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만독여향: 비단 위에 핀 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By:  오채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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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네가 놓는 자수 한 땀 한 땀이 나를 옭아매는구나." 회귀 전,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독이 든 온천물에 가라앉으며 깨달았다. 다시 산다면 결코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돌아온 이번 생, 그녀는 오직 '나'로서 살기로 했다. 바늘과 실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하필이면 황제조차 두려워하는 사내, 경무왕 연백리의 품으로 도망쳐버렸다. "유품 복원이 끝날 때까지 너는 내 왕부의 사람이다. 감히 누굴 만나려 드는 거지?" 가문을 탈출해 자유를 꿈꾸는 소설아와, 그녀의 미소 한 번에 심장이 뛰기 시작한 냉혈한 연백리. 비단 위에 수놓아진 위험한 로맨스 사극, <만독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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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웁! 큭!큭!’

독기 가득한 뜨거운 온천물이 쉴 새 없이 입과 코를 통해 밀려들어와 숨을 막았다.

발버둥이라도 쳐서 밖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극독에 중독돼 굳어져 버린 그녀의 몸은 서서히 황궁 온천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설아, 너는 황궁 최고의 재인이야!’

대연제국의 황제가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주던 황궁 제일의 후궁이었건만, 이토록 허망하게 죽어가는 꼴이라니. 

‘연각!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온다던 약속만 지켰더라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배신감이 독기보다 더 빠르게 전신을 감돌았다. 

가문을 위해, 오라버니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지옥 같은 황궁으로 들어왔건만. 돌아온 것은 독으로 가득 찬 온천물에 잠겨 죽어가는 비참한 최후였다.

물꽃이 눈가를 덮치며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녀는 가라앉는 손을 뻗어 허망한 물거품만을 움켜쥐었다.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기회가 있다면. 내 반드시 이 뜨거운 독물보다 더한 불지옥을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심장이 멈추던 그 찰나, 온천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증오가 내 영혼을 집어삼켰다.

‘허억! 쿨럭!’

폐부 가득 온천물이 들이차며 소리 없는 비명이 아우성이 되어 몸부림쳤다. 

소설아는 원통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지만, 마비되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몸은 밑으로 밑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

“... 폐하, 이제 조회에 나가보셔야 합니다.”

“으음, 조금만… 조금만 더……”

황제는 소설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폐하,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신첩이 정말 곤란해집니다.”

소설아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황제에게 애원했으나,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황제를 거부할 수 없었다. 

“... 짐은 가고 싶지 않다.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구나.”

황제는 한 줌도 안 되는 소설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뜨겁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폐하……”

소설아는 다시 한번 간곡히 애원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황제의 뜨거운 손길에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몸이었다.

“아아!”

결국 참지 못하고 여린 신음을 뱉어내자,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이런 너를 두고 내가 어찌 떠난단 말이냐? 어서 가라는 거짓말은 이제 그만하려무나.”

“그치만… 어제도 황후마마께 불려가 한식경도 넘게 벌을 받았는걸요.”

“호오, 그래? 많이 아팠느냐? 여기? 아니면, 여기?”

황제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설아의 몸 이곳저곳을 자극하며 짓궂은 능청을 떨었다.

“폐하… 그게 아니라, 서재에서 내훈을 베껴 쓰는 벌을 받았습니다.”

“저런, 손목이 남아나질 않았겠구나.”

황제는 설아의 여리여리한 희고 가는 손목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조회를 거르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하하. 아끼는 소재인이 이토록 간청하니, 내 이번 한 번만 그 청을 들어주마.”

“네? 정말이시지요?”

소설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제를 향해 기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부터 말이다!”

“어멋!”

황제는 소설아를 와락 껴안으며 또 한 번 달콤한 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서공공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황제의 태자 시절을 포함해 벌써 여러 해 황제의 곁을 지키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또 소가 그 계집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셨단 말이냐!”

“예, 황후마마.”

“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셨고?”

“그렇사옵니다, 마마.”

“이런 발칙한 년을 보았나! 감히 밤새도록 황제폐하를 모신 것도 모자라, 조회조차 불참하게 만들어? 죽고 싶어 환장한 게로구나!”

