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의 아들기왕비가 증오심에 차서, “하여간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 그 쌍놈의 자식이 진짜 희열이를 써먹으려고 해요. 공주의 혼인날 신부 배웅을 간다는 핑계로 불순한 마음을 품고 희열이의 상대를 물색하러 갔던 거예요. 이번에 이리 나리 댁 피로연에 참석한 강남의 부유한 상인 이초(李超)는 포목점으로 집안을 일으켜 재산이 많은데, 쌍놈의 새끼가 글쎄 이초에게 사돈을 맺자고 했어요.”원경릉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사돈을 맺자고 하면 그냥 맺어지는 겁니까? 군주의 혼사인데 궁중에서 주관하지 않나요?”“아바마마께서 지금 상인들을 구슬리는 중으로 아마 반대는 하지 않으실 게 분명해요. 기왕이 힘을 써서 수작을 부리면 아바마마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실 수 없을 겁니다.” 기왕비는 주먹으로 차탁을 치며 눈을 부라렸다. “희열이는 이제 고작 12살이예요, 그 놈은 정말 미친 거라고요.”“맞아요, 희열이는 이제 겨우 12살이니 정혼을 했다고 한들 뭐 할 수 있겠어요?” 원경릉은 정말로 기왕이 무슨 속셈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기왕비가 차갑게, “제가 오늘의 인맥을 가진 건 돈으로 만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기왕을 지지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어요, 전부 기왕이 황제의 장자라는 신분 때문인데……” 기왕비는 밖을 살펴보고 목소리를 낮춰,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고, 문하에 책사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두려면 역시 돈을 써야 하니까, 다른 사람의 돈을 끌어 다 쓰려는 거예요, 자신이 대사를 치르기 위해.”원경릉이 고개를 흔들며, “어디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지? 의미가 있나? 풀려나니 여전히 반성할 줄을 모르고 여전히 가족을 괴롭히는 이런 종류의 인간은 정말 개돼지만도 못해요.”원경릉은 마음속으로 열불이 치밀었다. 지금 기왕이 하는 꼬라지가 꼭 자신의 못난 아버지 정후 같기 때문이다. 여자의 비위를 맞추거나 딸을 팔아서 라도 권세를 원하는 부류.기왕비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몰래 이 일을 꾸미면서 원래는 내 눈을 속이고 태후께 가서 아바마마
희열이의 정혼원경릉의 걱정이 바로 그것으로 맥이 빠진 채, “왜 북당은 이렇게 가난해진 걸까요?”이리 나리가, “백성들은 그래도 괜찮아, 그런데 조정은 치수다, 관계사업이다, 북방 비적 토벌과 북막과의 전쟁에 너무 많은 은자를 썼지. 거기에 요 몇 년 서북쪽은 가뭄이 들었고, 강남은 수재가 많이 발생해 폐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나라가 잠잠할 날이 없었어. 하지만 태상황께서 다스리던 시절부터 이미 점진적으로 상황이 급박해지긴 했어, 태상황 폐하께서 퇴위하시기 몇 년 전부터 중농억상 정책을 실시했지만 계속 실패했지. 조정은 세금을 거둬들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생을 구호하고 보조해야 했어. 그나마 폐하께서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정도지, 그렇지 않았으면 쇠락 일변도로 북당은 오늘의 모습조차 없었어.”원경릉은 이리 나리에게 경탄이 절로 나왔다. “바늘땀 같은 좁은 틈을 뚫고 사업을 이렇게 크게 일궈 내다니 대단하셔요.”이리 나리가, “북당은 전에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해 백성들도 부를 축적했고, 거상과 후작들은 가문의 재산을 두둑하게 모아뒀어. 거기에 인구가 많으니 각종 수요가 많아. 조정에 호재가 되는 조치가 없었을 뿐이지 만약 생긴다면 상업은 크게 발전하고 북당은 일찌감치 번영하기 시작할 거야. 태자가 이번에 제출한 상업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옳은 길이야. 하지만 일정부분의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지.”원경릉이, “ 누가 그 희생이 되고 싶겠어요?”“팔자가 기구한 사람이? 희열 군주처럼 좋은 않은 아비를 타고 태어난 경우처럼. 이 천벌 받아 마땅한 인간!”원경릉은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 희열이는 자신을 선생님으로 모신 이래 매번 와서 안부인사를 하는 착하고 철든 아이다.그리고 기왕비가 원래 지혜롭고 계획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번에 마주한 건 외부의 속고 속이는 계략과 음모가 아니라 현 황제의 정책이다.이건 기왕비 혼자의 힘으로 반항할 수 없다.“방법이 없나요?” 이리 나리가 고양이를 내려놓고, “사실 황실의
