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배진성은 프러포즈한 다음 날 이별을 통보했다. “정효민이 임신했어. 내가 책임져야 해.” 남예린은 손목을 그었고, 피가 욕조를 붉게 물들였다. 배진성이 말했다.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해.” 4년 뒤, 두 사람은 재회했다. 남예린은 일밖에 모르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었고, 배진성은 네이션항공의 기장이 되었다. 배진성은 남예린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남예린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배진성은 어김없이 남예린의 앞에 나타났다. 네이션항공 최연소 기장인 배진성은 전 여자 친구에게 처절하게 매달렸다. 남예린은 그런 배진성이 꼴도 보기 싫었다. “꺼져. 아내도, 아이도 있는 사람이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늘 차분하던 배진성도 그 순간만큼은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나 결혼 안 했고 혼인신고도 안 했어. 이건 친자확인 검사 결과야. 한 번 봐 줘.” 묻혀 있던 과거의 진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한테 전 남자 친구는 죽은 사람과 다름없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 “그럼 줄 서서 대기 번호 뽑아.”
더 보기허지형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배진성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배진성이 건넨 서류를 받아 펼쳐 보자 지정한 의사 란에 예상했던 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남예린.]다시 서류를 덮고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잘되길 바랄게.”배진성이 허지형을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야?”허지형은 고개를 저을 뿐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조금 전 주시윤이 남예린의 몇 마디에 얼굴이 얼마나 하얗게 질린 채 자리를 떴는지 너무 똑똑히 봤다.그래서 물러설 줄 모르는, 경계심이 전혀 없는 전 남자친구도 주시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스스로 무덤을 파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아무것도 아니야.”허지형이 서류를 배진성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이만 가 봐.”사무실로 돌아간 허지형은 문을 닫고 창가 앞에 섰다.아래층에서 남예린이 당직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흰 가운을 날리며 걷는 뒷모습은 정말 날렵하기 그지없었다.이토록 이성적이고 시크한 모습의 남예린과 배진성이 말한 사랑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소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 한참을 바라봤다.‘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던 걸까...’당직실.근무표를 받은 남예린은 잠시 멈칫했다.여러 번 체크하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확인한 후 근무표를 들고 조영진을 찾아갔다.“조 과장님, 이게 뭐예요? 저더러 오후에 병원 건강검진센터에 가서 네이션항공 기장 건강검진을 하라고요?”키보드를 두드리던 조영진은 남예린의 말에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남예린에 대한 조영진의 태도가 예전에 비해 완전히 달라졌다.얼마 전까지 못마땅한 듯 깔보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혹시라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네. 위에서 내려온 지시예요. 네이션항공은 정부가 투자한 대기업이에요. 네이션항공 기장이 우리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 하겠다는데,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남예린이 근무표를
그때 배진성은 이렇게 생각했다. 관계라는 것이 결말을 보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하지만 결국 시작하고 말았다.허지형이 배진성을 한 번 힐끗 보더니 한마디 물었다.“남 선생님이 어떻게 했는데?”허지형과 눈을 마주친 배진성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빛 깊은 곳에 웃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남예린에게 관심 있어?”허지형은 대범하게 인정했다.“저렇게 재미있는 여자라면 관심 없는 게 이상하지.”배진성의 시선이 또다시 복도 끝으로 향했다.남예린은 이미 그곳에 없었지만 배진성은 그녀가 아직 거기에 있는 듯 그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내가 이 일을 시작한 첫 해, 심해시에서 합동 훈련을 받고 있을 때였어. 보름 동안 연속으로 비행하다가 과로로 위장병이 났지. 남예린에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꼬박 36시간 타고 왔더라고. 밤이 되어서야 내가 있는 기숙사 아래에 도착했는데 그날 날씨가 영하 10도였어. 심해시에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이었지. 그래도 어떻게든 날 만나려고 아래에서 40분 동안 서 있었어.”배진성의 목소리는 약간 메마른 듯했다.“내가 달려갔을 때 남예린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어. 무릎을 껴안은 채 얼굴은 빨갛게 돼서 동상이 걸릴 정도였지. 그런데도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어. 그 미소, 아직도 머릿속에 새긴 듯 남아 있어... 그때 남예린이 손에 보온 도시락을 들고 있었어. 그 안에 따뜻한 죽이 담겨 있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바깥에서 나를 기다렸는데도 죽은 여전히 뜨거웠어. 나중에 알고 보니, 몸을 웅크린 이유가 자기 몸으로 죽이 식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정말 바보 같은 여자지...”배진성은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보온 도시락을 내게 건네며 다 마시면 바로 가겠다고 했어. 훈련 절대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기숙사로 데려가려 했지만 남예린이 기어코 거절하더라고. 자기가 관리인한테 물어봤대, 여자는 남자 기숙사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면서 절대 안 들어가려 했어.