고명한 태부 집안 출신으로 고지식하기 그지없었던 초영황후는 처음 겪는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후전에 찾아가 그 비천한 계집을 당장 요절내달라 떼를 쓸 수도 없었고, 황제 앞에서 울며 하소연하기엔 황후라는 자리가 너무도 무겁고 외로웠다.

태후 또한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적당히 하고 정신을 차릴 줄 알았던 황제가 조회를 불참하면서까지 소설아를 품는 것을 그냥 두고 볼 태후가 아니었다. 

“태후마마 납시오!”

뜨겁고 달콤한 춘몽의 밀어로 가득한 소설아의 거처에 아침 정적을 깨뜨리는 고성이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말로 황제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태후는 직접 아들을 잡아오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런 발칙한 것을 보았나! 기어이 네년이 황제의 눈을 가리고, 귀를 닫을 작정인 것이냐!”

침실 문밖으로 현정태후의 날카로운 일갈이 울려 퍼지자, 그제야 황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황제께서는 어서 의관을 정제하고 밖으로 나오세요!”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강경한 말투로 황제가 밖으로 나오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모후, 이건 너무 과하십니다. 어찌 됐든 내밀한 부부간의 일 아닙니까.”

“만조백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조회에 늦지 않게 참석하셨다면, 이 어미가 아침부터 예까지 쫓아오지 않았을 일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모후. 소자가 잘못했으니 그만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황제는 화가 잔뜩 오른 태후를 진정시키면서도,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고 있는 소설아를 옆눈으로 슬쩍 바라보았다.

