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줘서 온다연을 단단히 업은 채 작게 속삭였다.“전에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아프잖아요. 유나 씨, 우리 다시 시작해요.”온다연은 점점 더 피곤해져 유강후의 등에 업힌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우린 같이 있은 적이 없는데 왜 다시 시작하자는 거예요? 빨리 알려줘요, 우리 전에 대체 무슨 사이였어요...”유강후는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리 둘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어요.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죠. 그다지 좋은 일들은 아니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은 거예요.”온다연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온다연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유강후는 다른 한 손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너무나도 부드러웠다.온다연은 그렇게 유강후의 등에서 잠들어버렸다.유강후는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쇼윈도에 비친 자신과 온다연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온다연은 조용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그 순간, 유강후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유강후는 3년 전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에도 온다연은 지금처럼 얌전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잠들었었다. 유강후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고요하고 편안하게 둘이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하지만 이후에 유강후는 그 화면이 생각나는 많은 밤낮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그리고 오늘, 그때 그 화면이 또다시 재생되었다. 이는 어쩌면 길고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유강후는 유리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속삭였다.“다연아, 넌 계속 우리가 예전에 무슨 사이였는지를 궁금해했었지? 지금 알려줄게, 넌 내 아내야.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따뜻하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저 바다도 눈물겨운 사랑의 맹세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그의 절절한 약속을 바닷바람에 실어 흩날려 보낸다.
경호원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틈을 타 유강후가 이어서 말했다.“이번 일은 다들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입는 건 당신들이니까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곧장 병실로 올라갔다.온다연은 점심때쯤에야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온다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안심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이었다.안심의 눈가가 빨갛게 부은 걸 발견한 온다연은 그녀가 울었을까 봐 놀란 마음에 다급히 일어나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안심을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젯밤 윤희가 사고가 났어. 윤희가 새 차를 몰고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 그리고 윤희를 찾았을 땐, 이미 몸이 차게 굳은 후였지. 근데 윤희 몸에 구타와 모욕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안심은 목이 멨다.“얘가 대체 누굴 건드렸길래 이렇게 처참하게 가게 됐는지 모르겠어.”안윤희는 안씨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안씨 가문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조용하고 집안일에 그다지 능하지 않았기에 안윤희는 어릴 때부터 안심의 손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비록 안윤희가 후에 많이 엇나갔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키운 아이가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만큼은 안심을 가슴 아프게 했다.온다연도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도 안심이 더욱 걱정됐다.온다연이 안심을 오랫동안 위로한 끝에 안심은 겨우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안심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사실 나도 윤희가 많이 변한 건 알고 있었어. 오늘 아침 정보를 입수했는데 걔가 글쎄 테러조직의 작은 두목이었다는 거야. 그 과정에서 악행도 적지 않게 저질렀고 말이야. 그래서 예측하건대 원수에게 죽임을 당해 그런 지경까지 이른 것 같아.”“안씨 가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두고 다들 추측이 난무하는 중이야. 어떤 사람은 진씨 가문에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윤희가 잔혹하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대체 다 뭐야? 드디어 미디어가 미친 건가?’온다연이 핸드폰을 채 내려놓기도 전에 안심이 들어왔다.“연시온 씨가 지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를 만나보고 싶대.”온다연은 안심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물었다.“엄마, 이것 좀 봐요. 미디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니까요? 못하는 말이 없어요.”안심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그들은 미치지 않았어, 그건 다 사실이야. 이 두 헤드라인은 모두 그쪽 작업실에서 직접 내보낸 거야. 연시온 씨께서 보내온 프러포즈 선물이 아직 로비에 있어.”온다연은 눈썹을 찌푸렸다.“그 사람은 지금 찾아와서 어쩔 작정이래요? 전 그 사람과 고작 두 번 본 게 다예요, 거의 모르는 사이라도 봐도 무방하다고요. 동국 왕실의 행실이 원래 이렇게 가벼워졌나요?”안심이 대답했다.“그분께서는 진씨 가문을 도와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 방금 동국 왕실의 왕비께서 직접 나한테 전화를 주셨는데 이번 일은 왕자 한 사람뿐만 아니라 왕실의 뜻이기도 하대. 그러니까...”한숨을 쉬는 안심의 눈빛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지금 이걸 토론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 아버지께서 아직 회사에 계시니 잠시 후에 연시온 씨와 함께 회사로 가서 대진 그룹의 일부터 해결하고 말하자꾸나.”“단지 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커졌으니 M국에도 분명 소식이 전해졌을 테고 지훈 씨가 참지 못하고 바로 찾아올까 봐 그게 걱정이야. 지금 지훈 씨와 의논 중인 프로젝트는 자그마치 수백억 달러야. 지훈 씨와 대박 그룹의 전 재산을 거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근데 만약 지금 돌아오면 모든 건 다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게 돼. 그러니까 네가 지훈 씨를 잘 달래서 이성을 유지하게 해야 해, 절대 홧김에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온다연이 대답했다.“제가 잘 말해볼게요. 엄마는 시름 놓으세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옷을 갈아입고 용모를 단정히 하고는 자신의 노트북을 챙기고 안심과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이미 온 오전을 기다린 연시온은
