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그것은 그녀의 아들 강우림의 혈액 검사 결과였다.한참을 훑어봤지만 겉보기에는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일부러 보냈다는 것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다.그녀는 보고서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의사에게 보여주었다.의사는 데이터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몇몇 수치가 정상 범위를 약간 초과했으며 이는 폐렴 증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고만 설명했다.그 외에는 별다른 문제를 찾지 못했다.온다연은 이 정도로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민 끝에 아이의 이름과 개인 정보를 모두 가린 뒤, 사진을 찍어 유명한 육아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렸다.그리고 조금 더 많은 답변을 받을 수 있도록 소액의 광고를 걸었다.약 한 시간이 지나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초반에는 별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 없었다.그러다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이 아이 부모님 혈액형은 어떻게 되나요?]그 댓글을 본 온다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만약 온다연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B형이고 유강후는 O형이었다.그런데 아이의 혈액형은 AB형이었다!의학적 상식으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머릿속이 어지럽고 귓속이 웅웅거렸다.심장은 마치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곧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댓글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어머니가 B형이고 아버지가 O형이라면 아이가 AB형일 수 있나요?]댓글을 남기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아이는 조용히 쪽쪽이를 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이 아이의 손을 만지자 아이는 그녀의 엄지를 꼭 쥐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작고 맑은 눈망울은 너무나도 예뻐서 웃을 때면 별빛이 떨어진 듯 반짝였다.온다연은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가 아닐 수 있겠어?’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 아이는 내 아이야. 만약 이 아이
온다연은 그동안 한 번도 병원을 떠난 적이 없었다.비록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매일 아이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어느 순간 아이의 성장이 너무나도 빠른 날들이 있었다는 점을 말이다.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조여들었고 목구멍에서 다시 쓴맛과 피비린내가 올라왔다.이 병원은 유강후의 소유였다.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도 꾸밀 수 있는 곳이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온다연은 마음속으로 외쳤다.‘이 아이는 내 아이야. 그리고 그 사람의 아이이기도 해!’유강후가 아무리 차가운 사람일지라도 그녀와 이 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대할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가능성은 떠올리지 못했다.그 아이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는 끔찍한 진실을 말이다.한참을 화장실에서 멍하니 있다가 온다연은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왔다.밖에 서 있던 장화연은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과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고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주성원 선생님 불러올까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걸어갔다.그리고 아이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아이는 우유를 다 마시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작고 고운 얼굴이 평화롭고 사랑스러워 보였다.온다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이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졌다.익숙한 온기와 은은한 우유 냄새...그 모든 것은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했다.‘아니야, 이 아이는 내 아이야!’그녀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가.”잠결에 아이는 손을 움직이며 온다연의 옷자락을 잡았다.그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뒤이어 그녀는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침대 옆에 천천히 앉았다.장화연은 온다연의 이상한 모습을 눈치채고 조심스레 말했다.“그래도 주성원 선생님을 부르는 게 좋
장화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도련님은 요즘 정말로 일이 많습니다.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에요. 사모님...”그때, 온다연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집사님, 집사님이 만들어주시는 해산물 죽이 먹고 싶어요. 지금 가서 만들어서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그러자 장화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도련님은 며칠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병실을 나섰다.장화연이 떠난 후, 온다연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정아 씨, 부탁할 게 있어요.]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무슨 일인데요?]온다연은 잠든 아이를 돌아보았다.작고 귀여운 얼굴로 평온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눈을 감고 낮게 속삭였다.“아가, 너 정말 엄마의 아이가 맞니?”물론 아기는 대답할 수 없었다.잠시 침묵한 후,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고 자신의 머리카락도 뽑아 휴지에 싸서 보관했다.그리고 다시 임정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DNA 샘플 비교 좀 해줘요. 믿을 만한 기관으로 부탁해요.]그러자 임정아는 의아한 듯 답을 보냈다.[갑자기 무슨 DNA 비교예요? 설마 다연 씨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거예요?]온다연은 간결하게 답했다.[부탁할게요.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알겠어요. 지금 어디예요? 내가 사람을 보낼까요, 아니면 다연 씨가 직접 가져올래요?][밖으로 나가기 좀 어려워요. 사람이 오면 좋겠어요. 지금 인평 병원에 있어요.][마침 내 비서가 그 근처에 있어요. 병원 밖으로 전달할 수 있겠어요?][고마워요.]온다연은 전화를 끊고 머리카락을 휴지로 싼 뒤 작은 약통에 넣었다.그리고 병실을 나가 어린 간호사를 찾아냈다.그녀는 몇만 원의 현금을 건네며 약통을 주고 말했다.“여기에는 특효 화상약이 들어 있어요. 병원 밖에 있는 제 친구에게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간호사는 온다연의 신분을 알아채고 돈을 받으