부자의 수라저녁 수라는 괜찮은 편이었다. 국 하나에 반찬이 4개, 밥은 알아서 먹고 싶은 만큼이다.4가지 반찬 중 2가지는 고기 요리이고 2가지는 채소 요리, 국은 닭개장으로 양은 많지 않았지만 소담하고 정갈하게 담았다.명원제가, “술 마실래?”우문호가 고개를 흔들며, “소자 최근 절주 중입니다. 원 선생이 싫어해요.”“네 건강을 생각해서 그렇지.” 명원제가 말했다.우문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분위기가 적막한데 부자가 허물없는 얘기를 한 적이 별로 없고 예전에 같이 식사할 때는 전부 일 얘기로, 취지는 같이 밥을 먹으며 일상사나 나누자는 것이었지만 막상 할 말이 없다.왜냐면 그 일상사가 동시에 두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명원제는 아들에게 죄스런 마음이 있는데 아들의 어마마마를 죽인 것 외에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아껴주지 못한 아들이 우문호기 때문이다.우문호는 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철이 빨리 들어서 어디다 둬도 손이 별로 가지 않는 아이였다. 잘못 자랄 리도 없는 지라 어른스러운 아이는 부모가 덜 신경쓰기 마련이고 또 그래서 마음이 덜 가기도 했다.지금 우문호는 한 사람의 몫을 감당하고 있고 명원제는 나날이 골치 아픈 정무에 시달리며 지치고 힘들어 때론 아들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식사를 마치고 명원제가 젓가락을 놓더니 주변에 사람들을 물리고, “어마마마 일로 아바마마를 원망했지?”우문호가 손을 닦으며 눈을 내리깔고, “아뇨, 어마마마는 자업자득이셨습니다.”“짐은 현비에게 많은 기회를 줬어.” 명원제의 목소리에 한숨이 베어 있다. “그런데 잡지 않았지. 네 말이 맞다. 자업자득이야.”우문호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이 일은 줄곧 마음 한 켠에 있던 얘기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계속 덮어두면 시간에 묻혀 천천히 잊혀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지금 아바마마께서 이 얘기를 꺼내니 마음 속의 괴로움이 다시 되살아났다.이 순간 우문호는 갑자기 일곱째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일곱
속이 타는 제왕우문호는 출궁한 뒤 제왕의 별채로 갔다.이곳은 호젓한데 마당에 등조차 몇 개 안 달려 있어 도처에 어둠이 옅게 깔려 있다.하인에게 물어보니 제왕은 연무방(練武房)에 있다며 우문호를 안내했는데, 제왕은 마침 손에 장검을 들고 검법을 연마하는데 뜻밖에도 상당히 유창하다.우문호가 속으로 놀라며 일곱째가 검법을 연마한다고? 진짜 해가 서쪽에서 떴구나.우문호는 순간 흥이 올라 안으로 들어가 검을 집더니 대련을 시작하는데, 예전이었으면 기껏해야10초식쯤 펼칠까 말까 인데 오늘밤은 무려 50초식을 넘겨 제왕의 옷깃이 베어지고 나서야 대련을 멈췄다.제왕이 약간 숨을 헐떡였으나 의기양양한 얼굴로, “형, 어때요? 안 본사이에 몰라보겠죠?”우문호가 검을 거둬들여 던지자 검이 거치대에 ‘착’ 제대로 놓였다.“그래 괜찮아졌네. 상당히 늘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검법에 심취한 거야?” 제왕이 땀을 닦으며 다소곳하게, “책이 좀 지겨워져서 무술 연습을 좀 한 거예요. 뭐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동그란 얼굴 계집애 때문이지?” 우문호의 한 마디가 정곡을 찔렀다.제왕이 허둥거리며 눈빛을 피하고, “헛소리 집어치워요!”“형제 사이에 숨길 게 뭐가 있어? 형한테 사실대로 털어놔.” 제왕이 소매를 흔들며 담담한 표정으로, “사실이던 거짓이던 바뀔 건 없잖아요. 걔 곧 혼인한다 던데. 아니에요?”“응 혼인한다더라,” 우문호가 사람을 시켜 차를 끓여오라고 하더니 제왕에게 다가가 무릎을 발로 차며, “하지만 네가 쟁취하려고 애써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걸.”“애쓴다고 소용 있나요? 걘 정혼했는데.” 제왕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고 피곤한듯 힘이 없어 보인다.“네가 정말 걔를 좋아하는지 확신해? 그럼 넌 주명취를 내려 놓을 수 있어?”제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형이 지금 이름을 애기하지 않았으면 기억도 못했을 거예요. 눈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났네요. 진짜 빠르죠. 사실 걔가 무과 장원이랑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머리속이 온통 걔로 가득차서 주명취는
