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든 꽃의 계절

멍든 꽃의 계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6
By:  소담결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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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하늘은 버려졌다는 상처로 낮은 자존감 속에 살아간다. 첫사랑 재현과의 연애는 집착과 폭력으로 변질되고, 벗어나려는 순간 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과거의 고통을 모른 채 다시 시작하게 된 하늘 앞에, 진심으로 그녀를 지키려는 동혁이 다가온다. 잃어버린 기억과 왜곡된 사랑 사이에서, 하늘은 스스로의 삶과 진짜 사랑을 선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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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프롤로그.

프롤로그.

‘짝—!’

고개가 돌아가는 속도보다 비릿한 통증이 먼저 뇌를 강타했다.

정점을 찍은 분노가 손바닥을 타고 재현의 뺨에 무겁게 박혔다.

고요하다 못해 서늘했던 실내에 파열음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흩어졌다.

“하늘아!”

뒤늦게 달려온 바다의 외침이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지만, 하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재현의 얼굴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생경할 정도로 투명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놀아날 줄 알았어?”

하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얼음송곳처럼 예리하게 재현의 고막을 뚫고 들어갔다.

재현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잡으며 하늘을 응시했다.

그가 아는 유하늘이 아니었다.

손끝만 스쳐도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그림자 뒤로 숨던 그 가련한 ‘내 여자’가 아니었다.

“누…나?”

“누나라고 부르지 마. 아니, 내 이름조차 네 입에 올리지 마. 그 불결한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 소름 끼치게 싫으니까.”

재현은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자신이 견고하게 지어 올린 새장이, 단 한 번의 손짓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이 울타리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오만한 믿음이 발밑에서 산산조각 났다.

“네가 날 조종하려 들 때마다 눈치는 챘어. 그래도 그게 네 방식의 사랑이라 믿고 싶어서, 바보같이 널 믿어줬던 거야. 아니, 당해줬던 거지. 그랬더니 내가 여전히 네 손바닥 위에서 노는 광대로 보이니? 7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온 내가, 아직도 네 헛소리에 속아 넘어갈 그 어린 여자로 보여?”

하늘은 한 걸음 다가섰다.

재현이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뒤에는 차가운 벽뿐이었다.

공포의 주체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재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비굴한 눈빛은 찰나에 휘발되었고, 그 자리에 서늘한 본성이 올라왔다.

그는 붉게 부어오른 뺨을 혀로 밀어 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 많이 컸네, 유하늘.”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태도를 바꾼 재현의 눈에는 더 이상 애정도, 미련도 없었다.

오직 살기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는데. 7년 전처럼 울고불고 매달려야 내가 좀 봐주지 않겠어?”

재현이 서서히 팔을 뻗어 하늘의 턱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하늘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곁에 서 있던 동혁이 그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새장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수고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하늘을 전율하게 했다.

하늘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재현의 가슴팍을 세차게 밀쳐냈다.

제법 힘이 실린 일격에 재현이 중심을 잃고 현관 밖 복도로 밀려났다.

철컥,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나기 직전, 하늘은 문틈 사이로 차갑게 얼어붙은 일갈을 내뱉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 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땐 바로 경찰서로 처넣을 거니까.”

재현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고 믿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지나치게 서늘했다.

하늘은 그런 재현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내가 많이 큰 게 아니라, 내가 원래 너보다 컸어. 이 장유유서도 모르는 무식한 자식아.”

누나라는 지위를 이용해 가스라이팅을 일삼던 재현에게 던지는, 가장 원색적이고도 통쾌한 일침이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같이 쌓아 올린 공포의 벽이 무색할 만큼 조소 섞인 말투였다.

‘쾅—!’

문이 닫혔다.

두꺼운 문 너머로 재현의 비릿한 체취가 차단되자, 하늘은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등 뒤로 차가운 문을 기대고 선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거대한 숙제를 끝낸 뒤에 찾아오는 기분 좋은 전율이었다.

거실에 서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바다는 굳어버린 채 동생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남자의 그림자만 봐도 숨을 헐떡이던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아… 너 괜찮아?”