따지자면 온다연의 말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온다연은 더는 연시온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기에 즉시 집사를 불러 차에 올라탔다.본부에 도착했을 때 대진 그룹은 경비가 더할 나위 없이 삼엄했다. 수백 명의 경호원이 입구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고 입구로부터 100미터 떨어진 곳에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온다연의 차량이 도착했을 때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적지 않은 기자들이 몰려오려다가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그들의 목표는 오직 연시온과 온다연이었다.“왕자님, 동국 왕실과 대진 그룹이 정말 혼인 관계를 맺을 계획입니까?”“소문에 의하면 왕자님과 진유나 씨는 서로 첫눈에 반하셨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왕자님께서는 지금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와 라이벌 관계입니까?”“진유나 씨를 어떻게 쟁탈하려는 계획이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공평하게 경쟁하실 겁니까?”“들리는 바에 의하면 왕실에서 대량의 예물을 보냈다고 하던데, 그중에 미래의 왕비에게 줄 바다 진주도 있습니까?”“이분은 안심 씨와 똑 닮은 거로 보아 진씨 가문 장녀로 보이는데 사촌 언니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약혼하시는 게 과연 옳은 선택입니까?”“진유나 씨, 안윤희 씨의 죽음이 진씨 가문과 안씨 가문의 불화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정신없이 터지는 플래시는 온다연을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최근 몇 년간 진씨 가문에서도 적지 않은 일들이 있어 이런 상황을 많이 겪은 터라 온다연은 그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온다연은 그저 카메라들을 향해 작게 웃어 보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연시온은 온다연과 달리 몇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진유나 씨처럼 아름다운 숙녀분이 청혼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저도 진유나 씨에게 마음을 뺏긴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동국 왕실과 대진 그룹이 혼인 관계를 맺을지는 잠시 비밀이지만 동국 왕실과 대진 그룹의 관계는 여전히 좋습니다. 대진 그룹의 일은 곧 동국
기자들은 몇 초간 넋이 나갔다가 뒤늦게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다.“세상에, 부통령 이경진이 웬 말이야.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여긴 무슨 일이지?”“이경진과 옆에 저 사람은 꽤 깊은 친분이 있어 보여.”“저 사람 설마 오아시스 그룹 대표야? 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부통령과 나란히 동행할 수 있지?”“오아시스 그룹 대표는 경제 실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인맥도 어마어마한가 봐!”“이번에 대진 그룹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며칠 전의 스캔들을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가도 크게 상승할 수 있어!”“보아하니 진씨 가문에서 이번에 대어를 낚겠군. 누가 뭐라 해도 역시 진유나는 안심의 딸이었던 거야. 안심도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미녀였잖아!”...그때, 이경진이 웃으며 언론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말했다.“여러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저의 사적인 일정이기 때문에 아무런 취재도 받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기자가 웃으며 물었다.“부통령님께서는 오아시스 그룹 대표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러 오셨습니까?”이경진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오아시스 그룹 대표는 저와 형제처럼 절친한 사이니까요!”말을 마친 이경진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유강후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간단한 몇 마디였지만 기자들은 토론에 더욱 열을 올렸다.“오아시스 그룹 대표는 어떤 사람이길래 부통령님과 형제처럼 절친한 사이인 거야?”“오아시스 그룹 대표 말이야, 너무 낯익어!”“생각났어, 예전에 타임스지에서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 그룹 대표였어. 근데 어느새 오아시스 그룹 대표가 된 거지?”“잘못 봤겠지, 미래 그룹은 오아시스 그룹보다 훨씬 규모가 크단 말이야. 미래 그룹은 북아메리카 3대 재벌 중의 하나인 강씨 가문이 꽉 잡은 산업인데 어떻게 오아시스 그룹이랑 연관이 있을 수 있어?”“불가능할 것도 없지! 오아시스 그룹 대표도 강 씨라던데!”“그럴 리가 없어, 미래
“하지만 고작 이런 방법으로 저한테 덤빌 생각을 했다면 크나큰 오산이에요. 제가 지금 인내심이 있을 때 물러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연시온 씨가 누나네 집에서 딸을 키운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동국 왕실의 체면은 더할 나위 없이 짓밟히겠죠!”연시온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강 대표가 스캔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의외네요.”유강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저랑 진유나 씨 사이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맞은편 바다가 연시온 씨가 이번 생을 마무리할 곳이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연시온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안윤희 씨처럼요? 동남아시아까지 손을 뻗을 생각을 다 하고, 강 대표도 참 대단해요. 안윤희 씨 죽음 말이에요, 강 대표가 그런 거죠?”