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만나보지도 않고, 집안 어른들의 결정으로 혼사를 결정짓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아이들이 몰래 만난 적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대화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길 바랐다.하지만 다섯째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선보는 것처럼 구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부군의 입에서 ‘구식’이라는 말을 듣자, 원경릉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구식인 사람인데 말이다.“혼인 전에 연애 한 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겠소? 여자아이는 연애를 경험해 봐야 하는 법이오.”두 사람은 이미 서로 호감을 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평생을 함께 살아가려면 그저 호감만으로는 부족했다. 인품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잘 맞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눌 관심사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다섯째는 마음속으로 원 선생의 의견을 찬성하지 않았다. 아직 장원급제도 못 한 맥청화를 사탕이와 만나게 하는 것을 큰 손해라고 느꼈다.게다가 맥청화가 사탕이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고, 양가에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것까지 알게 되면, 노력하려는 마음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싶었다. 냉정언은 맥청화가 보기 드문 인재이고, 수보 자리까지 넘볼 만한 능력이 있다고 했었다. 이런 인재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의지가 꺾이는 건 나라의 큰 손실이었다.나라의 앞날을 고려한 다섯째는 단호하게 원경릉의 생각을 반대했고, 사탕과 맥청화의 만남을 반대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럼 내일로 정하는 것이 어떻소?”다섯째가 단호한 눈빛으로 응했다.“내일은 길일이니, 괜찮은 것 같소.”원경릉은 기뻐하며 말했다.“좋소. 그럼, 준비하러 가보겠네.”다섯째는 부인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내는 사랑에 빠지면 기세를 잃는 법. 비록 십수 년을 황제로 지냈지만, 결국 부인 말만 듣는 바보가 돼버렸다.더 어이가 없는 건, 부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행복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느
안대군주는 떠날 때 발걸음마저 비틀거렸다. 밖에 있던 하인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원경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이 나이가 되도록 저렇게 세속적이고 고집스러우니, 자손들이 힘들 것이네.”목여 태감이 말했다.“맥 대인과 혼인한 지 오래지만, 늘 군주의 신분을 내세우며, 자신을 맥가 여인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마께서 오늘 부인이라 부르신 것도, 맥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길 바라신 것이겠지요.”“수십 년간 뿌리내린 성격과 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네. 난 맥 부인이 사탕이를 진심으로 대해주길 바라지도 않네. 어차피 사탕이가 맥가로 시집간다면, 분명 공주부를 따로 하사하여 맥청화와 화목하게 지내게 할 것이지, 고집스러운 집안 어르신들의 억압을 받게 하진 않을 것이네.”“장녕 공주는 정말 복이 많은 분입니다.”목여 태감도 흐뭇하게 말했다. 사탕이가 궁에서 자랐기에, 목여 태감 역시 각별히 아끼는 아이였다.유리전 지붕 위에서, 택란은 사탕이의 손을 잡고 조용히 내려와 살금살금 어화원으로 달려갔다.너무 급하게 달려서인지, 사탕이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무 그늘 밑에 몸을 숨겼는데, 두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기웃거리며 택란의 짓궂은 눈빛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언니, 어머니께서 일부러 안대군주를 궁으로 불러 따끔하게 혼내신 걸 보면, 혼사는 거의 정해진 것 같습니다.”택란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함께 앉았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내려오며 그녀의 밝은 뺨을 은은히 비췄다.“아버지도 어젯밤에 그렇게 말씀하셨다.”사탕이는 말을 이었다. 기쁨으로 물든 표정이 어느새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택란아, 시집가면 지금까지의 삶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아쉽구나.”사탕은 맥 공자가 마음에 들었다. 겉보기에도 훌륭한 인물이었고, ;빠이빠이’도 그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그녀는 아직 어른이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말했다.“황후께서 다정하시고 온화하시다는 말을 익히 들었으니, 제가 솔직히 말해도 노여워하지 않으시겠지요. 모든 일엔 법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저 폐하와 마마의 총애만으로 공주를 책봉하는 것이라면, 북당엔 공주가 남아나지 않겠습니까?”원경릉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한 것이 아니라, 질투심에 찬 말이겠지요. 황실 자제가 아닌 아이가 공주로 책봉되긴 했지만, 친왕의 자식은 군주 책봉조차 은혜를 입어야만 받게 되는 상황이니, 군주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란 결과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법, 과정까지 살펴야 타당하지요. 군주의 조부이신 운친왕은 세자 책봉에 참여하셨고, 사면을 받고 홍수를 막으시다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무상황께서 그때 군주께 작위를 하사하신 것도 대단한 은혜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평민으로 강등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였지요. 반면 충용후는 지난 이십여 년간 황제 곁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며 충성을 다했지요. 비록 서이당은 황실 혈통이 아니지만, 충용후와 폐하의 의리와 정, 폐하께서 서이당을 아끼는 마음을 바탕으로 공주로 책봉하였습니다. 어찌 법도를 어겼다고 하십니까? 혹 폐하의 결단이 어리석다고 의심된다면, 무상황께 재단을 청하셔도 됩니다. 무상황께서도 장녕 공주를 매우 아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녕 공주가 어려서부터 무상황의 곁을 자주 지켰고, 지금까지도 자주 찾아뵙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안대군주의 눈빛에는 점차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황제는 손아래니 크게 무섭지 않았지만, 무상황은 두려웠다.연세가 많은 무상황 오라버니는 정말 무서운 분이었다.원경릉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내 그녀의 성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약자에게는 포악하고, 강자 앞에선 한없이 주눅이 드는 법이었다.역시 안대군주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주름이 가득해질 정도로 환히 웃었다.“이 늙은이가 잠시 정신을 잃었나 봅니다.