“사모님, 결혼반지는 절대 빼지 않는 게 좋습니다. 셋째 도련님께서 아시면 화내실 거예요.”장화연의 말에 온다연은 차갑게 대답했다.“손이 불편해서 그래요. 아이를 돌보는데 반지가 걸리적거리니 며칠 동안 빼둘게요. 나중에 집사님이 가져가서 보관해 주세요.”이 정도로 말하니 장화연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음식 상자에서 음식을 꺼내 식탁에 차렸고 온다연은 겨우 몇 숟가락을 뜨다 결국 더는 먹지 않고 장화연에게 다시 치우라고 했다.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 즈음, 드디어 임정아에게서 소식이 왔다.온다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열어 확인했다.임정아는 아무 말도 없이 DNA 검사 결과지를 사진으로 보냈다.그리고 결과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감정 양측은 친자 관계가 아님.]딱!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져 나가는 듯하더니 온다연은 갑작스레 기침을 하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아이를 재우고 있던 장화연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하지만 온다연은 그녀를 힘껏 밀쳐냈다.“꺼져요!”평소 순한 성격의 그녀가 이렇게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은 처음이었다.장화연은 그녀가 무언가를 알았음을 눈치챘지만 여전히 아이와 관련된 문제일 거라 생각하며 달래려 했다.“셋째 도련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으십니다...”“닥쳐요!”온다연은 입가의 피를 거칠게 닦아내고 돌아서서 장화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집사님이랑 아저씨가 한통속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내가 이제 집사님 말을 믿을 것 같아요?”이 말에 장화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사모님, 셋째 도련님께서 이렇게 하신 건 사모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예요.”‘보호? 날 보호하기 위해 아이를 내 곁에서 빼앗아 다른 여자에게 넘겼다는 거야?’그녀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며 떠올렸다.조금 전, 낯선 번호로 온 또 다른 메시지에는 어떤 여자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얼마 전에 아이가 생겼다는 내용을 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아기.그녀가 그토록 사랑해온 아기였다.‘내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쉽게 놓을 수 없는 거지?’거의 무의식적으로 온다연은 돌아서서 아이를 안았다.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고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 순간, 장화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밖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직 아픈 상태라 병원에 있는 게 최선입니다.”온다연은 아이를 꼭 안은 채로 감정 없는 얼굴로 장화연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내 아이예요. 어디로 데려가든 내 마음이라고요. 집사님이 관여할 권리는 없습니다.”이 말을 끝으로 장화연을 비켜지나 온다연은 병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더 이상 이 병원, 그리고 유강후가 드나들던 이곳에서 단 한 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장화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직감적으로 온다연이 뭔가를 알아챘다고 느꼈지만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지금 유강후는 이곳에 올 수 없는 상황이니 그녀는 온다연을 진정시키고 이곳에 머물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아이의 상태가 매우 안 좋은데 이 상태로 밖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온다연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묶어두겠다는 겁니까? 내 발걸음까지 막으려고요?”장화연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가고 싶으시다면 제가 동행하겠습니다.”온다연은 병실 안을 둘러보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꽃병을 발견했다.“좋아요. 그럼 아기용품 챙겨서 같이 갑시다.”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던 순간, 장화연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쳐졌다.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진 그녀는 쓰러지기 전에 온다연의 차가운 눈빛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그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오히려 깊은 혐오만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사모님, 어떻게...”이 말을 끝으로 장화연은 바닥에 쓰러졌다.온다연은 손에 든 꽃병을 내려놓고 쓰러진 장화연을
“닥쳐!”온다연은 보안 요원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줄 알아? 경고하는데 만약 날 따라오거나 유강후에게 전화라도 건다면 내가 언젠가는 다 알아낼 거야. 1년, 2년, 3년이 지나도 기회만 생기면 당신들 평생 편히 살 생각은 접어.”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경호원의 옷깃을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경호원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온다연이 병원 밖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떠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빨리 대표님한테 연락해!”“따라가자! 놓치면 우리 목숨도 끝이야!”택시 안에서 온다연은 아이를 품에 안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원에서 계속 울던 아이는 지금은 조용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고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이 순간, 온다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신경 하나하나를 파고들었다.