얇은 침의 차림으로 아침 서리가 내려앉은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있는 소설아의 모습은 가녀리다 못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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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웁! 큭!큭!’독기 가득한 뜨거운 온천물이 쉴 새 없이 입과 코를 통해 밀려들어와 숨을 막았다.발버둥이라도 쳐서 밖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극독에 중독돼 굳어져 버린 그녀의 몸은 서서히 황궁 온천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설아, 너는 황궁 최고의 재인이야!’대연제국의 황제가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여주던 황궁 제일의 후궁이었건만, 이토록 허망하게 죽어가는 꼴이라니. ‘연각!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온다던 약속만 지켰더라면!’가슴이 찢어질 듯한 배신감이 독기보다 더 빠르게 전신을 감돌았다. 가문을 위해, 오라버니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지옥 같은 황궁으로 들어왔건만. 돌아온 것은 독으로 가득 찬 온천물에 잠겨 죽어가는 비참한 최후였다.물꽃이 눈가를 덮치며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녀는 가라앉는 손을 뻗어 허망한 물거품만을 움켜쥐었다.'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기회가 있다면. 내 반드시 이 뜨거운 독물보다 더한 불지옥을 너희에게 안겨주리라!'심장이 멈추던 그 찰나, 온천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증오가 내 영혼을 집어삼켰다.‘허억! 쿨럭!’폐부 가득 온천물이 들이차며 소리 없는 비명이 아우성이 되어 몸부림쳤다. 소설아는 원통한 마음에 이를 악물었지만, 마비되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몸은 밑으로 밑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폐하, 이제 조회에 나가보셔야 합니다.”“으음, 조금만… 조금만 더……”황제는 소설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폐하,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신첩이 정말 곤란해집니다.”소설아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황제에게 애원했으나, 희고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황제를 거부할 수 없었다. “... 짐은 가고 싶지 않다.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구나.”황제는 한 줌도 안 되는 소설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뜨겁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폐하……”소설아는 다시 한번 간곡히 애원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황제의 뜨거운 손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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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소재인은 어제 황후의 명으로 내훈까지 베껴 쓰느라 몸이 편치 않다 합니다. 모든 것은 짐의 잘못이니 저를 탓하시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지요.”마음이 불편해진 황제가 슬며시 태후의 손을 붙잡았으나,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이 어미가 법도에 따라 다 알아서 할 터이니, 황제께서는 어서 대전으로 드시지요. 모두 폐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국의 천자가 고작 후궁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추문이 돌아서야 되겠습니까?”태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매몰차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서릿발 같은 그녀의 위엄 앞에 황제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는 결국 엎드린 설아를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미련 가득했던 황제의 그림자가 멀어지자마자, 태후의 서슬 퍼런 시선이 바닥에 엎드린 소설아를 향했다.납작 엎드려 떨고 있는 가녀린 어깨 위로, 독기를 가득 머금은 태후의 시선이 잔인하게 내리꽂혔다.“그만큼 알아듣게 타일렀으면 눈치껏 처신했어야지. 이것이 정녕 네가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더냐?”“태후마마……”“네 아비 경북후가 전사하고 가문이 풍전등화일 때, 네 오라비가 작위를 잇도록 뒷배를 서준 것이 누구더냐. 내 은덕으로 근양왕의 사위 자리까지 꿰찼으면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제 분수도 모르고 이토록 오만방자하다니! 입궁하기가 무섭게 감히 내 아들을 홀려 재인 첩지를 받아내더니, 이제는 조회까지 폐하게 해? 네년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하였구나!”“태후마마, 신첩은 단 한순간도 마마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조회를 거르지 않으시도록, 매일 아침 눈물로 간청하며 마마의 뜻을 전하고 또 전하였사옵니다!”“발칙한 것! 당장 그 입을 닥치지 못할까!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감히 폐하를 입에 담다니!”소설아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태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목격한 것은 분노한 태후뿐만이 아니었다.태후의 등 뒤로 늘어선 초영황후와 비빈들.저마다 화려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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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약재는 빠르게 바닥났고, 태의원 앞에서 울부짖는 청아의 애처로운 모습 또한 반복되었다.“청아야…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설아는 청아가 내미는 약그릇을 받아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생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어서 쾌차하셔야 합니다.”설아는 겨우겨우 약탕을 한 모금씩 삼키고는, 모기만 한목소리로 그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폐하는… 폐하 소식은 들었느냐?”“......”청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하긴, 너도 소식을 알기 어렵겠구나. 나를 따라 근신해야 할 터이니…….”“지금은 아무 생각 마시고 그저 빨리 낫는 것만 생각하세요, 마마.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내 얼굴이……?”설아는 당황한 듯 야윈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폐하께서 곧 오실 터인데, 얼굴이 이래서야 큰일이구나. 청아야, 연지를 가져오렴. 분첩도. 어서.”“마마, 이곳에 연지며 분첩이 어디 있겠어요. 우선 기력부터 차리셔야 합니다.”