유강후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동요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연시온 씨, 부디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곧장 로비로 들어갔다.대진 그룹은 6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제일 꼭대기가 본부 회의실이었다.장장 네 시간에 걸친 회의를 마치고 나서야 대진 그룹의 최근의 동요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그리고 대진 그룹은 오아시스 그룹과 대대적으로 합작할 것이라는 기사를 대외적으로 내보냈다.이는 외부에서 봤을 때 진씨 가문은 결국 오아시스 그룹과 혼인 관계를 맺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또한 동국 왕실이 이번 경쟁에서 패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회의가 끝난 뒤에도 진수현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진수현은 단호하게 유강후에게 경고했다.“이런 방법으로 대진 그룹을 살렸으니 제가 저희 딸을 강 대표님에게 넘겨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 딸은 절대 이번 혼인 관계의 희생양이 될 수 없어요.”안심은 진수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만 해요, 당신 사흘이나 못 잤잖아요. 화 그만 내고 나랑 같이 돌아가서 쉬어요, 다른 일은 내일 다시 말하면 되잖아요.”진수현은
몇몇 삼촌뻘 원로들은 온다연에게 오아시스 그룹 대표를 좀 소개해달라며 유강후 더러 식사 자리를 마련하라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이 사람들은 진수현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비서들로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피땀을 흘려가며 대진 그룹을 성장시켰기에 온다연은 그저 그들의 말에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이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온다연이 유강후와의 일에 대해서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먼저 원로들과 저녁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식사 장소는 대진 그룹의 맞은편에 있는 호텔이었다.식사 자리에서 유강후가 원로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유강후는 오아시스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허세를 부리지도, 어린 나이라고 주눅이 들지도 않는 딱 적당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수년간 이 바닥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한 노련한 경력자들도 유강후를 감히 막 대하진 못했다.진중한 사람은 자연히 눈치라는 것을 챙길 줄 알지만 어린 사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 같았다.몇몇 고위간부들은 유강후의 초대를 받고 자신들의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하나는 온다연을 만남으로써 미래의 진씨 가문 후계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오아시스 인터내셔널에 방문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다만 온다연과 유강후가 워낙에 시선을 끄는 타입인지라 뺏겨서는 안 될 마음을 뺏긴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사람들의 마음을 유난히 잘 꿰뚫어 보았고 술자리가 후반으로 넘어갈 때쯤 태도가 변해 사람들은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서둘러 식사 자리를 끝냈다.다음 날 대진 그룹은 또 기자회견을 열어 온다연이 미래의 대진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렸다.저녁에는 당연하게도 연회가 열렸다.유강후는 어제 봤던 고위간부들의 자녀들과 또 마주치게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유강후가 아무리 온다연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고 한들 진씨 가문의 호텔에서 열린 연회였기에 온다연은 연회의 절반도 채 버티지
온다연의 눈은 흐릿했고 볼은 비정상적으로 빨갰다.마신 거라곤 과일주 두 잔이 전부였는데 이렇게까지 불편한 게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머리가 어지럽고 몸은 잔뜩 달아올랐으며 그 와중에 어딘가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머릿속에는 꿈에서 봤던 야한 장면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나타났다.게다가 유강후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도 향기로웠다.온다연은 계속해서 맡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온다연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본능에 따를 뿐이었다.온다연은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윽고 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기댄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강 대표님 진짜 향기롭네요...”그리고는 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의 두 손은 유강후의 셔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탄탄한 복근 위를 이리저리 누볐다.“이런 느낌이었군요...”“막 딱딱하진 않네요. 전 이 위에서 빨래라도 빨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네요...”어느새 온다연의 자유로운 손은 유강후의 허리에 다다랐고 당장이라도 바지를 내려버릴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숨을 들이쉬고는 제멋대로인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몸 좋은 남자들 영상을 얼마나 본 거예요?”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비비며 여전히 이곳저곳을 만지며 대답했다.“그,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닌데요. 그냥 가끔 좋아요나 누르고...”역시 솔직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얇은 허리를 자기 몸쪽으로 끌어다 딱 붙이고는 속삭였다.“그럼 다른 사람의 복근을 만져본 적은 있어요?”유강후는 말하면서 온다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만약 온다연이 염지훈의 것을 만져봤다고 하면 오늘 밤 이 허리를 놔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온다연은 그 순간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몸속의 끓어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짐을 느꼈다.온다연은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편안해지는지를 알 수 없었다.그런 와중에 유강후의 몸은 차가웠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