원용의 떠보기우문호가 일어서서 제왕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갔다.초왕부로 돌아와 원경릉에게 얘기하니, “용의한테 나오라는 약속을 잡는 건 어렵지 않은데, 지금 걔 마음이 어떤 지 모르겠어. 만약 무과 장원이랑 이미 정이 들었으면 일곱째가 나서서 끼어들 필요 없을 것 같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걔 생각을 떠보고 애기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우문호도 동의하며, “일곱째 사람이면 도망가지 않을 거고, 일곱째 사람이 아니면 구해도 소용없지. 일단 가서 물어봐 그리고 희열이 일로 오늘 아바마마께서 날 궁으로 부르셨는데 느낌이 아바마마께서는 동의하시는 거 같아. 나더러 사람을 강남으로 보내서 살펴보라고 하시더라. 이미 소홍천을 보냈지만 내일 서일한테 다녀오라고 해야겠어. 큰형이 분명 이 소식을 알 테니 사람을 보내 놓으면, 서일이 본 건 표면이고 소홍천이 보는 건 이면일 거야. 둘이 정반대면 딱 인데. 그러면 아바마마 앞에서 말씀 드리기가 좋거든.”“맞아, 만약 서일이 본 게 전부 아름답고 선한 거고, 소홍천이 어두운 곳에서의 더러운 일면을 찾아내면 꾸며낸 명성이란 게 들키는 셈이네.” 원경릉이 말했다.이 일은 잠시 제쳐 두고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다음날 원경릉은 사식이를 시켜 원용의를 건너오라고 했다.원용의는 참신한 살구색 비단치마를 입고 목이 긴 가죽 신 차림에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며 들어왔다. “방금 밖에서 말 타고 돌아왔는데 원 언니가 절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한테 뭐 득 되는 거 있어요?”원경릉은 원용의가 쾌활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우리집에 무슨 득 될 게 있겠어? 새 신부가 될 사람은 넌데, 내가 원씨 집안에 가서 피로연 축하주 얻어먹는게 맞지.”원용의가 깔깔 웃으며, “마시지 마요, 술 마시면 주사 장난 아니잖아요.”원경릉이 원용의에게 앉으라고 권하고 차를 준비시키더니 원용의의 온통 발그족족한 얼굴을 보며, “누구랑 말 타러 갔는데?”“박형이랑요!” 원용의가 아무 생각없이 내 뱉았다가 조금 아닌 듯 싶어서 웃으며 손을 내젓더니,
제왕의 실망제왕 쪽에서는 원경릉이 원용의와 약속을 잡아줄 거라 철썩 같이 믿고 이틀간 계속 원용의에게 할 말을 연습했다.한마디 한마디, 쉼표와 표정까지 여러 번 연습했지만 긴장됐다.하지만 우문호가 사람을 시켜 원용의와 제왕이 만날 약속을 잡지 못했다며 지금 원용의 마음 속이 온통 무과 장원에게 가 있다고 알려왔다.제왕은 칠흑 같은 방안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쓴 웃음을 지었다. 다섯째 형수는 최후의 희망이자 최후의 보루였는데 이렇게 동시에 꺾이고 무너져 버릴 줄 몰랐다.어떤 사람은 잃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뼈 속 깊이 실감했다.어둠 속에서 제왕이 생각한 건 두 여자의 모습이었다.제왕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도 도무지 자신과 주명취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 릴 수가 없다.그런데 원용의와 같이 있던 순간순간은 그렇게 사소하고 평범했지만 온통 빠져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제왕의 머릿속에서 주명취는 점점 사라지고 제일 많이 생각하는 건 원용의와 같이 보낸 시간이다.제왕은 전에 원용의의 손을 잡은 적이 있는데, 손가락 피부는 조금도 매끄럽지 않고 손가락에 마디가 생겨서 주먹을 쥐고 때리면 코뼈 정도는 가볍게 부러질 참이다.제왕은 전에 원용의의 얼굴을 떠올려 본 적도 있는데, 티 없이 섬세한 얼굴에 건강한 피부, 맑고 촉촉한 눈망울을 굴려 흘끔 자기를 보고 웃을 때 제왕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또 제왕은 원용의가 노래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맑게 울리는 감동적인 목소리로 가사는 정확하지만 음은 완전 엉망진창이라,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가 떨어지고, 올빼미조차 울부짖으며 어둠속으로 날아가게 만들 정도였다. 제왕은 귀를 막고 제왕부 여기저기로 도망쳐 다녔다.제왕이 상심하고 낙망 했을 때 원용의가 함께 하며, 거칠고 제멋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애타고 근심하는 얼굴로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제왕은 원용의를 가진 적이 있다. 그 때 제왕이 손을 뻗기만 했어도 원용의는 자신의 손을 제왕의 손바닥 안에 넣고 이 풍진 세
