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반응을 보이자 우정윤은 이때다 싶어 필살기를 날렸다.“여사님을 뵈러 손님들이 찾아와서 사모님이 접대하는 중이에요.”배건후가 문득 콧방귀를 뀌었다.“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말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우정윤은 사실 대표님한테만 날이 잔뜩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면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마련일 테니까.“사모님은 워낙 사교 모임에 익숙하지 않아 억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말실수해서 여사님까지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닌지 싶네요.”배건후는 서류를 탁 덮었다.“능력도 없으면서 설치기는! 당해도 싸.”우정윤은 즉시 입을 꾹 닫았다....그나마 주현정과 사이가 좋은 연장미가 화제를 바꾼 덕분에 분위기도 서서히 화기애애해졌다.도아린은 가끔 과일이나 차를 가져다주었고, 유민정을 도와 점심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훨씬 더 편했다.식사를 마치고 여사님들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고, 누군가 경마를 언급하자 TV를 켜고 경기를 시청했다.그녀는 이내 구석에 앉아 소유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소유정은 도성 경찰서에 가서 진행 상황을 물었지만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처리해주기 싫어하는 눈치라고 했다.한편, 불꽃놀이 영상은 이제 실검 순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손보미의 팬들은 여전히 공유하느라 바빴고 소유정이 [배건후는 유부남, 손보미는 내연녀]라는 댓글을 달자 금세 욕설로 도배되었다.자칭 내막을 알고 있다는 네티즌이 배건후와 손보미가 소꿉친구라는 증거를 제시하더니 배건후에게 질척이며 둘 사이를 훼방 놓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비록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나열한 사건에서 유추해보면 전부 도아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글쓴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손보미는 이번 화제에 힘입어 여주인공 캐스팅 확정 소식까지 발표했다. 어쨌거나 안티팬이 많으면 인기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게다가 함예진을 태그하고 앞으로 최고의 여배우한테서 열심히 연기를 배우겠다고 선언했다.물론 함예진은
말과 당나귀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몇 번 해본다고 과연 마스터하겠는가?결국 비주얼만 보고 골랐다가 연속으로 참패당해 뼈아픈 교훈을 얻고 그녀는 절대로 외모에 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백전백승한 김영실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주현정을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현정 씨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주현정은 도아린의 종이를 흘긋 쳐다보았다.“어때?”“딱 한 번 5등 했어요.”김영실이 웃으면서 말했다.“자, 나한테 6,000만 원 주고 장미 씨한테 2,400만 원 보내줘.”도아린은 어안이 벙벙했다.경마에서 지면 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는데?게다가 배건후와 이혼하면서 이미 1,000억의 빚을 졌는데 돈이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차라리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손을 떼는 것이었는데.결국 종이를 너무 세게 움켜쥔 나머지 김영실이 빼내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설마 용돈이 1억도 없는 건 아니지?”비록 순순히 인정할까 고민도 했으나 주현정에게 배건후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걸 들키기 마련이었다.‘골치 아프군.’도아린은 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마지못해 이체해주었다.연장미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경기가 곧 끝날 텐데 아니면 후반전까지 시청하고 갈까요?”김영실은 활짝 웃으면서 귀걸이를 만지작거렸고, 이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난 상관없는데 누군가 계속 돈을 잃어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네요.”이때, 문이 열리며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싸늘하면서도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왔다.“대체 얼마를 땄기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죠?”도아린이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건장하고 훤칠한 남자가 거실로 들어섰고, 길쭉한 팔다리를 감싼 슈트핏은 가히 환상적이었다.한 마디로 너무 멋졌다.‘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도아린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김영실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야. 전복이나 좀 사 먹겠는지. 그나저나 회사가 안 바쁜가 보
배건후는 기다린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이내 차를 음미하면서 도아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편, TV에서는 후반전 경기에 참석하는 말을 소개하고 있었다.도아린은 절대로 외모에 혹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상기했고,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목에 흰색 점이 있는 검은색 말을 선택했다.그리고 종이에 선택하려는 찰나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보는 눈은 여전히 형편없군.”도아린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다시금 TV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2번 말도 생김새는 나쁘지 않았다. 갈색 털은 윤기가 흘렀고, 비록 덩치가 큰 편은 아니지만 외모가 출중했다.하지만 비주얼만 보고 돈을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참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화면이 바뀌면서 다음 경주마로 소개가 넘어가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망설임은 패배의 지름길이야.”“아린아, 골랐어? 이제 곧 시작해.”김영실이 재촉했다.도아린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과감하게 2번 말을 찍었다.출발음이 울리자 경주마들이 쏜살같이 뛰어나갔고, 도아린이 선택한 2번 말이 제일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노려보았다.결정적인 선택을 내리기 전에 괜스레 방해하고 말이야!아주 그냥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나 보네? 개자식 같으니라고!“이번에도 나야!?”김영실은 흥분한 나머지 춤이라도 출 기세였고, 연장미에게 자신이 선택한 번호를 보여주었다.연장미가 찜한 말은 2등으로 달렸고,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그러나 두 번째 바퀴를 달릴 때 2번 말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아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TV를 쳐다보았고, 마음 같아서는 현장으로 날아가 연신 채찍질해서 경주마가 더 빨리 달리게 하고 싶었다.마치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닿기라도 한 듯 2번 말은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고 결국 3위로 결승선에 도착했다.해설자는 2번 말이 다크호스라고 극찬했고, 작