택란은 경성에서 지내는 동안 어머니와 속마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원경릉은 사탕이 처음 사모의 정을 느끼게 된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이 시대의 혼인은 부모가 주도하며, 이른바 ‘부모의 명령과 중매인의 말’에 따르고 있었고, 첫 만남에 마음이 끌리는 경우도 많았다. 가문과 인품을 미리 알아봤으니, 처음 만났을 때 눈에 드는지를 봐야 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하는 일도 이곳에선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원 선생은 깊은 감회를 느꼈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이제는 하나둘씩 앞다퉈 사랑을 찾아 나섰고, 자신들의 인생을 시작했다.사탕이의 일은 원 선생도 매우 중시했다. 평소 귀족과 대신의 집안일에 간섭하지 않던 그녀였는데, 사탕을 위해 특별히 안대군주를 궁으로 부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안대군주의 조부는 운왕으로, 무상황조차도 작은할아버지라 불러야 할 큰 어르신이었다. 그러니 무상황과 안대군주는 같은 세대다.엄밀히 따지자면 원 선생은 그녀를 작은할머니라 불러야 하지만, 안대군주의 부친은 그저 군왕 작위밖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운왕의 잘못 때문에, 헌제의 노여움을 사서 안대군주 아버지의 군왕 작위도 매우 억지스럽게 느껴졌다.그래서 안대군주는 명목상 대군주이지만 황실에선 그리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하지만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이 강한 법. 존재감이 없을수록 오히려 더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안대군주의 인맥은 집안 어르신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돈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손자인 맥청화가 체면을 세워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이 노파는 평생 명예와 권세에 빠져 살아왔고, 아직도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대군주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어야 그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었다. 원경릉은 맥청화가 그림을 팔아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안대군주는 그걸 못마땅해했다. 그는 그것을 장사꾼처럼 행동하고 귀족다운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고 여기며, 맥청
택란은 아버지한테서 몰래 들은 소식을 급히 사탕에게 전했다.사탕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두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택란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저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어찌 나를 위해 장원급제를 한다는 말이냐?”“아바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든 말든 언니의 마음이지요.”택란은 느긋하게 대꾸했다.“정말 빠이빠이께서 직접 말씀한 것이냐?”사탕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황제의 말이니 분명 거짓일 리는 없었다.사탕이 옹알이하던 시절, 다섯째는 늘 사탕과 장난치며 놀아주었다. 그리고 사탕에게 자신을 의부라 부르라고 했지만, 옹알이를 갓 시작했을 때라 결국 빠이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렇게 불렀다. “예. 사실입니다.”택란이 짓궂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왜요? 언니도 맥 공자가 마음에 들었습니까?”“무슨 소리. 겨우 한 번 본 사람인데 어찌 마음이 가겠어?”사탕은 고개를 홱 돌려 부정했다. 동생에게 마음을 들키면 오라버니들에게 이를 테니, 절대 들켜선 안 된다.택란은 그녀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놀리듯 말을 이었다.“맥 공자가 마음에 안들면, 아버지께 언니가 반대한다고 말하겠습니다.”사탕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기를 띠고 말했다.“자, 택란아. 우리 경천제 얘기나 좀 해볼까?”“경천제요?”“그래. 경천제가 너한테 푹 빠져서, 너를 위해 무슨 잔치를...”택란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곧장 손으로 사탕의 허리를 간질였다.“그만하십시오.”사탕은 간지러움을 못 참고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애원했다.“그래. 그만하지. 그만하마!”하지만 택란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두 자매는 한참을 뒹굴며 웃다가, 함께 부드러운 침상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두 소녀는 꽃처럼 고왔고, 뺨은 붉게 물들었으며, 눈에는 미래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그들의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미래는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
택란은 맥가에서 나온 사탕 언니를 만나고부터 줄곧 사죄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굳게 굳힌 채 화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언니, 제발 화를 푸십시오. 언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몰래 맥 공자를 관찰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아십니까? 언니가 놓친 부분을 발견했는데, 궁금하지 않으십니까?”사탕은 고개를 돌렸다.“괜찮으니, 말하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거라.”“정말 듣지 않으십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본 것을 전부 잊어버려야지요. 나중에 물으셔도, 생각나지 못할 것입니다.”택란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사탕은 그녀를 주먹으로 툭 쳤다.“어서 말하거라.”“안 듣는다면서요?”택란은 웃으며 도망쳤다.“이렇게 말하셨으니, 저는 입을 다물겠습니다.”사탕은 택란을 쫓아가 허리를 간지럽혔다. 그러자 택란은 그만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연신 살려달라고 했다.“아이고, 말하겠습니다, 그만 놓아주십시오.”사탕은 그제야 손을 멈추고 예쁘게 틀어 올린 택란의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무엇을 본 것이냐? 어서 말해보거라.”택란은 얼굴을 붉히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이내 비밀스럽게 사탕에게 다가갔다.“맥 공자가 언니를 볼 때 눈망울에 빛이 났었습니다.”그러자 사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눈망울에 어찌 빛이 없다는 말이냐? 너도 빛이 가득하구나. 이리 오너라, 맞아야겠구나.”“정말입니다. 눈동자가 반짝였습니다.”택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맥 공자는 언니를 본 적 있고, 언니를 사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경험이 있으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이 말에 사탕은 바로 얼굴을 붉혔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웃었다.“네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어서 말해보거라. 혹 경천제와 연관 있는 것이냐?”“아닙니다. 누가 언니에게 경천제 말을 한 것입니까? 참 입도 가볍지.”“아버지께서 말하셨다.”사탕은 택란의 소매를 잡으며 얼굴을 더욱 붉혔다.“택란아, 네가 말한... 눈이 반짝였다는 말을 자세히 해보거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