“그래도 이 꼴로 폐하를 뵐 수는 없다. 결코, 그럴 순 없어…….”설아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 했으나, 시든 꽃잎처럼 힘없이 늘어진 몸은 좀처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말리는 청아의 목소리만 더욱 애잔해지던 그때.그토록 그리워하던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외침이 가라앉은 냉궁의 정적을 깨뜨렸다.“황제 폐하 납시오!”그 순간, 창백하게 여윈 설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청아야, 보렴! 폐하께서, 폐하께서 날 보러 오셨구나. 그럼, 그렇지. 날 잊으셨을 리가 없어. 어서 나를, 나를 일으켜다오.”“마마…….”청아는 서둘러 설아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녀의 몸은 좀처럼 뜻대로 움직여주지 못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끙끙대며 씨름을 하고 있는데, 등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드리워졌다.“폐하……!”설아는 반가움에 젖은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대연의 황제, 연각.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가진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설아를 굽어보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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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멈추어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황궁의 정원수에 손을 대느냐!”날카로운 호령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초영황후의 화려한 가마 행렬이 냉궁의 정적을 깨며 도착해 있었다. 황후궁 상궁들은 우르르 달려와 청아의 앞을 막아섰다.“황후마마를 뵙나이다!”청아가 혼비백산하여 바닥에 엎드렸다. 품에 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볼품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황후는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혐오스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냉궁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법도를 모르느냐? 폐하께서 다녀가셨다는 소문에 내 참담한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거늘, 기어이 사고를 치는구나. 태후마마께서 아끼시는 정원수를 꺾어다 이 비천한 곳에서 불이나 지피고 있었다니!”“황후마마, 죽은 가지를 주운 것뿐이옵니다!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닥치지 못할까! 당연히 지켜야 할 법도까지 망각한 주제에 무슨 반성을 하겠다는 게냐? 여봐라, 이것의 주인까지 끌어내어 당장 저 고약한 입들을 다스려라!”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궁들이 안채로 들이닥쳐 침상에 누워있던 설아를 끌어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마마, 마마! 안 됩니다, 재인마마!”설아를 감싸며 울부짖는 청아의 절규를 비웃듯 가혹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잔인한 비명이 냉궁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황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려 매질을 멈추게 했다.“분수도 모르고 폐하를 유혹한 죄만으로도 평생 이곳에 갇혀야 마땅하거늘. 감히 병을 핑계로 폐하를 여기까지 걸음하게 해?”소설아는 심한 매질로 인해 정신이 혼미했지만, 이를 악물며 기어코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표독스러운 황후의 표정에 기가 질릴 법도 했지만, 그저 이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할뿐이었다. “입궁도, 폐하를 모시라던 것도 모두 태후마마의 명이셨습니다. 전 그저 곁에서 차를 올리는 차담시녀로 남고 싶었으나, 저를 폐하의 소침전에 들여 재인 첩지를 받게 하신 분이 바로 태후마마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폐하를 유혹했다 하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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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냉궁에서 마주했던 연각의 그 안쓰러운 눈빛, 제 손을 피하던 찰나의 흔들림, 그리고 행궁으로 가면 살 수 있다던 황후의 가식적인 자비. 그 모든 의심이 하나의 잔인한 진실이 되어 설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이것은 황후가 계획하고, 황제가 묵인한 완벽한 독살이었다.‘너희가, 너희가 감히 나를……!’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독이 되어 전신을 파고들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배신감에 눈앞이 아득해져 간다. 거품 섞인 숨을 내뱉으며 수면 아래로 잠겨가는 설아의 눈에서 핏물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아득하게 숨이 넘어가던 찰나, 그녀는 신이 아닌 스스로에게 맹세했다.만약, 만약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보다 더한 불지옥을 뼛속까지 시린 피의 복수로 되돌려 주겠노라고.아둔했던 과거의 자신들을 후회할 겨를도 없이, 온갖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해주겠노라고.지독한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모든 감각이 멈추며 실낱같던 숨이 마침내 끊어졌다. ***"허억!"격한 기침과 함께 설아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그 아래로 드리워진 희고 보드라운 천으로 만든 휘장. "아가씨!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아이고, 이 식은땀 좀 봐!"당황한 듯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소설아는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사람을 확인하려 애써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청아...?""예, 아가씨! 저 여기 있어요! 어제 장례를 치르다 쓰러지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장례? 누구의 장례?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일으킨 소설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정갈한 방. 꿈에조차 그리웠던 경북후부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지?”“어제 나리의 장례식을 치르다가 아가씨가 쓰러지셨어요!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리시다가 이제 눈을 뜨신 거예요! 얼마나 제가 걱정했었는지!”청아는 따듯하게 적신 물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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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마님, 설아 아가씨께서 문안을 올리러 왔습니다.”