바다의 떨리는 물음에 하늘은 깊은숨을 한 번 내뱉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더 이상 패배자의 흔적이 없었다.

“응, 오빠. 이제 진짜 괜찮아.”

실내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는 현관문 너머 복도에 홀로 남겨진 재현의 고막을 잔인하게 긁어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세상의 전부였어야 할 여자가, 이제는 다른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늘 씨.”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구동혁의 음성은 낮고 단단했다.

그 안에는 재현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상대를 온전히 존중하는 자의 깊은 염려가 담겨 있었다.

하늘은 그 다정한 부름에 화답하듯, 떨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저한텐 오빠도 있고, 그리고… 동혁 씨도 있잖아요.”

‘동혁 씨.’

재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일렁였다.

다정한 호칭이, 생면부지의 남자에게는 저토록 쉽게 건네지고 있었다.

재현이 공들여 쌓아온 고립의 성벽이 타인들의 온기에 의해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나는 왜 빼?”

이때 시은이 서운하다는 듯 장난스레 끼어들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이, 당연히 언니도 있지. 언닌 이미 내 가족인걸.”

하늘의 웃음 섞인 대꾸에 이어 실내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 평화로운 소음들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재현에게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박혔다.

재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황과 수치심으로 얼룩졌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비릿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부여한 공포 없이는 숨도 못 쉬어야 할 존재가, 감히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가족’과 ‘연인’을 논하고 있었다.

재현은 문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쥐려다 멈췄다.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그의 심장 밑바닥에서는 검은 타르 같은 증오가 차올랐다.

‘가족? 동혁 씨? 웃기지 마. 네가 돌아갈 곳은 결국 내 발밑이야, 유하늘.’

재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았다.

