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유미주는 씩씩거리며 손보미를 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지, 괜히 욕먹게 해서 이번 달 보너스만 날리지 않았는가?“방금 자기 것도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전제는 본인이 빼앗아 갈 능력은 되어야겠지?”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소유정은 인정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말했다.손보미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조신하고 아량이 넓은 설정만 아니었다면 소유정의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인기도 없는 무명 가수 따위가 감히 그녀를 비웃다니?더욱 황당한 건 지난 3년 동안 집에서 가정부와 다름없던 여자가 직장을 다닌 경험도 전무한데 무려 일류 디자이너와 친구라는 점이었다.아직 통화 중인지라 서대은은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미주 씨, 매장 입구에 ‘손보미와 배 씨는 입장 금지’라는 안내문을 적어 줘. 우리가 돈이 없어? 특히 내연녀가 소비하는 돈은 공짜로 줘도 받지 마.”혐오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실대표가 지시한 이상 유미주는 일개 고용직으로서 즉시 화이트보드에 경고문을 작성했다.비록 배건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에 본인이 굳이 인정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보미 언니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악랄한 여자네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군!”배지유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아린의 심장에 박혔지만 이제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그녀는 피식 비웃었다.“와이프가 버젓이 있는데 기어코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만약 디자이너 실장이랑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드레스를 가져갔을 거잖아요? 본인이 추잡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되레 남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워요?”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보미는 이참에 본색을 드러낼까 싶었다.그녀가 알고 있는 도아린은
그동안 해외에 있었지만 국내의 사업을 계속 지휘하고 있었다. 육씨 가문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그는 긴 복도를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보미와 배지유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누군가 손보미에게 축하를 보내자 그녀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지만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곧 좋은 일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오빠는 왜 아직도 안 오죠?”배지유는 도아린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손보미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게 극히 드문데 오늘 이런 성대한 자리에 데리고 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까?“도아린 씨가 다 준비하길 기다리나 보죠.”손보미가 배지유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배지유가 이를 꽉 깨물었다.“걔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이름만 들어도 역겨우니까. 우리 오빠는 그런 여우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하나 몰라요.”도아린이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배건후의 은색 마이바흐가 밖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 운전기사 조수현이 없어서 배건후가 운전하기로 했다.그녀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잔잔한 파도가 모래사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것처럼 치맛자락이 흩날렸다. 가뜩이나 피부가 하얀데 실버 드레스까지 입으니 마치 늦은 밤에 도망쳐 나온 인어공주 같았다.배건후의 시선이 도아린의 섹시한 어깨에 닿은 순간 그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배건후와 행사에 참석할 때 이렇게 예쁘게 꾸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생각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담배를 확 부러뜨렸다.도아린은 그녀가 손보미의 드레스를 빼앗아서 배건후가 화를 낸다고 착각했고 배건후는 도아린이 다른 남자 때문에 예쁘게 꾸민 것이라고 착각했다.가는 길 내내 분위기가 무겁기 그지없었고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블루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이 옷소매와 아주 잘 어울렸다. 차갑고 귀티 나는 왕자 같았다.이 스타일