간호사 스테이션에 있던 유해인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너무 놀라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진료 기록부를 안고 서 있는 옆의 인턴은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복도 저편에서 지나가던 간호사 두 명이 걸음을 멈추고 서로 마주 보며 눈빛만 주고받았다.주시윤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떨며 얼버무렸다.“너!”“그리고!”남예린이 주시윤의 말을 끊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말투가 어찌나 사나운지 마치 메스가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제가 허 과장님 같은 ‘상류층 집안’은 넘보면 안 된다고 하셨죠? 하지만 제 말 잘 들으세요. 첫째, 허 과장님은 제 상사예요. 허 과장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집안 때문이 아니라, 허 과장님의 능력과 인품 때문이에요. 물론... 주 선생님은 이 점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시겠죠.”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둘째, 주 선생님이 그렇게 입에 달고 사는 그 ‘계층’은 선생님이 스스로 만든 핑계 아닌가요?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런 걸로 연약하고 열등감 가득한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고요. 그렇게 하면 본인이 정말 못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주시윤은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분노와 수치심에 손을 들어 남예린을 향해 삿대질했다.“남예린, 네 주제 좀 알고 떠들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하지 마. 네 출신이 어떤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제 출신이 뭐가 어떻다는 거죠?”남예린이 주시윤을 바라보았다.“저희 부모님은 중견기업 직원으로 일하며 평생 성실하게 살아오셨어요. 누구 물건 훔치거나 빼앗은 적도 없고요. 저는 제 성적으로 의대에 합격했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으며 제 능력으로 해외 연수 기회도 얻었고 귀국 후에는 대학병원에 입사했어요.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고 한 단계 할 단계 제 실력을 쌓으면서 위로 올라왔어요. 모두 내 힘으로 이룬 건데 제 출신이 어떻다는 거죠?”조용했던 복도에서 갑자
남예린은 고개를 숙여 물을 한 모금 마셨다.몸을 돌리던 순간 뒤에 있던 사람과 거의 부딪칠 뻔했다. 물잔도 같이 흔들리며 손등에 몇 방울 튀자 얼른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고개를 들자 주시윤이 바로 코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남예린은 이 사람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다.주시윤은 흰 가운 안에 짙은 남색 폴로 셔츠를 입은 채 복도에 서 있었다. 깃은 빳빳이 세운 채 머리는 빈틈없이 잘 정리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또 잔뜩 긴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남예린은 지나가기 위해 몸을 옆으로 비켰다.“그래...”바로 그때 주시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남예린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갑자기 나를 거절한 이유 이제 알겠어.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노리고 있었던 거네.”남예린은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믿기 어려운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시윤을 바라보았다.주시윤이 남예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에는 경멸도 있었지만 마치 대단한 것을 알아챈 듯한 득의양양함이 가득했다.“그래, 이제야 이해가 가.”뭔가 오래된 와인을 음미하듯 말끝을 길게 끌었다.“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겠지.”목소리는 낮았지만 상대방을 깔보는 태도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조심해, 높이 오를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픈 법이야. 너 같은 출신은...”잠시 말을 멈추고 남예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자로 재듯 그녀의 얼굴에서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나 같은 사람과 제일 어울려.”물잔을 쥐고 있던 남예린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허 과장님 같은 상류층에...”주시윤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말투는 마치 멋모르는 아이에게 설명하듯 무심하면서도 심드렁했다.“네가 닿을 수나 있을 것 같아? 상류층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남예린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본인의 능력이 걸맞은지도 생각해 봐야지. 인정할게, 네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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