센서 등이 꺼진 어두운 복도,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비참함이 분노로 치환된 자리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독버섯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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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sunny
sunny
폭력적인 남자는 평생 못살 줘 어차피 결혼이 아닌 현재 모습인 커플들 얘기인거 같아요. 보호해주고 위로해 주는 남자가 좋지만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데이트 폭력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네요 소유욕.. 소설이 현실적이서 좋았어요. 요즘 원나잇 쌍둥이를 낳아 백인 흑인을 낳았단 있을수 없는 가능성이 현실인데 새장이라 .. 나만 볼수 있다?그래서 결혼안하나? 한국 정서가 느껴집니다 멍이 푸른 꽃. . 그 제목이 인상 깊어 볼수밖에 없는 소설이네요.
2026-04-22 06: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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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Chapters
1화. 하늘과 바다
1화. 하늘과 바다“아휴, 저 어린것들은 어쩌나. 쯧쯧.”“애들 생각해서라도 좀 더 견뎌보지. 에휴, 독하기도 해라.”익숙한 동네 어귀, 평조차 덧씌워진 한낮의 따가운 햇살 아래로 눅눅한 수군거림이 부유했다.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내민 이웃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불쾌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연민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그러나 열세 살 바다는 안다.저 가벼운 혀 놀림들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흩어질 찰나의 소음일 뿐이라는 것을.저들은 곧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가, 이 비극을 안줏거리 삼아 씹어댈 것이다.저 선의(善意)는 딱 그만큼의 무책임한 안도였다.하늘이 바다의 셔츠 끝단이 찢어질 듯 움켜쥔 채 울음을 토해냈다.어제까지만 해도 부모와 함께 드나들던 현관문이 열리고, 하얀 천에 덮인 두 구의 시신이 차가운 들것에 실려 나왔다.열 살 아이는 제 세계가 송두리째 구급차의 뒷문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꺼이꺼이 숨을 몰아쉬었다.저 아이는 무엇을 짐작하며 저토록 서럽게 울까.고작 초등학교 6학년인 자신조차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데.사실 바다는 그날 밤,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부모의 낮은 목소리를 기억한다.절망에 젖은 어른들의 흐느낌과 약병이 부딪히는 소리.바다는 이미 그날 밤에 울음을 다 소진해 버렸다.이제 남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자신들을 남겨두고 저 하얀 천 너머로 도망쳐버린 무책임한 어른들을 향한 서늘한 원망뿐이었다.구급차의 뒷문이 무겁게 닫히고, 빨간 경광등이 한낮의 골목을 기괴하게 물들였다.제 손등 위로 떨어지는 하늘의 눈물은 뜨거웠으나, 바다의 심장은 그만큼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바다는 울음 섞인 하늘의 어깨를 감싸안는 대신, 이웃들의 수군거림을 향해, 그리고 부모를 싣고 떠나는 구급차를 향해 차갑게 굳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이제 이 세상에 우리를 지켜줄 울타리는 없었다. 오직 서로뿐이었다.***“미안하다. 바다야, 하늘아. 정말 미안해….”장례식장을 지키던 고모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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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낌새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속에서, 하늘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서둘러 재현의 팔을 가볍게 밀어내며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재현아, 오늘은 이만 가봐.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정말 즐거웠어.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어. 그래, 누나.”재현은 순식간에 다시 소년의 미소를 가면처럼 갈아 끼웠다.그는 바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하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연락해. 오빠랑 얘기하느라 늦게 하면 나 화낼지도 몰라. 알았지?”달콤한 속삭임이었으나 분명한 경고였다.하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재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차에 올라탔다.재현의 차가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바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멀어지는 붉은 미등을 응시하는 바다의 표정은 예상대로 굳어 있었고, 그 옆에서 하늘은 죄지은 사람처럼 제 손목만 만지작거렸다.바다의 시선이 잠시 하늘의 손목에 머물렀다.붉게 번진 자국.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다는 추궁하지 않았다.방금 목격한 낯선 사내의 무례함이나, 동생의 손목에 남은 기괴한 흔적에 입을 여는 대신 그는 지독한 인내를 선택했다.계단을 오르려던 하늘의 뒷등 위로 바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하늘아.”멈춰 선 하늘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돌아보는 얼굴에는 당혹감과 미안함, 그리고 정체 모를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정수리 위에서 부서져 바다의 눈가를 깊은 음영으로 덮었다.그는 동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며 툭 던지듯 말했다.“다치면 말해라.”질문도 훈계도 아니었다.어떤 일이 있어도 네 편에 서겠다는 투박하지만, 벼려진 칼날 같은 선언이었다.“…응?”“혼자 앓지 말고. 네 잘못으로 다친 거 아니니까, 그냥 말하라고.”바다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서늘한 밤공기와 무거운 안심만이 남았다.하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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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위태로운 거짓