도무지 밥 먹을 기분이 아닌 김영실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게다가 연장미가 데려온 사람인지라 그녀도 뒤따라 집을 나섰다.배건후는 도아린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순순히 보내 줄 주현정이 아니었다.“아린아, 이모님이 요리 준비했으니까 먹고 가. 살이 빠진 것 좀 봐.”“어머님도 많이 드세요.”주현정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도아린은 배건후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저놈은 몸매 관리해야 하니까 야채만 먹으면 돼.”말을 마치고 나서 일부러 팔을 찰싹 때렸다.그때 여자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배건후는 눈을 내리깔았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내가 친아들 아닌가요?”“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줬으면 의무를 다했지, 뭐. 앞으로 아린과 함께 있을 때만 엄마라고 불러.”식사를 마치고 주현정은 약을 먹고 쉬러 가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아린에게 말했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괜히 마음만 약해졌다가는 점점 더 기고만장할지도 몰라.”그동안 배건후의 행세는 그녀도 지켜봐 와서 잘 알고 있다.아들이 바람 피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유독 손보미한테만 약했다. 게다가 워낙 잔꾀가 많은 여자라서 도아린이 손해 볼까 봐 걱정이었다.시어머니의 배려에 그녀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그리고 뒷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유민정을 불러 세웠다.“혹시 한약재 찌꺼기인가요?”“네.”“왜 예전 거랑 냄새가 다르죠?”유민정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지난번에 사모님이 주신 처방전인데 여사님께서 드셔보더니 몸이 훨씬 개운하다고 하셨어요.”“아, 약재가 바뀐 게 있긴 했죠. 알겠어요, 일 보세요.”도아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한약 덕분인지 양약 덕분인지 몰라도 이번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주현정은 예전보다 안색이 많이 밝아졌다.도아린이 방에 돌아오자 배건후는 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디 필로우를 침대 한가운데에
도아린은 침대에 털썩 쓰러졌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는 순간 은은한 민트향을 맡았다.상쾌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배건후와 결혼하고 나서 껴안은 채로 잠이 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때가 되면 각자 알아서 잤고, 설령 동시에 침실에 들어선다고 한들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기에 가운데가 휑 비어 있었다.남자는 기다란 팔다리로 마치 창살처럼 도아린을 가두었다. 그녀는 답답한 느낌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눈 감고 얼른 자.”배건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정작 가슴 근육에 숨이 막힐 듯한 도아린은 남자의 신체 변화 따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힘껏 밀쳤다.“이거 놔요! 답답하단 말...”그러다 특정 부위에 닿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저녁은 분명 같은 메뉴를 먹었기에 약을 탄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건후 씨?”이내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널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계속 반항하겠다면 내가 과연 서긴 서는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증명해줄 테니까 각오해.”도아린은 엉큼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속으로 저주를 마구 퍼부었다.곧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의 사라진 팔뚝의 흉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당신 팔뚝에 상처를 낸 사람이라면 친히 경험했겠죠? 하지만 전 결벽증이 있어서 사양할게요.”배건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악!”도아린은 너무 아픈 나머지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강아지도 아니고 뭐 하는 거예요!”그는 쇄골까지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3년 전 그날을 제외하고 남자랑 자 본 적이 없어?”도아린의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래요. 여러 명이랑 해보면 건후 씨 스킬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섣불리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그녀는 목을 가리고 남자를 밀어냈다.배건후는 앙증맞은 얼굴을 붙잡고 가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어떤 게 손톱에 긁힌 상처인지 잘 봐. 괜히 몰상식
