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야...”나영옥이 목이 메어 육민재의 이름을 불렀지만 육민재는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차에 올라탔다.“할머니, 우리는 오지 말아야 했어요.”“하지만 육씨 가문은 이렇게 끝날 수 없어!”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땅을 쳤다.“그때 내가 막지 않았으면 넌 도아린이랑 결혼했을 거고 우리 육씨 가문도 절대로 오늘의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거야.”육민재는 한숨을 쉬며 비와 눈물로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나영옥은 평생 강하게 살아왔고 그는 그런 할머니의 손에 키워졌기에 도저히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만약 그때 내가 용기 있게 싸웠더라면, 아마도...’그는 핸들을 꽉 쥔 채 방향을 돌려 차를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던 배건후는 도아린의 차 옆에 다가갔다. 문을 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나왔다.살기를 띤 배건후의 얼굴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그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이 늘어져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도아린은 초라한 그의 몰골을 무시하고 차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대문에 다다랐을 때,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그를 돌아봤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감기 조심해요.”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고 고통스러워 보였던 얼굴도 미세하게 변했다.“그럴게.”대문이 열리고 일북이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문을 닫을 때, 그는 배건후를 한 번 더 노려봤다.“아가씨, 저건 다 쇼하는 거라고요. 그러니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도아린은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머리를 말리고 잠자리에 들었다.침대에 누운 후, 그녀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배건후가 보낸 다양한 친구 요청 알림이 떠 있었다.[집에 도착했어.][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감기약도 먹었어.][당신도 일찍 자. 육씨 가문 일은 내가 처리할게. 더 이상 당신을 찾아가지 않을 거야.][아직 안 자?][자기 전 따뜻한 차
육하경의 시신은 인양되자마자 화장되었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었다.게다가 그의 양부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육민재의 이복형제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육민재와 나영옥뿐이었다.그래서 육민재는 바다에서 건진 시신은 절대 육하경일 리 없다고 더욱 확신했다.“아가씨.”일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만약 육하경이 미리 아가씨의 그림 스타일을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을 준비해 둔 거라면요?”도아린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내 스타일을 따라 할 수 있는 화가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하지만 곧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문신을 새길 때, 원래 이빨 자국 모양을 새기려던 걸 즉흥적으로 입술 모양으로 바꿨어.”도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설령 하경 씨가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해도... 그건 진짜 내가 직접 새긴 문신이에요.”그 사진이 조작이 아니라면 사진에 있는 문신은 분명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었다.“자상훈을 조사해 봐.”도아린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그 사람은 하경 씨의 오른팔이었으니 하경 씨가 정말 살아 있다면... 분명 자상훈이 뭔가 알고 있을 거야.”“알겠습니다.”일북은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그 시각, 도심 속 한 고급 호텔의 VIP룸.고유리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곧 직원이 도착할 거예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다 마침 계단을 오르던 배건후와 마주쳤다.깔끔한 정장 차림에 단정한 머리와 여유로운 분위기는 누가 봐도 막 수습을 시작한 신입 사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건후 씨!”고유리가 인사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건후 씨! 걱정 마세요. 우리 아버지랑 저는 건후 씨 편이에요! 도아린 그 여자한테 기죽지 않게 도와드릴게요!”고유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이제야 알겠네. 왜 그 자리에 꼭 배건후여야 한다고 했는지.’배건후는 가까이 다가온 여자의 손길을 매몰차게 피하며 냉정한 눈빛을 보냈다.“진서윤 씨
배건후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그날 대형 선박에서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세 가족도 장기 이식이 필요했었다.‘그 사람들도 육하경이 특별히 도아린한테만 더 신경 쓴다는 걸 봤을 거야. 이식 수술이 중단된 마당에 경찰한테 화풀이할 수는 없으니까 도아린을 타깃으로 삼은 거지. 루머를 퍼뜨리면서 말이야.’그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진서윤의 심장이 조여왔다.그녀는 배건후가 도아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했다.“도아린 씨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거죠? 전 도아린 씨가 처음부터 육하경 씨와 짜고 친 거라고 봐요. 그러니까...”“진서윤 씨.”배건후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말조심하세요.”진서윤은 말문이 막혔다.고유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배건후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들어가시죠.”고유리는 사람들을 룸으로 안내했다.이번 프로젝트는 고위직 사람들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전에 문제가 발생했던 만큼 이번엔 감독 기관까지 추가되었던 것이다.배건후가 들어오는 걸 보자 감독 기관과 도시 정비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배 대표님!”“배 대표님, 오셨군요.”전에는 배건후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말이다.지금 실권이 없다고는 하지만 기획서도 그가 작성한 것이었고 한경 그룹에서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지 확실치 않으니 당장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하지만 오직 진우석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딸이 배건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배건후가 다시 일어서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다.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서든 아니든 배건후는 결국 진서윤과 사귀게 될 것이고 만약 두 사람이 만약 결혼이라도 한다면 진우석은 두 사람이 이혼하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배 대표님, 앉으시죠.”진우석은 장인어른인 같은 태도로 맞은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배건후