청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려한 비단을 몸에 대보며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던 후부인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방금 전까지 사경을 헤매던 애가 벌써 일어났단 말이냐?”소진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부인은 서둘러 어깨에 걸쳤던 비단을 걷어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어색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자, 소설아가 들어서며 가벼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어머니,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소녀 설아,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더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래. 지금 이 후부에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장례를 치르다 말고 혼절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느냐? 조문객들을 진정시키느라 네 오라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쯧!”후부인은 소설아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오라버니, 죄송합니다.”소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소진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괜찮다니, 이제 됐다. 덕분에 마음 편히 네 혼사를 논해도 되겠구나.”소설아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직 상중이고, 오라버니도 있는데 제 혼사를 논하기엔 좀 이른 것 같습니다.”“아니, 얘가 정말!”짜증 난다는 듯, 후부인이 새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신 이 마당에, 네 오라비가 근양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 시집갈 나이가 다 됐으면 가문을 위해서 적당한 곳으로 혼인해서 떠나야지! 보탬이 될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에, 뭐? 상중이라 논하기에 일러? 이런 배은망덕한 것을 보았나!”후부인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몸을 떨다 기어이 찻잔을 집어던졌다. “어머니, 진정하시지요.”소진우가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며 후부인을 말려보았다. “설아,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경북후부는 내가 관직에 나아가 작위를 이어야만 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려면 근양왕의 비호가 꼭 필요한 상황이란다.”“그것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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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설아는 떨리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체념한 듯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순종적인 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알겠습니다, 어머니. 후부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따라야겠지요.”뜻밖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후부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평소처럼 한차례 울며불며 고집을 피울 줄 알았던 딸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답하지 않아도… 아니, 네가 그리 생각해 주니 다행이구나. 어차피 너는 진명후부로 가야만 해. 그게 네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편할 게다. 이만 물러가거라.”후부인은 조금 전과 달리 한풀 누그러진 태도로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설아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뒤를 돌았다.문밖으로 나서는 설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마치 후부인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것은 설아가 직접 선택한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운명이라니.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 당신들이 당연한 듯 나의 생을 저울질하는 사이, 나는 이 지옥 같은 후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줄 테니까.’“아, 잠깐.”후부인은 생각났다는 듯, 소설아를 불러 세웠다. “마침 이번에 황실에서 하사한 비단이 아주 귀한 것들이 많더구나. 그걸로 내 옷을 몇 벌 더 짓도록 해라. 빛깔이 워낙 고우니 그 위에 자수를 아주 화려하게 놓는 것이 좋겠어. 네 자수 솜씨야 장안에서 제일가기로 손꼽힐 만큼 뛰어나지 않느냐. 하사받은 비단에 네가 수를 놓은 옷을 입으면, 태후마마께서 한 번쯤 구경하자고 부르실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게 우리 가문에 얼마나 큰 영광이겠니?”잔뜩 꿈에 부푼 후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들이 궤짝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설아가 직접 혼례복을 짓는 것도 좋겠군요. 붉은 비단도 좋은 게 많아 보였습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황실에서 직접 내려주신 비단이야. 사사로이 축내면 안 된다.”사사로이 축을 내다니. 자식의 혼사에 쓰이는 것만큼 값진 쓰임이 따로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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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다 제가 박복한 탓이지요.”“그게 어찌 아가씨 탓입니까! 하늘의 뜻인 게지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원!”노인은 짐짓 눈시울을 훔치며 그녀의 마음에 들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장례도 치렀고, 저도 마음을 추슬러야지요. 그것보다 이 물건들을 좀 봐주십시오.”“아니, 이것은 아가씨의 자수 도안들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파시라고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더니만!”노인은 입을 떡 벌린 채, 보따리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도안과 자수품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펼쳐보았다. “만화 백조도, 연화 불멸도, 화중군자와 천상화조백란까지! 특히나, 이 화조백란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직물공선에 출품해도 합격은 따놓은 당상일 겁니다! 