 유강후의 말을 듣고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깊은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다연 씨, 유 대표님이랑 결혼하시는군요. 정말 축하드려요. 제가 선물 엄청난 거 준비해드릴게요.”하지만 유강후는 계속해서 주희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이 주혜성과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 유강후는 몰랐다. 하지만 주혜성의 반응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확실히 온다연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니 유강후는 자연스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주혜성을 온다연의 과거 동창으로, 온다연을 탐냈던 그 남자로 여겼다.잠시 후, 시선을 돌린 유강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땐 네 남자 친구도 같이 데리고 와.”온다연을 이끌고 자리에 앉은 그는 더 이상 남하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남
싸늘한 시선으로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주희를 한 번 쏘아본 유강후는 몸을 일으켜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 순간,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더욱 애절해졌다. 그 음악은 마치 저주라도 된 듯 온다연을 감싸며 그녀의 마음을 서서히 터뜨릴 듯 조여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파묻으며 말했다.“아저씨, 저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우리 이만 돌아가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더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그래.”그는 온다연을 데리고 빠르게 공연장을 빠져나갔다.밖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몰아치는 차가운 공기에 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더욱 꽉 움켜잡고 말했다.“저 좀 추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코트 안으로 감싸 안으며 낮게 물었다.“이래도 추워?”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속이 너무 추워요.”그 말에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한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온다연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제 유강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얼마 전, 그는 예전에 유씨 가문에서 해고된 하인들과 집사들을 모두 찾아내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다.처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던 때, 온다연은 반항도 해보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봤지만 그 뒤에 따르는 것은 더욱 심한 모욕과 보복이었다.해고된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온다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끼니를 거르는 것 정도는 자연스럽고도 가벼운 일상이었다고 한다.겨울에는 온다연의 침대에 얼음을 쏟았고, 여름에는 그녀의 방에만 난방기를 틀어놓았다. 밥에는 작은 압정들을 뿌렸고, 죽은 쥐, 고양이나 강아지의 사체가 그녀의 침대 위에 놓여 있곤 했다.온다연이 전에 갇혔던 그 물탑 옆 방은 온다연이 한여름에 몇 번이고 갇혔다가 탈수 상태로 나왔던 방이었다. 심미진은 그런 온다연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 아무도 온다연이 이런 것들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감히 상상도 못 했다.그 후부터 온다연이
그때의 사건과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생각이 들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다연을 품에 안고 차에 탔다.한밤중이 되자 온다연은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의식 역시 온전치 못했다. 그런 온다연의 모습을 보던 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어둠이 깃들었다.그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온다연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간호했다.동이 틀 무렵, 장화연이 안으로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안 돌아갔습니다.”유강후는 아직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한 번 쳐다보며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다행히 열은 내렸다.어젯밤, 온다연은 밤새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계속 땀을 흘린 탓에 옷도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했다.밤새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인지 자는 내내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잠꼬대를 했다.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유강후는 질투마저 느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불을 덮어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직접 만나러 가야겠어.”그 말을 남긴 유강후는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밖에서는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밤새 눈이 내린 탓에 병원 밖 거리에는 두터운 눈이 쌓여 있었다.온다연의 병실을 마주 보고 있는 오래된 거리에는 검은색 슈퍼카가 서 있었다.아마 밤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나무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차 지붕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하지만 차 주위에는 눈 대신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차 문 옆에는 창백하고도 단정한 모습의 청년이 서 있었다.밤새 잠을 못 잤거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듯 청년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실핏줄이 서 있었다.어둡고도 집착 어린 눈빛은 평소 TV에서 보던 밝고 청량한 모습과 정반대였다.유강후가 다가오자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버리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둘 다 검은 외투
유강후의 눈에서는 살기가 서서히 번져 나왔다. 그의 눈 안에 숨겨진 차가운 살의는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주혜성, 당신이 예전에 온다연을 도와줬다는 걸 감안해서 이렇게 최대한 공손하게 얘기해주는 거야. 아무리 남씨 가문이 당신을 보호해준다고 해도, 내가 당신 하나 처리 못 할 것 같아? 내가 정말 당신 하나 처리하려고 나선다면, 남씨 가문에서 당신 하나 지키려고 감히 나랑 맞서려고 할까? 가 지금 인내심이 남아 있을 때 원하는 만큼 부르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넌 더 이상 무대 위에서 굳이 춤추고 노래하지 않아도 돼. 그 돈 들고 경원을 떠나.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그 말에 주희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리더니 눈가에 미묘한 빛을 띠었다.“대표님은 제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층 더 냉랭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렇다면 당신 연예계 생활은 여기서 끝이야.”주희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딴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세요? 대표님, 아무리 대표님 권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온다연에게는 대표님이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과거가 있어요. 그 과거를 만들어준 장본인들도 다름 아닌 유씨 가문이라는 건 아세요? 어제 보니까 온다연 참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예쁜 여자를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안타깝게도…”혀를 끌끌 차던 주희가 도발적인 말투로 말했다.“온다연은 절대 대표님을 좋아할 수 없을 거예요! 대표님이 유씨 성을 가지고 있는 한, 유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한, 온다연은 절대 대표님을 좋아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그 말에 유강후의 심장이 심연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더니 이마에는 핏줄까지 불거졌다.그 순간, 유강후는 당장이라도 주혜성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곧바로 다시 차분하고도 권위적인 모습을 되찾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상관없어, 온다연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우린 결국 결혼할 사이니까. 여기 밤새 서 있어봤자 온다연은
