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죠.”강재민이 신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도아린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마침, 육하경도 도착한 참이었다.오늘 강재민과 기싸움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겉으로라도 화목해 보이려고 리무진을 준비했다.도아린이 먼저 차에 탔고 하얀색 정장을 입은 육하경은 강재민과 나란히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녀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한 사람은 온화하고 우아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막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도아린은 신지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도 대표님, 저도 파트너 요청을 받았어요. 제 친구도 파티 행사에 참석한다면서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순간, 도아린의 목소리가 겹쳤고 신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강재민이 그녀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육하경도 같은 차에서 내리더니 도아린의 옆에 섰다.두 남자가 한 명은 왼쪽, 다른 한 명은 오른쪽에 서 있었다. 한 명은 하얀 수트, 다른 한 명은 검은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기사들인듯했다.신지훈은 전화를 끊고 도아린 곁으로 다가갔다.“도 대표님, 정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계시네요.”도아린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파트너 두 분을 데리고 참석한 제가 너무 경솔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두 회사를 운영하는 제가 멋있어 보인다는 건가요?”신지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다른 남자들도 아내와 비서를 동시에 데려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다들 속으로만 안 좋게 생각할 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설령 말하더라도 그들을 성공한 남자라고 칭할 뿐이었다. 가정도 화목하고 사업도 잘되는 사람이라면서 말이다.하지만 도아린처럼 여자가 두 남자를 데려오는 사람은 처
“강 대표님!”어떤 기업가가 먼저 강재민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그 옆에 있는 여자도 도아린의 존재를 무시하고 강재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손명준과 손채은 모녀였다.“강 대표님, 조금 있다가 저와 함께 춤을 출 수 있으실까요?”강재민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그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도아린에게 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아린 씨, 안 된다고 하세요!’사실 강재민도 춤은 도아린과 출 생각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춤을 춰버리면 기회는 육하경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도아린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강재민의 시선을 따라 도아린을 쳐다본 손채은은 곧바로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누군가 했네... 도아린 씨 아니세요?”여자는 비웃으며 냉소적인 말을 했다.“강 대표님, 해남에서 오셔서 연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시나 본데요. 도아린 씨 말이에요. 한때 배건후 씨한테 들이댔던 여자예요.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포기하셨나봐요. 타깃을 바꾸신 건가요?”“방금 돌아오셔서 소식이 좀 늦을 수 있겠네요.”육하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 대표님은 지금 모건 그룹과 JS 픽처스의 대표직을 맡고 있어요. 제가 아린 씨의 눈에 들었다니 저한테는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이죠.”손채은은 이 말을 듣고 밀도 안 된다는 듯 억울한 표정으로 반박했다.“배건후 씨한테 차이지 않았어요? 어떻게 도아린 씨가 모건 그룹 대표일 수 있죠?”강재민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기업가를 바라보았다.“손 대표님,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저런 귀여운 따님이 있으셔서요.”말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도아린을 감싸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손명준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널 데려온 건 인맥을 쌓으라는 거지 내 사업을 망치라는 게 아니야!”“아빠, 도아린 씨 말이에요. 전에는 저한테서 배건후 씨를 빼앗아 가더니 이번에는
손채은은 강재민에게 춤을 신청하면서도 거절당할까 봐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강재민에게 춤을 신청한 것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공개적으로 거절당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강 대표님, 도아린 씨가 먼저 다른 사람이랑 춤을 추겠다고 대표님을 여기 남겨두고 갔잖아요. 전 도와드리려고 온 거예요.”“필요 없어요.”“그치만... 그치만...”손채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이렇게 거절당하면 제가 체면을 못 차리잖아요.”“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손채은은 이를 악물며 손톱이 부러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강재민 앞에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러자 음악이 또 바뀌었다.여자들이 한 바퀴 돌며 파트너의 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강재민은 정확한 타이밍에 도아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육하경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손채은은 화가 난 듯 발을 쾅 구르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빠르게 걸어갔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면 다른 사람들의 조롱 섞인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젠장! 도아린... 정말 괘씸한 년이야!’손채은은 와인 잔을 들고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왜 그렇게 화가 나 계세요?”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가 우아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쪽은...”“신지훈이라고 해요.”“신 대표님이세요?”손채은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신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춤을 추고 싶으세요?”“당연하죠!”그는 손채은의 손을 잡고 춤을 추러 나섰다.그들이 춤을 추는 사이, 신지훈은 자연스럽게 도아린 옆을 스쳐 지나가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녀는 무덤덤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신 대표님, 브로치가 독특하시네요.”손채은이 손을 뻗으려 하자 신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집사람이 준 겁니다. 아내가 소유욕이 워낙 강해서 남이 자기 물건을 건