어찌 이리 감사할 데가! 그렇잖아도 좋은 도안을 찾을 수 없어서 발을 구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노인은 품 안에서 수정으로 깎아 만든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설아의 도안과 자수품을 훑어내려 가던 그의 눈이 돋보기 너머로 기괴할 만큼 크게 일렁였다.“이, 이럴 수가... 한 올의 엉킴도 없구나. 이건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내려와 수를 놓았다고 해도 믿겠어! 아가씨,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건 제가 가진 은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뒷채에서 비상금을 더 챙겨올 테니, 절대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노인은 돋보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미친 사람처럼 뒷채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남긴 돋보기 위로, 설아가 수놓은 연꽃의 정교한 결이 비쳐 보였다.노인이 사라지고 전생의 비연각 만큼이나 고요한 정적이 감돌던 그때였다.콰창―!폭발하듯 터져 나간 보연방의 육중한 문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비명 지를 틈도 없이, 짙은 피 냄새와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가게 안을 집어삼켰다.“큭...!”먼지 구름을 뚫고 들이닥친 것은 검은 망토를 폭풍처럼 휘날리는 한 사내였다. 그의 뒤를 쫓던 자객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쇄도했지만, 사내의 반응은 그보다 반 박자 더 빨랐다.사내의 손에 쥔 검이 허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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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주인장, 혹시 이 예복이 황실에서 하사받은 비단으로 지은 옷인가요?”“그렇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이리 망가졌으니, 전 죽은 목숨입니다요!”황실에서 일일이 순찰을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황실의 하사품에 피가 뿌려졌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찌합니까, 나리! 아이고, 아가씨!”소설아는 울부짖는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탁자 뒤로 돌아가 문을 열고 안에 있던 것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소설아는 대꾸하지 않고, 그 안에서 바늘과 실을 찾아내고는 명주솜을 꺼내어 예복으로 다가갔다. 피가 뿌려진 곳에 덧대어 더 이상 혈흔이 번지지 않도록 조치한 뒤, 빠른 솜씨로 금빛 자수를 수놓기 시작했다. 울부짖던 노인도 어느새 울음을 멈추고, 소설아의 신들린 손놀림에 빠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설아는 마치 춤을 추듯, 아니 새가 날아다니듯 가볍게 금실을 수놓으며 점점이 번져있는 혈흔을 감싸기 시작했다. 설아의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가느다란 금사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고운 비단 위를 누볐다. 핏방울이 튄 자리를 중심으로 금빛 줄기가 정교하게 꼬이며 뻗어 나갔고, 그 끝에는 가늘고 긴 인동초 꽃봉오리들이 맺히기 시작했다.“이, 이럴 수가... 인동초로구나!”노인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듬성듬성 흉하게 튀어버린 핏자국들은 어느새 금빛 넝쿨의 매듭이 되었고, 넓게 번진 얼룩은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 아래의 그늘진 음영으로 완벽하게 가려졌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사가 수천 번 교차하며 만들어낸 인동초 넝쿨은 마치 예복 자락을 타고 실제로 자라나는 듯한 생동감을 뿜어냈다. 붉은 혈흔은 이제 금사 사이에서 은은한 생기만을 더해줄 뿐, 그 어디에서도 죽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세상에... 이럴 수가, 정녕 이럴 수가!”노인은 돋보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예복 자락을 받쳐 들었다.“가린 것이 아니로구나. 아예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어! 핏빛이 금사 사이로 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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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사내는 품속에서 아까 꺼냈던 그 황금빛 명패를 다시 꺼내들었다. 손바닥만 한 명패의 테두리에는 상서로운 기린 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경무왕부라는 네 글자가 중후한 글씨체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소설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보연방의 주인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노인은 마치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더해주었다. “이 명패가 사실이라고 한들, 어쩌라는 거죠?”“나와 같이 가줄 곳이 있다.”“싫어요. 납치는 사절이에요.”설아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나리. 아무래도 둘째 아가씨가 불안할 수 있으니, 시비라도 찾아서 같이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내가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명분으로 요청하는 건데, 불안할 게 뭐가 있지? 이 황금 명패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금빛 명패에 새겨진 네 글자, 경무왕부(景武王府).설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사내가 정말로 그 경무왕이란 말인가.북방의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 돌아온 전쟁의 신.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 칭송받으면서도, 배신자라면 어린아이조차 용서치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황자의 귀한 신분임에도 도성의 어떤 가문도 선뜻 딸을 내주려 하지 않아, 혼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혼담 한 번 들어온 적 없다는 그 잔혹한 전쟁광.설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요.”“당연히 상관이 있지. 이 명패를 본 사람은 내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 소낭자의 시비를 알려주면 내 부하들이 찾아줄 거야.”“기어코 저를 납치하시려는 건가요?”“소낭자. 말은 바로 하지. 난 납치하려는 게 아니야. 협조를 요청하고 있네.”사내는 팔짱을 끼더니, 밖으로 나가자는 듯 가볍게 턱짓을 했다. “저, 나리. 후부에 사람이라도 보내 알려야 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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