그들은 일 때문에 온 것이지, 두 사람의 연애사가 궁금해서 온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우석의 체면을 차려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서윤이 한경 그룹의 대표를 모욕한 이상 앞으로의 협력 과정에서 충돌이 생길 게 뻔했다.이 프로젝트는 이미 오랫동안 끌어왔기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개인적인 감정 문제로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면 진우석은 고위층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감독 기관 사람들은 프로젝트 진행 속도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진우석은 자신의 국장 자리가 위태로울까 봐 마음을 졸였다.그는 도아린이 수작을 부려 모건 그룹을 손에 넣은 것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은 사적으로만 해야 했다. 배건후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서윤아?”진우석이 딸을 바라보며 사과하라는 눈치를 주었다.진서윤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배건후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앞으로 안 그럴게요.”“앞으로요? 오늘 일은 어떻게 할 건데요?”“배건후 씨, 사과도 했잖아요. 도대체 뭘 더 바라는데요?”진서윤이 화를 냈다.배건후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서윤 씨는 저희 그룹 대표님을 모욕하셨어요. 그저 사과하는 걸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잖아요.”“제가 언제 모욕했는데요? 전 사실만 말했어요!”진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그 여자가 다른 남자들과 얽혀 있다는 소문이 돈 것도 사실인데 건후 씨는 왜 여전히 그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며 말했다.“방금 서윤 씨가 한 말은 전부 녹음됐어요. 모욕인지 아닌지는 판사님께서 판단하겠죠.”그는 진우석을 흘끗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따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진 국장님이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배건후의 말은 처음엔 경고였지만 이제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진서윤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녹음을 공개하겠다는 뜻이었다.현재 여론은 진우석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그는 국장이라는 자리
진서윤은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서윤아!”진우석이 재빨리 일어나 딸을 안았다.“서윤이는 심장병이 있어요. 이미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했나요?”고유리가 배건후를 바라봤다.진서윤은 불리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진우석이 이를 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계속 몰아붙이면 그들이 옳더라도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진서윤을 차갑게 바라봤다.“서윤 씨가 심장병 환자라면 먼저 약부터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진우석이 멈칫했다.감독 기관 사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맞는 말이었다. 심장병이 있다면 응급약을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했고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복용해야 했다.하지만 진우석은 그녀를 부축하기만 할 뿐, 약을 먹이지도, 물을 건네지도 않았다.진서윤은 숨이 가쁘다고 했지만 얼굴빛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건후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창백해졌다.“약을 먹지 않아도 나아지는 걸 보니 심각한 병은 아닌가 보군요.”배건후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웠다.“우리 도 대표님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계십니다. 진서윤 씨의 모욕적인 언행으로 우울증이 악화된다면 한경 그룹의 손실을 진 국장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진우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푸르스름해졌다. 그는 진서윤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사과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배건후가 신고라도 해서 그의 비리를 폭로하면 그는 직장을 잃을 것이고 가족 모두가 불행해질 터였다.진서윤은 이번엔 정말 울컥해서 숨을 헐떡이며 울음을 터뜨렸다.“우리 대표님을 모욕해 놓고 정작 본인이 울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고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진서윤이 고개를 들어보니 고유리가 휴대전화를 들고 촬영하고 있었다.‘내가 우는 모습까지 전부 녹화된 거잖아?’진서윤은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앞으로 헛소문을 믿거나 퍼뜨리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알겠습니다.”고유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시간이 되자 도아린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했다.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도아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윤가인 일 거라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말했다.“윤 비서님, 점심 뭐 드실 건가요?”“닭볶음탕이랑 계란찜.”도아린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배건후가 도시락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도아린 앞에 내밀었다.“먹어봐.”