강재민이 도아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녀에게서 나는 샴푸 냄새를 맡았다.“제가 뭘 하면 되죠?”도아린이 머리카락을 휙 빼앗으며 가볍게 말했다고 했다.“화장실로 가봐요. 전 저기 서 있는 분을 만나보려고요.”“아린 씨, 조심해야 돼요.”강재민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도아린은 와인잔을 집어 들고 얼굴이 피부가 하얀 남자에게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전 도아린이라고 해요. 그쪽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도아린이 먼저 다가오자 그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도아린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시선을 그의 소매에 두었다.“이 옷 말이에요. 디자이너인 제인 님 작품 맞죠? 저도 제 친구한테 따로 제작해 주고 싶어서요. 가격을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남자는 자신의 소매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디자이너 제인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그는 살짝 긴장을 풀고 공손하게 말했다.“맞아요. 하지만 제인 씨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지인 소개 없이는 맞추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친구 덕분에 겨우 맞출 수 있었거든요.”도아린을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그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군요. 그럼 다른 디자이너분을 알아봐야겠네요. 방해해서 죄송해요.”도아린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바로 돌아섰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서대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 옷은 사실 제인의 디자인이 아니었다. 도아린이 제인의 이름을 빌려 만든 작품이었다.그리고 그 옷은 비밀 조직 LY를 통해서 특정 인물에게만 전달된 거라 내부 기록을 추적할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육하경이 돌아왔다.“재민 씨는요?”“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인사하러 갔어요.”도아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테이블 위에 놓인 경매 목록을 넘겨주며 물었다.“하경 씨는 갖고 싶은 거 있어요?”육하경이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샴페인 잔을
“아!”손채은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바라봤다. 공들여서 한 화장과 비싼 돈을 주고 빌린 드레스가 몽땅 망가져 버렸으니 말이다.연회장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손채은의 목소리는 워낙 컸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손명준도 손채은의 사과가 예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도아린이 와인을 끼얹을 줄은 몰랐다.‘이제 막 신 대표님이랑 알아가려던 참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망신을 당하면 앞으로 어떡하지?’“도 대표님, 이건 좀...”육하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손 대표님, 도 대표님 대신에 사과드리겠습니다. 따님께 와인을 흘려서 죄송합니다.”‘흘렸다고? 흘린 게 아니라 뿌린 거잖아!’손명준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하지만 도 대표님께서 가만히 있었더라면 따님분께서 도 대표님한테 와인을 뿌렸을 것 같아서 말아죠.”“뭐라고요?”“도아린 씨한테 와인을 뿌리려 했다고요? 정신을 놓고 나온 건가?”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도아린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손채은 씨, 대학 때부터 배 대표님을 좋아했잖아요. 도 대표님이랑 친하다고 뒤에서 계속 험담도 했었고요... 아까 만나자마자 못된 말한 거 저도 들었어요!”“크루즈 파티 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셨거든요. 배 대표님께서 아예 자기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경고했었어요. 그래서 조용해진 줄 알았는데 또 아린 씨를 건드린 거예요?”“왜겠어요? 강 대표님이 마음에 들었나 보죠. 근데 강 대표님은 아린 씨만 바라보잖아요.”그 말을 들은 손채은이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피해자인데...’그녀는 분노에 차서 육하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절대 잊지 않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육하경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우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명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차갑고 미끄러운 뱀이 서서히 그의 목을 조이는