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진범아침에 일어나 보니 등이 흠뻑 젖에 있고 머리카락도 한웅 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거울에 비친 모습도 확 늙었다.“아바마마께 어마마마를 뵈러 오시라고 할까요?” 제왕이 물었다.황후는 격하게 손을 휘젓더니 얼굴까지 순간 하얗게 되면서, “아니, 오시라고 하지 마. 전혀 필요 없어.”너무 격한 반응에 제왕은 의심이 들면서, “아바마마가 두려우신 겁니까? 아바마마께서 꾸짖기라도 하셨나요?” 황후도 자신의 반응이 지나치게 격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머쓱해 하며, “아냐, 네 아바마마께서 바쁘시니까 어떻게 내 몸때문에 걱정을 끼쳐 드릴 수가 있겠어? 괜히 귀찮게 하지 말아라.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그럼 아마도 과로가 겹치신 듯 하니 궁 안에 일은 황귀비마마께 더 많이 분담하세요.”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지금 황후가 관리하는 게 뭐가 있다고? 전부 황귀비가 관리하고 있다. 현비가 공주를 인질로 잡은 사건 이래 황제는 황후와 귀비의 권한을 박탈하고 덕비를 황귀비로 품계를 올린 데다 태자의 어마마마이기도 하니 신분 상으로 황귀비는 황후를 누르고도 남는다.“음, 그리고 제왕비를 고르는 일은……”제왕이, “지금은 거론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지요.”황후는 제왕이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안다. 제왕의 성격을 받아줘서 천천히 진행하면 10년이 지나도 진전이 없을 것이기에 아예, “더이상은 못 기다린다. 다음달 중으로 준비하마.”다음달 중이면 원용의가 무과 장원과 혼례를 치른 전후다.제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어서 네 혼사를 매듭지어야 어마마마의 마음도 좀 안정이 될 것 같구나.” 황후가 특히 절박한 것은 지금 경사가 있어야 황제가 황후에게 갖는 의심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그래도 현비 일이 발생하기 전처럼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는 못할 것이다.제왕이 여전히 대답을 안하니 화를 내며,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는 거야? 도대체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니 주명취야 원용의야? 어쨌든 둘 다 혼인할 수 없는
명원제의 속마음명원제가 냉소를 지으며, “경여궁 밖에 금군이 지키고 있었어, 현비가 미쳐서 날뛴다고 해도 금군이란 관문을 지나야 해. 구사에게 금군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해라. 누가 황후에게 포섭됐었는지, 전부 하나하나 찾아내 엄중히 처벌하도록, 용서란 없다.”목여태감이 주저하며, “폐하, 당시 현비마마께서 달려 나오실 때 비녀로 자신의 목을 겨누셔서 금군도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명원제가 탁자를 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핑계에 불과해. 안에 결탁한 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쉽게 빠져나왔겠느냐? 그리고 경여궁 안에 날카로운 무기가 얼마나 많았어? 너희들 현비 장신구함을 검사해 봤어? 궁에 장인은 그런 걸 만들지 못하게 돼 있어. 현비는 궁 안에 사람이네. 명을 받고 외출을 하면 얼마나 나가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부 보고해야 해. 찾아, 샅샅이 찾아내. 어느 놈이 현비와 소씨 집안을 연결해 소식을 전했는지, 현비에게 이런 예리한 무기를 준비해 줬는지.”목여태감은 황제가 대노한 것을 보고 감히 더는 금군을 감싸지 못했다.사실 다들 빤히 알고 있다. 경여궁에 교활한 계략이 어찌 없을 수가 있을까? 단지 목여태감 생각에 머리카락 한 올을 당기면 몸통이 딸려 나올 수 있으니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각 궁의 인사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어느 궁이든 다른 궁과 내통하는 자가 있고, 목여태감 본인조차 태상황 시절부터 그랬다.정말 조사하기로 든다면 후궁은 아마 일대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다.거기다 황귀비가 막 육궁을 관할하자마자 엄중한 조사가 시작되면, 일부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으로 적을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만다.하지만 목여태감도 이번에 황제가 분노한 의도를 안다. 황후를 처단할 마음은 없지만, 분노를 어딘 가에 쏟아내야 하겠기에 금군과 경여궁의 예전 궁인들에게 화풀이 하는 것이다.명원제가 천천히 냉정을 되찾고 일어나 뒷짐을 지고 나갔고, 어서방 안은 궁인들이 황제의 이전 습관대로 편전의 등불을 전부 환하게 밝혀 두었다.편전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