배건후가 손목에 실로 딴 붉은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팔찌 가운데 금색 오팔이 몇 개 있었다.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리면서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배건후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오늘 커프스단추 찾다가 찾았어.”도아린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고 배건후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화장실 다녀올게요.”배건후는 그녀의 다급한 발걸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육민재의 시선이 배건후의 손목에 닿았다. 아직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했다.“이 빨간 팔찌는 무슨 의미라도 있어?”“없어.”배건후는 담뱃재를 털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오늘 저녁에 손님들이 많이 왔구나. 가서 손님들 맞이해.”그러고는 도아린을 따라갔다.도아린이 손보미가 아까 있었던 자리에 갔을 때 손보미는 그곳에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빨간 팔찌가 눈에 맴돌았다. 3년 동안 보이지 않아서 배건후가 버린 줄 알았는데...그때 그 빨간 팔찌가 아니었더라면 사람을 잘못 봤을 리도 없었다.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도아린은 정자에 들어가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가 있는 줄 모르고 뒷담화했다.“도아린 봤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는지, 참. 내가 다 민망하더라고. 근데 걔는 민재 도련님이랑 배 대표님 앞에서 아주 예쁜 척하더라?”“낯가죽이 두꺼운데 뭔 짓인들 못 하겠어. 배 대표님 조건이 얼마나 좋아. 그때 당하고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어.”“그러게 말이야. 근데 손보미가 귀국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어.”대화 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다급하게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도아린은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죄송합니다...”립스틱이 상대의 옷깃에 묻고 말았다....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손보미는 마치 예쁜 꽃처럼 여리여리했다.“오빠한테 전화해볼까요?”배지유의 말이
그러다가 배건후에게 들킬까 봐 살짝 도발만 하고 휙 가버렸다....다행히 상대가 도아린의 어깨를 잡은 덕에 넘어지진 않았다. 도아린이 재빨리 거리를 넓히고 고개를 든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여긴 왜 왔어요?”배건후의 시선이 그녀의 입가에 묻은 립스틱으로 향했고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누구 찾아?”“길을 잃었어요.”도아린이 마음을 가라앉히긴 했지만 조금 켕기는 게 있긴 했다. 배건후는 그녀를 정자 쪽으로 밀어붙이더니 손을 내밀어 빨간 팔찌를 보여주었다.“이거 보니까 괴로워?”알고 보니 그의 계획이었다.도아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배건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왜 이렇게 긴장해? 이 팔찌 때문에? 아니면 팔찌 뒤에 숨은 일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 때문에?”도아린은 등골이 다 오싹했다. 배건후는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치욕을 잊지 않았다.“도아린.”배건후의 말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도아린은 마치 밧줄로 목을 조른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뒤로 한걸음 물러나자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배건후는 다시 바짝 다가가 내려다보며 말했다.“도아린, 그때 그 일 계획이었어? 아니면...”“사람 잘못 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건후 씨 방에 들어가지 않았어요.”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그는 여러 번이나 물었다. 진실이 그렇게 중요할까?배건후는 갑자기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내 얼굴 봤을 때 죽이고 싶었지? 만약 민재였더라면 엄청 다정했을 텐데. 널 병원까지 가게 하지도 않았고.”“배건후 씨, 그 입 다물어요!”‘입 다물라고?’배건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3년을 버티니까 민재가 돌아왔네? 아까 내가 잡지 않았더라면 민재 품에 안겼겠어.”그는 도아린의 드레스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일부러 걔랑 커플룩으로 맞춰 입기까지 하고. 근데 아쉬워서 어쩌나. 그때 민재가 널 버렸는데 지금 한 번 다녀온 널 쳐다보기나 할까?”배
먼 곳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하도 조용해서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배건후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아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어머니 건강을 위해서 이혼하지 않기로 했어.”도아린은 조롱 가득한 그의 두 눈을 빤히 보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건후 씨, 어머님을 핑계로 대지 말아요. 그때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날 못살게 구는 거잖아요. 난 그렇다 쳐도 손보미 씨를 이렇게 내버려 둘 거예요?”그의 두 눈이 어찌나 깊은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예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도아린을 밀어내고 옷을 정리하자 그녀도 재빨리 드레스를 여미고 화장을 수정했다.도아린이 수정을 마친 후 배건후는 어디로 갔었는지 연회가 시작돼서야 다시 돌아왔다.오늘 생일 연회의 주인공 나영옥은 육민재의 부축을 받으며 연설했다. 연설이 끝난 다음에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재벌인 그녀가 못 본 게 뭐가 있겠는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속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객들이 줄을 서서 선물을 주자 나영옥은 웃으면서 옆 카트에 놓으라고 했다.배건후가 준비한 선물은 맑고 투명한 비취 목걸이였는데 평안을 뜻했다.도아린도 재빨리 선물을 꺼냈다. 사실 두 사람이 선물 하나만 준비해도 됐었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그와 관계를 끊고 싶어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줄곧 차분했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아린아, 네가 만든 향낭이야?”3년 전 도아린은 나영옥에게 향낭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 향낭을 몸에 지니고 다닌 후로 정신이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 나중에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향낭의 향이 옅어졌는데도 아까워서 버리질 못했다.