‘내 아이는 그 여자 곁에 있는 걸까? 그럼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지? 그리고 아이를 잃은 그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낮게 흐느꼈다.“정말 너무 잔인해. 어머니와 아이를 갈라놓다니. 너는 구월이가 아니야. 구월이처럼 혼자 살아남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아. 그 사람이 너를 버리면 너는 굶어 죽을 거야. 네가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난 너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그때, 차창 밖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광장을 바라보았다.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주희의 독점 인터뷰가 재생되고 있었다.소년은 은빛 머리카락을 물들인 채,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마치 이차원 세계에서 튀어나온 요정 왕자 같았다.그는 품에 하얀 고양이를 안고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진행자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온다연은 그의 눈가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눈물점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어쩌면 저렇게 주한이랑 닮아갈 수 있을까? 혹시
“누나!”“진짜 누나예요? 누나!”“누나, 여기서 누나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뒤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온다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떼어냈다.“주희야, 놔.”그러나 주희는 온다연을 꽉 끌어안으며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를 탐하듯 들이마셨다.“유강후, 그 인간 완전히 미쳤어요. 나더러 못 만나게 하고 누나가 전화도 받지 않게 했어요.”온다연은 그를 힘껏 밀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가까이 오지 마.”주희는 모자를 벗어 던지며 눈에 서린 억울함을 드러냈다.“누나, 왜 말투가 그 사람 같아졌어요? 너무 딱딱해요.”온다연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이의 이불을 단단히 여미고 나직하게 말했다.“딱히 할 말 없으면 나가. 너랑 이야기할 거 없어.”어두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주희는 금세 맑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누나, 이 아이가 누나 아이예요?”그는 아이의 뽀얀 볼을 쿡 찌르며 말했다.“정말 귀엽네요. 근데 누나도 안 닮았고 유강후도 안 닮았네요!”그러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화를 내듯 외쳤다.“네가 알 바 아니야. 당장 나가!”갑작스러운 고함에 주희는 당황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눈빛에는 짙은 우울함이 어린 채 말이다.그가 기억하는 온다연은 언제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말투도 늘 상냥했는데 유강후가 나타난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이 모든 게 유강후 때문이야!’“나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주희는 눈물을 삼켰고 온다연은 문 쪽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나가. 너 보고 싶지 않으니까.”이 말에 마주희는 서글프게 울먹였다.“누나는 왜 날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형만큼 되지 못해서?”마음이 어지럽고 속이 타들어 가 온다연은 더는 말을 잇고 싶지 않았다.하여 그저 문 쪽을 가리킨 채 차갑게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주희는 작게 중얼거렸다.“누나, 우리 살던 집 철거 안 됐어요. 며칠 전 공사팀이
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주희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주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에서 넌 그저 주한의 동생일 뿐이야.”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씩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넌 영원히 네 형을 따라잡을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너를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알겠어?”주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주희는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그녀를 따라나섰다.그렇게 둘은 한 사람은 앞서고 다른 한 사람은 뒤따르며 걷고 있었다.익숙한 오래된 거리, 공기 중에는 은은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퍼져 있었다.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변해버렸고 지나간 일들은 되돌릴 수 없었다.익숙한 구멍가게 앞을 지나던 주희는 그 안을 바라보며 문득 말했다.“누나, 예전에...”온다연은 차갑게 대답했다.“너도 알다시피 그건 예전일 뿐이야. 이제 그만 가자. 아이가 오래 나와 있을 순 없거든.”바람이 불어 낙엽들을 날려 보냈고 그와 함께 기억 속의 사람들과 그림자도 사라져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옛날 거리에 도착했다.예상대로 거리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길 양쪽에는 붉은 등이 걸려 있었다.예전 명절 때처럼 아름답고도 낡아 보였다.주희는 문을 열며 말했다.“전에 전부 철거한다고 했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철거를 안 하기로 했대요. 나로선 잘된 일이지만요.”“원래 계약대로라면 이렇게까지 바뀌지 않았겠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개발업체가 꽤 배경이 있는 곳이래요. 아주 손쉽게 뭐든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아요.”나무문을 열자 익숙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온다연은 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주희는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온다연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곧 주희가 생필품을 사러 나간 틈을 타 그녀는 주한의 사진 두 장을 챙겨 나가려 했다.그러나 문을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들어온 사람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