손명준은 손채은을 데리고 형식적으로 사과만 하면 이후의 협력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도아린이 갑자기 세게 대응하는 것이었다.게다가 두 파트너까지 직접 나서서 손명준의 앞길마저 막아버렸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손명준이 이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서 있을 때, 손채은이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강 대표님, 도아린 씨는 이미 건후 씨한테 버려진 여자예요. 그래도 상관없으신 건가요?”강재민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주변 공기도 얼어붙는 듯했고 구경하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물러나며 손씨 가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손명준도 상황을 알아차리곤 손채은을 향해 세게 뺨을 때렸다.“짝!”손채은의 얼굴이 옆으로 휘청였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아빠, 왜 때려요! 도아린 씨 진짜 쓰레기 맞다니까요? 예전에는 건후 씨를 붙잡고 늘어지더니... 연성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입 닥쳐!”손명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손채은이 지금의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싫어요! 끝까지 말할 거예요.”손채은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강재민을 바라봤다.“강 대표님은 해남에서 오셔서 소문을 잘 모를 수 있어요. 전 강 대표님께서 도아린 씨한테 속을까 봐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뭘 안다는 거죠?”그때, 신지훈이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왔다.손채은은 구세주를 본 듯이 달려갔다.“신 대표님, 모건 그룹에서 일하고 계시잖아요. 강 대표님 체면을 세워준다고 도아린 씨 같은 여자를 회사에 들이시면 안 된다고요! 건후 씨는 도아린 씨를 싫어하거든요.”신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손채은 씨, 해외에 나가 있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그 말에 손채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전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데요?”신지훈은 도아린을 향해 살짝 고개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가볍게 넘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키워야만 주변 사람들의 진짜 반응을 볼 수 있었다.그러면 신지훈은 배건후의 대변인이었기에 당연히 나서서 해명할 것이었다. 단순히 해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이미지를 세탁하려고 할 터였다.하지만 도아린은 그 수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도아린이 강재민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강재민이 손을 한 번 들어 올리자 경호원이 다가왔다.“이 두 분이 파티 분위기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내보내 주시겠어요?”파티 책임자가 소식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그는 손명준과 손채은 부녀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도아린에게 경매장에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신지훈은 도아린을 안심시키듯 미소를 보였지만 돌아온 건 그녀의 비웃음뿐이었다.도아린이 경매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신지훈은 손가락으로 브로치를 문질렀다.“나서긴 했는데 확실히 거절당했네.”여론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얽히고 얽힌 배건후와 도아린의 감정사에 대해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대는 사람들이 있었다.경매가 시작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손명준과 손채은 부녀는 강제로 쫓겨났다.손채은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 따지려 했지만 손명준이 그녀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멍청한 년... 네 눈에는 안 보여? 다들 도아린 씨를 감싸고 있는 게? 무슨 생각으로 덤빈 거야?”손채은은 무릎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왜 내 마음에 든 남자들은 전부 도아린 편만 드는 거야! 결혼까지 했다가 이혼한 여자인데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손명준이 거칠게 손채은을 끌어올렸다.“만약 회사에 영향이라도 끼치게 되면 박 대표님이랑 결혼이나 해!”“절대 싫어요! 그 돼지 같은 남자랑 결혼하기 싫다고요.”손채은은 그렇게 손명준에 의해
하지만 도아린은 육하경을 보지 않고 구현성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신지훈이 도아린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4억.”구현성이 계속해서 가격을 올렸다.“5억이요.”신지훈도 지지 않고 구현성이 부르는 가격보다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구현성 옆에 앉아 있던 피부색이 까만 남자가 초조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지훈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뭐라 말했다.그 말을 듣고도 신지훈은 ‘내 알 바 아니다’는 표정으로 계속 가격을 올렸다.그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가득 안고 다시 구현성에게로 돌아갔다.가격은 9억까지 뛰었고 신지훈은 10억까지 올렸다.구현성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육하경을 슬쩍 돌아봤다.하지만 육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하더니 도아린에게 다음 경매품을 보여주었다.“이건 마음에 들어요?”그가 보여준 것은 비취 팔찌였다.순간, 도아린의 눈이 움찔거렸다.조금 전에 경매 목록을 봤을 때는 없었던 물건이었기에 경매 도중에 급하게 추가된 것 같았다.그 비취 팔찌는 그녀가 생일 때 배건후에게 요구했던 것이었다.‘이혼하고 나서는 에이트 맨션 금고에 보관해 뒀는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제 신혼집...”도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집도 하경 씨 손에 있어요?”육하경이 난처한 듯 입술을 꾹 눌렀다.“미안해요. 당시 건후가 비싼 가격에 사겠다고 해서요. 혹시나 두 사람이 다시 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양보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육하경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왜요? 이 팔찌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요?”“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육하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었다.“이 팔찌는요? 마음에 들어요?”“20억이요!”그때 강재민이 갑자기 번호표를 들었다.도아린과 육하경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옥 접시의 경매를 진행되는 중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육하경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강재민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그를 힐끗 쳐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