“할머니 만수무강하세요.”도아린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이 향낭을 만드느라 그녀는 밤까지 새웠다. 밖의 자수는 평소 자주 보던 그런 평범한 무늬가 아니었고 3년 전에 나영옥에게 줬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나영옥은 기뻐하며 비취 목걸이와 향낭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아린은 연회장을 나가서 메시지를 보냈다.손보미의 차례가 됐을 때 나영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사에게 그냥 카트에 담으라고 했다. 손보미는 배건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돈을 들여 준비한 게 물거품이 되니까.그런데 나영옥은 그녀의 선물만 카트에 담은 게 아니었다. 넣었던 걸 다시 꺼내서 열어본다면 다른 사람들이 손보미를 싫어할 게 뻔했다.손보미가 망설이던 그때 배지유가 선물을 꺼냈다.“할머니, 제가 준비한 건 비취 팔찌예요. 하는 일이 뜻대로 되길 바랍니다.”나영옥이 그녀가 준비한 선물을 보지 않을까 봐 미리 꺼냈다.그런데 그때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배지유가 준비한 선물이 바로 도아린의 비취 팔찌였던 것이었다.나영옥이 힐끗 쳐다보다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받아서 카트에 넣어.”배지유는 배건후의 옆에 앉아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도아린 단속 좀 해요. 이러다 우리 가문 망신당하겠어요.”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배지유는 음료수를 먹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오빠, 왜 그렇게 봐요? 보미 언니가 오자고 해서 온 거예요. 이따가 집에 들어가서 안 나오면 되잖아요.”“아린이 팔찌를 선물로 가져와?”배건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빛도 매우 날카로웠다. 그러자 배지유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망했다. 아까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빠가 옆에 있는 거 깜빡했어.’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배지유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오빠가 내 카드 정지해서 선물 살 돈이 없었어요.”배지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팔찌는 오빠가 사준 거잖아요. 할머니께 드린 건 우리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예요.”배건후의 시선이 배지유의 목에 머물렀다. 그가 도아린에게 준 루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집 비밀번호를 바꿨기에 배지유는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아린이 직접 목걸이를 줬을 가능성밖에 없었다.도아린은 이런 주얼리 같은 걸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고 배지유에게 마음대로 주었다.순간 분노
“사람들이 내가 나영옥 할머니와 관계가 좋은 걸 믿고 민재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고 빚을 갚아달라고 강요한 줄 알아요. 해명해도 되고 부인해도 되고 심지어 모른 척해도 돼요. 근데 내가 매번 힘들게 빌린 돈을 가로막진 말았어야 했어요.”도아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해 겨울, 도아린은 돈을 빌리려고 뭐든지 다 했었다. 상대가 겨우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이튿날에 찾아갔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절대 빌려주지 않겠다고 했었다.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지만 육민재가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육민재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안경을 닦고는 다시 꼈다.“너도 배후 조종자가 나라고 생각하는구나.”도아린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육민재의 두 눈에 취기가 조금 사라진 듯했다. 안경 유리알에 빛이 반사되어 눈빛을 가렸다. 도아린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육민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그런 거 아니야.”육민재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도아린도 캐묻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두 사람이 아무도 말이 없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먼저 가보겠습니다.”도아린이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비웠다....손보미가 배지유를 살짝 잡아당겼다.“건후 씨한테 약 타 먹이지 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사실은 약을 먹였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배지유는 오빠가 근처에 없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내가 일어나자마자 오빠가 앞에 있던 차를 바꿔버렸어요.”경계심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까지 경계할 줄은 몰랐다.‘이게 다 도아린 때문이야!’손보미는 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이 결과가 그녀의 예상대로이긴 했다.“이게 다 도아린 그년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래요.”배지유가 음료수를 들고 물었다.“언니, 음료수 마실래요?”“너 마셔. 난 다이어트 중이라.”배지유는 약을 만지던 손가락을 잊은 채 잔을 만졌다. 그녀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인파 속에서 육하경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육하경의 외할머니한테 일이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