7화. 위태로운 거짓저녁 식탁 위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된장찌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하지만 하늘은 숟가락을 쥔 손끝이 자꾸만 겉도는 것을 느꼈다.맞은편에 앉은 바다는 유독 말이 없었다.낡은 식탁 위로 서걱거리는 수저 소리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학원은 잘 다녀왔어?”바다가 무심하게 던진 질문에 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평소라면 "응, 오늘도 실습하느라 힘들었어."라고 대답했을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질문이 살갗을 파고드는 예리한 취조처럼 느껴졌다.재현과 보낸 달콤했던 오후, 입안을 맴돌던 설탕 가득한 조각 케이크의 맛,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며 속삭이던 그 해맑은 눈동자.하늘은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만약 바다가 오늘 일을 알게 된다면, 재현을 다시는 못 보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응……. 평소랑 똑같았어.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 다들 예민하더라고.”태어나 처음 해보는 정교한 거짓말이었다.하늘은 바다의 눈을 피하며 찌개 속 두부만 연신 으깨어댔다.바다의 숟가락질이 잠시 멈췄다.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시은이 보내준 메시지 속, 카페 창가에 앉아 남자에게 입을 맞추듯 케이크를 받아먹던 하늘의 모습과 눈앞에서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동생의 얼굴이 겹쳤다.“그래? 별일 없었고?”“응. 별일 없었어.”하늘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처음 받아본 그 강렬한 애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오빠를 속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였다.재현이 그랬다.우리 둘만의 비밀이 많아질수록 사랑은 더 견고해지는 거라고.바다는 으깨진 두부처럼 처참하게 무너지는 신뢰의 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밥을 밀어 넣었다.동생의 입가엔 아직 재현이 닦아주지 못한 미세한 설탕 가루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아 속이 뒤틀렸다.“하늘아.”“응, 오빠.”“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는 네 편이야. 알지?”그건 바다가 건네는 마지막 경고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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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몰래 넘어버린 선
8화. 몰래 넘어버린 선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오로지 하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낯선 호텔 침구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만큼 방 안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누나 먼저 씻을래?”재현이 먼저 정적을 깼다.일상적인 제안이었지만 하늘은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응? 아, 아니. 나 집에서 이미 씻고 나왔어.”“아, 그래? 나도 씻고 오긴 했는데. 그럼, 우리 같이 누울까?”재현의 말에 하늘의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오빠 몰래 현관문을 나설 때만 해도 그저 재현이 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앞섰다.하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 밀폐된 공간이 주는 압박감은 하늘의 이성을 뒤늦게 깨우고 있었다.“누나, 너무 굳어 있는 거 아니야? 안 잡아먹어.”재현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가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하늘의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재현은 하늘의 경직된 안색을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긴장 풀리게 술이라도 한잔할까?”“그, 그럴까?”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현은 로비로 전화를 걸어 익숙하게 룸서비스를 시켰다.와인 리스트를 읊는 목소리나 전화를 끊는 태도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그가 보여주는 모든 편안함이 하늘에게는 오히려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왔다.“저……. 재현아.”“응, 누나.”재현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하늘을 돌아보았다.“이런 데 자주 와? 네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여서. 어딜 가도 자연스럽고……. 꼭 와봤던 사람처럼.”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는 잠시 하늘을 응시하다가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앉았다.“하하, 누나. 혹시 질투하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 데 와봤을까 봐?”“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정말 그런 뜻은 아니었다.하지만 재현의 입에서 '다른 여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하늘의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렸다.만약 정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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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첫 균열
9화. 첫 균열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신발을 벗기도 전, 거실 소파에 화석처럼 굳어 앉아 있는 바다와 눈이 마주쳤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 붉게 충혈된 눈이 하늘의 전신을 훑었다.“어디 갔다 와?”낮게 깔린 목소리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왔다. 하늘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오빠, 그게…….”“제정신 박힌 놈이면 지 여자 친구 학원 빼먹게 안 해. 밤늦게 불러내서 외박시키는 짓거리는 더더욱 안 하고. 그놈이야? 네가 전에 말한, 호감 있다던 그 자식.”“……응.”기어들어 가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덮쳤다.“헤어져.”“오빠!”“그 새끼 하는 짓을 봐!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이 할 짓이라고 생각해? 너를 아끼는 게 아니라 망가뜨리고 있잖아, 지금!”“나를 사랑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야!”비명 섞인 외침이 거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바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하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유일한 사람? 그럼 나는! 고모랑 고모부, 주미는! 시은이는! 우리가 다 너한테 관심 없어서 이러는 것 같아? 순간의 달콤함에 눈 멀어서 진짜를 못 보지 말고 제발 정신 차려. 당장 끝내.”하늘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억울함과 서러움, 그리고 재현이 주었던 그 몽글몽글한 온기를 부정당하는 고통이 뒤섞였다.바다는 차마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서늘한 목소리만이 공중에 흩어졌다.“그 자식이 너한테 한 행동들, 하나하나 뜯어서 다시 생각해 봐. 그게 정말 너를 위한 건지.”“진정한 사랑이 뭔데! 나를 위해 맛집 찾아주고, 나만 생각하면서 선물 고르고, 좋은 곳 데려가 주고……. 온종일 나만 바라봐 주는 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뭔데!”하늘은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재현의 품 안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인 관심은 평생 결핍에 시달려온 하늘에게 구원과도 같았다.하지만 바다의 시선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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