도아린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건후 씨가 만든 거예요?”“응.”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매운 거 좋아하잖아. 일부러 좀 맵게 했어.”“운영팀 일도 바쁠 텐데 일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요? 굳이 이런 걸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도시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요리를 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오전에 고유리와 함께 감독 기관과 도시 정비국 사람들을 만나러 갔으니 이 음식들은 분명 아침에 준비한 것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요리한 게 분명했다.배건후의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그는 도시락을 쥔 손을 거두지 않고 고집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어봐.”도아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다 검은 무언가를 집었다.“고기가 탔잖아요. 불이 너무 세서 겉은 탔는데 속은 덜 익었어요. 그리고 이런요리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거예요. 이렇게 도시락에 넣어두면 눅눅해지잖아요.”배건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왜 아침부터 이런 걸 준비했어요?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해 가면서...”‘건후 씨 시간뿐이 아니라 내 시간도 낭비한 셈이지. 배달을 시켰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배건후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예전에 에이트 맨션에 살았을 때는 아침 몇 시에 일어나든 항상 따뜻하고 맛있는 아침밥이 준
“대표님...”윤가인이 말을 하다 말고 배건후 손에 들린 도시락을 보았다.그녀는 재빨리 포장 봉투를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대표님은 굳이 가져다드릴 필요 없겠네요.”도아린은 사실 그녀가 든 음식을 두고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배건후가 만든 음식은 보기만 해도 영 별로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가인은 이미 문을 닫고 도망쳤다.“배달 음식 먹고 싶어?”배건후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다시 가져오라고 할게.”“됐어요.”도아린은 젓가락을 들고 닭고기를 집었다.“이거나 먹죠.”‘정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정도면 식당에 가면 되니까.’배건후는 미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도시락을 열었고 둘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비주얼은 별로였지만 의외로 맛은 괜찮았다. 맵고 자극적인 맛이 도아린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그녀가 식사를 하는 사이에 배건후는 그녀에게 따뜻한 꿀물을 한 잔 타주었다.배건후가 지금의 절반만큼이라도 도아린을 배려했더라면 이혼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배건후는 매운 음식을 못 먹는 편이었다. 그래서 닭고기 하나만 먹고도 매워서 기침을 했고 얼굴이 새빨개졌다.“억지로 먹지 않아도 돼요.”도아린이 닭고기를 자기 쪽으로 모두 옮기자 배건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예전엔 네가 항상 맞춰줬잖아. 이제 나도 네 입맛에 익숙해져야지.”말을 마친 그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화제를 돌렸다.도아린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자 배건후는 매우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현실적이지는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몇몇 포인트는 꽤 괜찮았다.그는 전혀 비웃거나 깎아내리려는 의도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그녀의 아이디어에 대해 평가했다. 오히려 격려와 긍정적인 피드백, 조언을 해줬다.오후가 되자 다시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도아린은 자신이 맡은 일을 마무리한 후, 브레인팀을 불러 작은 회의를 했다.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배건후의 조언을 결
“어제도 술에 취해서 강씨 가문 경호원들한테 들려 나갔거든요.”진수혁이 서류를 찾고 자리로 돌아가자 변슬기는 황급히 휴대폰을 돌려주며 미소를 지었다.“도 선생님,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게요. 대표님과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도아린은 그녀의 눈빛을 읽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했다.변슬기가 떠나자 진수혁도 물었다.“걔가 너 괴롭혔어?”“아뇨. 그냥 안 맞아서 헤어진 거예요.”진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연남시 프로젝트 말이야. 내가 참여한 부분도 있었거든. 지금은 한경 그룹이 맡고 있으니까 인수인계를 해야될 텐데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다줄게.”“그럼 올 때 슬기 씨 데려와요.”도아린의 말에 진수혁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내 비서를 데려갈 거야.”“비서는 오빠 일 도와야 하니까 데리고 오는 거고 슬기 씨를 데려오는 건 제 부탁이에요.”도아린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약속했잖아요. 잊어버리면 안 돼요.”그녀가 유쾌하게 미소 짓는 걸 본 진수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데려갈게.”두 사람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도아린은 진범준과 윤명희의 근황을 물었다.윤명희가 스스로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진범준은 도우미를 붙여 그녀를 돌보게 했다. 회사는 큰아들에게 맡겼고 보석점은 작은 아들에게 맡긴 후, 그들 부부는 자가 여행을 떠났다.출발하기 전 그들은 두 아들에게 당부를 전했다.“아린이 혼사부터 해결하고 그다음이 너희 차례야. 너희들이 동생을 내버려두고 먼저 연애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도아린은 윤명희의 SNS를 열었다.제일 최근 게시물은 3일 전이었다. 그들 부부가 커플 운동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모습이었는데 사진만 봐도 넘치는 애정이 느껴질 정도였다.첫 번째로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뜻밖에도 주현정이었다.한때는 그녀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했었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식들도 건강했고 사업도 성공적이었다.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그녀의 결혼은 완전히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