유강후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춘 채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온다연의 곁을 지켰다.그는 어젯밤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주혜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유강후는 비서에게 창가에 의자를 갖다두게 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끌어안아 창가에 갖다 놓은 의자 위에 앉혔다.온다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유강후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그저 침묵을 지키며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둘 사이의 분위기는 마치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처럼 부드럽고도 애틋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쭉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잠에서 깬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낮은 소리로 말하는 장화연의 목소리를 들었다.“모든 연락을 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연 씨가 보기 전에 핫이슈들 새로 뜬 거 다 지워야죠.”유강후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 집사가 권이랑 같이 확실하게 처리해.”그 말에 온다연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뉴스를 찾아보았다. 어플 추천화면에는 벌써 수십 개의 뉴스가 떠 있었다.“라이징 스타 주혜성, 어젯밤 클럽에서 만취한 채…”“주혜성 음주운전, 교통사고”“톱스타 주혜성, 고속도로에서 추락, 생사는 불분명…”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진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렸다.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아저씨가 한 짓이죠?”그 말을 내뱉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표정에는 분노와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유강후의 시선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그녀의 발로 옮겨지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신발 안 신었어?”온다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쥔 채 언성을 높였다.“지금 묻잖아요, 아저씨가 한 짓이냐고요!”갑자기 커지는 목
깜짝 놀란 유강후는 몸을 일으켜 온다연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다연아!”온다연은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고통에 휩싸이면서도 유강후를 한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가까이 오지 마요, 지금 아저씨가 끔찍이도 싫으니까!”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온다연을 보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 유강후는 다급하게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다.당직의도 잔뜩 흥분한 듯한 온다연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다급하게 그녀에게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다.온다연은 빠르게 잠이 들었다.빠른 속도로 정밀검사를 마친 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태아에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경련이 온 것 같아요.”의사가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 이번엔 다행히 태아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산모가 몸이 너무 약하기도 하고 태아의 상태도 불안정합니다. 다른 산모들에 비해 태아의 발육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요. 이 이상의 자극은 최대한 피하셔야 할 겁니다.”더 말을 이으려던 의사는 유강후의 쓸쓸한 눈빛과 무거운 표정을 본 순간, 마음이 약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피도 눈물도 없는 재벌 후계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유강후는 전혀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온다연이라는 여자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게다가 간호사들은 종종 온다연이 잠든 틈을 타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추는 유강후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며 수군댔다. 온다연의 모습을 보는 유강후의 눈빛에는 항상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또 어떤 날에는 온다연을 꼭 안고 다니며 땅에 발을 붙이지도 못하게 했었다. 그런 날에는 아예 온다연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 밥까지 직접 떠먹여 주곤 했다.다만 유강후의 집착스럽고 강압적인 태도와 방식은 온다연의 숨통을 조여왔다.그리고 온다연을 대하는 그의 표정은 항상 차갑고도 단호했다. 주변 사람들도 온다연이 유강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할 수 있었
온다연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녀는 긴장한 듯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금방 잠에서 깬 그녀의 볼에는 잔머리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유강후는 그것을 정리해주기 위해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온다연은 유강후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찌검하려는 줄로 오해하고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뒤로 물렀다.“잠깐만요!”유강후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내가 정말 널 때릴 거라고 생각해?”온다연이 작게 대답했다.“저번에, 저 때렸잖아요.”온다연이 임혜린의 일로 유강후에게 대들었던 그 날, 유강후는 온다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엉덩이를 때렸다.지금 그 일을 떠올려보면 온다연은 여전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크고 무거운 유강후의 손이 온다연의 엉덩이 위로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찌릿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유강후도 온다연의 말에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던 그 날 일을 떠올렸다.그는 온다연의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이번에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혼날 줄 알아.”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 식탁으로 데려갔다.식사하던 도중, 손님이 병실로 찾아왔다.임혜린이 커다란 해바라기 꽃다발을 품에 안고 병실로 찾아왔다. 크고 아름다운 꽃다발은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더욱 환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함께 온 한이준은 무슨 일인지 안경을 끼고 있었다.맞춤형 고급 정장에 안경을 매치한 그는 마치 패션 화보 속의 모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지적인 안경은 한이준의 평소 방탕하던 이미지와 분위기를 눌러주는 대신 차분하고도 절제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눈 아래에 들어있는 멍을 발견했다. 안경 때문에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그녀는 무심코 두 번씩이나 시선을 돌려 한이준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강후는 기분이 상했는지
임혜린은 말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넌 이런 내가 창피하지 않아?”온다연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유일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그 때문에 임혜린의 과거 이야기는 온다연도 처음 듣게 되었다.온다연은 한때 임다연을 부러워했다. 그녀를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로 여기고 부유하진 않더라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사랑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온다연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임혜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돈 버는 게 뭐가 창피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실 난 말이야, 유 대표님께서 널 괴롭힌다고 생각하진 않아. 이준 씨한테서 들었는데 대표님이 예전에 너 괴롭히던 사람들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감옥으로 보냈대. 그중 몇 명은 정체 모를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고.”온다연이 임혜린의 말을 끊었다.“설마 너도 날 설득하려는 거야? 만약 내가 너한테, 나도 너 같은 대타에 불과하다고 얘기하면, 그래도 넌 날 설득할 수 있어?”임혜린의 눈빛이 쓸쓸해지더니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아직도 주희 못 잊은 거야?”온다연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럴 만도 해. 목숨 걸고 널 지켜준 사람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그녀는 잠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이 얘긴 이제 그만하자. 은행루 예약해뒀으니까 점심은 거기 가서 먹자.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로만 부탁해놨어. 얼른 가자. 예전에 우리 학교 다닐 때, 매일 은행루 앞을 지나가면서 외제 차들 줄지어 있는 거 보고 세상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인 줄 알았잖아. 그때 우리 돈 많이 벌면 꼭 한번 가보자고 했었던 거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