손보미는 수박 한 조각을 집어서 배지유에게 건넸다.“수박이 엄청 달아. 얼른 먹어.”...다음 날 도아린이 씻고 있을 때 배건후가 화장실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옆에 서서 치약을 짜고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내일 나랑 행사장에 같이 가.”“싫어요.”도아린은 칫솔을 물고 딱 잘라 거절했다.이혼하고 전남편과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안 그래도 둘의 관계는 수시로 부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스스로 가십거리를 제공할 수는 없지 않은가?배건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제 딴 돈을 돌려줘.”도아린이 치약 거품을 퉤 하고 뱉었다.“참 뻔뻔스럽네요.”“힌트가 없었더라면 더 많이 잃었을 텐데?”비록 사실이지만 이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와이프를 위해 돈을 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이혼하는 마당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도아린은 어이가 없었다.사사로운 원한까지 반드시 갚는 쪼잔한 놈 따위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었는데.“건후 씨랑 행사장 갈 테니까 이혼 합의금 중에서 200억을 면제해줘요.”도아린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아는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이혼하자고 하는 거야?”배건후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돈을 적게 버는 것도 아닌데 부족하다고 시위라도 하는지 싶었다.도아린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통이 큰 척하더니 누구보다 꼼꼼하게 따지잖아요.”도지현의 치료비를 계산하면서 면봉 하나의 가격까지 놓치지 않는다니, 뻔뻔스러운 쓰레기 같으니라고!배건후는 양치를 마치고 변기로 걸어갔다.“나랑 가던지, 돈을 갚던지.”“미친!”도아린이 화장실을 쏜살같이 뛰쳐나왔고, 문이 닫히는 순간 물소리가 들려왔다.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이미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도아린이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배지유가 돌아왔다.“아줌마, 물 좀...”그리고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도아린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이
도아린은 배건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동안 다짜고짜 꾸짖거나 누명을 씌웠을 때 아무리 억울해도 꾹 참고 변명해 본 적이 없었다.오늘 그녀를 모욕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물론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안하무인에 막무가내인 배지유를 보고 무슨 생각 할까 알고 싶었을 뿐이다.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소매를 정리하며 가까이 다가왔다.“지유가 술을 마셔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고작 이게 다인가?무려 새언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어미 없는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도 모자라 남동생은 남편 돈을 빼먹는 존재라고 하는데 제정신이 아닌 탓이라고 얼버무리다니?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의 약점만 쏙쏙 골라서 비꼬겠는가?비아냥거림과 경멸이 가득한 여자의 표정을 보자 배건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엄마가 이미 때렸으니까...”그러나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왜냐하면 주현정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다.방금 퇴원한 그녀는 다시 VIP 병동에 입원했다.아무리 신분이 존귀한 사람이라도 의사 앞에서는 한낱 환자에 불과했다. 주치의가 노발대발하며 호통쳤다.“환자분께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자꾸 자극합니까?”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고, 천생 귀공자답게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냈다.의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도아린에게 또다시 환자를 흥분하게 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진료실을 나서자 배건후는 도아린을 막아섰다.“엄마가 깨어나면 지유 얘기 잘 좀 해줘.”도아린은 화가 나서 되레 웃음이 터졌다.욕설을 퍼부은 사람을 용서할뿐더러 사정까지 하라니?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맞아요?”배건후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갔다.“어렸을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란 녀석이야. 부모님도 여태껏 혼내신 적이 없는데 오늘 너 때문에 엄마가 지유의 뺨을 때렸어.”“그래서?”배씨 가문의 귀한
하지만 검사 결과는 주현정이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아마도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기에 환자가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차라리 이대로 잊고 지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떠올려 속상해서 건강까지 해치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의사의 말에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더욱 당당하게 강요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기어코 지유랑 싸워서 병세를 악화하게 할 거야?”도아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골조차 보기 싫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문나연이었다.“통화 괜찮아?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그녀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끼어들었다.“지금 찾으러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이내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고집스러운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배건후는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배지유한테서 연락이 왔다.“오빠, 엄마 괜찮아요? 얼른 경호원 치워줘요. 엄마 보러 가야 하니까.”“집에서 반성해.”비록 병원은 금연이지만 배건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술집에서 술을 처먹고 외박까지 해? 간덩이가 부었어?”도아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늦게까지 놀다 온 것에 화가 난 듯한 오빠의 말투를 듣자 배지유는 금세 어깨가 으쓱했다.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분고분했다.“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좀 늦었어요.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나저나 엄마는 괜찮아요?”배건후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엄마 앞에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마.”대신 해결해줬다는 뜻인가? 역시 그녀를 가장 아끼는 건 오빠밖에 없었다.“알았어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에 마구 뒹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도아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나 뺨 맞게 한 것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