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범한 의녀로 살고 싶었던 여자가, 자신의 핏줄이 곧 강호의 재앙으로 규정되고 사랑이 곧 원한이며 떠안은 힘이 곧 형벌임을 눈[雪]처럼 천천히 깨달으며, 끝내 복수가 아니라 놓아줌을 택하는 비극.
View More"의원, 이 손가락이 안 펴져."
노파가 약상 위에 손을 올렸다. 검지와 중지 마디가 굽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흉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평생 무언가를 쥐고 비틀어 온 손이었다.
운설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웠다. 그녀는 노파의 손을 화로 쪽으로 가져가 손등부터 천천히 데웠다. 마디가 풀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날이 추워 굳은 거예요. 뜨거운 물에 자주 담그세요."
노파는 대답 대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운설은 굽은 마디를 하나씩 눌러 폈다. 노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가 가라앉았다.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눈이 오면 사람들은 약방을 찾지 않았다. 발이 빠지는 길을 건너오느니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하룻밤을 견뎠다. 노파도 어지간히 참다 왔을 것이었다.
노파가 돌아가고, 약방에는 약초 끓는 냄새와 화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운설은 그 비어 있음을 좋아했다.
그녀는 마른 당귀를 손끝으로 부러뜨렸다. 똑,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손가락 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잘 마른 약재는 그렇게 운다. 운설은 그 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천천히 부러뜨렸다.
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소리도 없이.
운설은 업둥이였다. 청하 운씨의 가주 운백천이 눈 오는 길에서 거두었다고 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눈밭에 놓여 있었고, 울지 않았다고. 운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어째서 울지 않았을까. 추웠을 텐데.
어릴 적 운설은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운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넌 손이 야무지다. 약방이나 봐라." 그뿐이었다. 서운했지만, 자라면서 그 말이 싫지 않아졌다. 약재를 다룰 때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가끔 운설은 제 손을 들여다보다 멈췄다. 이 손이 눈밭에 놓이기 전에 무엇을 하던 손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양명(養名)은 운설이었다. 그 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생각은 김처럼 올라왔다가, 손등이 녹는 동안 흩어졌다.
밤이 깊자 눈이 굵어졌다.
운설은 등을 끄려다 손을 멈췄다.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바람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문에 기대어 천천히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녀는 등을 들고 문을 열었다.
눈 위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늙은 사내였다. 흰 눈 위로 검붉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사내의 등에는 칼이 지나간 자리가 있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추웠겠다. 운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등을 눈 위에 내려놓고 사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무거웠다. 운설은 사내를 끌어 문지방을 넘었다.
사내가 눈을 떴다. 흐린 눈이 운설의 얼굴에 닿더니 흔들렸다. 오래 찾던 것을 마지막에야 찾은 사람처럼.
"……너는." 피 거품이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그 눈을 가졌구나."
운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피를 멎게 하는 것, 사내를 화로 곁에 눕히는 것이었다.
사내가 운설의 소매를 붙들었다. 죽어 가는 손이라기엔 힘이 셌다.
"삭월(朔月)의……" 그가 말했다. "마지막, 아이……"
말은 끝나지 못했다. 사내의 머리가 운설의 어깨로 떨어졌다. 가슴은 아직 얕게 오르내렸다.
눈이 내렸다. 두 사람 위로, 소리도 없이.
입안에서 곶감의 단맛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언제 입에 물었는지 운설은 기억하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는 단맛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낯선 사내를 안고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밤, 운설은 자신이 모르던 이름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그녀는 문을 열었을 것이다.
백도겸은 자기 군세에게 버림받았다.봉쇄 명령을 따르던 병사들은 바깥 지휘자가 바뀌자 회장 문을 나무수레로 막았다. 진짜 인수도, 회주의 목소리도 소용없었다. 이미 더 그럴듯한 검신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새 검신이 누구요?”한겸이 문틈으로 외쳤다.“선우현 대협.”바깥 병사가 답했다.회장 안의 선우현이 눈을 감았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북쪽으로 간 깃발이 더 빨리 그가 됐다.혈비는 지붕 구멍을 가리켰다.“한 명씩 나가.”“밖에 궁수가 있습니다.”남궁완이 말했다.“그래서 내가 먼저 간다.”“언니가 화살을 맞으면 뒤 사람은요?”운설의 질문에 혈비가 칼을 도로 넣었다. 먼저 몸을 내놓는 습관은 선우현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하란주가 문밖에서 붉은 고삐를 흔들었다. 강길로 갔던 그는 빼앗긴 수레 둘을 되찾고 봉쇄군 후미에 섞여 있었다. 말발굽을 세 번 울리자 회장 안 연도하가 방울로 답했다.밖과 안의 동선이 처음 연결됐다.선우현은 수레바퀴 소리와 병사 수를 셌다. 북문에 열둘, 남문에 스물, 지붕 궁수 여섯. 하란주가 말 떼를 동쪽으로 몰면 궁수 시선이 움직일 터였다.“누가 내 명을 따르겠소.”그가 회장 사람들에게 물었다.옛 맹원 몇이 즉시 손을 들었다. 선우현은 고개를 저었다.“내 이름이 아니라, 지금 말하는 동선을 따를 사람만.”유족석의 나루꾼, 남궁가 무사, 승검회 병사, 백지장 사람까지 서로 눈을 보았다. 손을 든 사람은 서른둘이었다. 나머지는 남거나 다른 길을 고르기로 했다.선우현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하란주의 말 떼가 동쪽 담을 스쳤다. 궁수 화살이 말발굽 뒤를 따라갔다. 혈비가 지붕으로 올라 첫 활줄을 끊었고, 남궁완은 부채살로 둘째 궁수 손을 쳤다.안에서는 한겸이 물에 젖은 탁자를 북문으로 밀었다. 연도하가 나루 밧줄을 쇠빗장에 걸었다. 밖의 수레가 당기자 문짝이 안으로 반 치 움직였다.“한 번 더!”하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두 번째 당김에 빗장 고리가 빠졌다. 문이 열리며 병사와 안의 사람들이 뒤엉켰다
붉은 옷자락이 지붕에서 떨어졌다.혈비는 열린 구멍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기와를 세 장 더 걷어 내 빛이 들게 한 뒤, 가장 낮은 들보에 앉았다. 검은 머리에는 눈이 아니라 북방 먼지가 묻어 있었다.“문을 잠가 놓고 심판 놀이라니. 중원 것들은 좁은 곳을 좋아해.”백도겸이 회장으로 돌아왔다.“혈비.”“내 이름을 허락 없이 쓴 자가 너냐.”“나도 내 이름을 도둑맞았소.”“그러면 둘 다 멍청한 주인이군.”혈비는 들보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칼은 문밖에 맡기지 않았다. 문지기 셋이 막았으나 칼집을 만져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하문령이 맹추산에게서 나온 붉은 달 가죽을 내밀었다. 혈비는 불빛에 비추고 냄새를 맡았다.“우리 가죽은 맞다. 칼인은 아니야.”“무엇이 다르죠?”운설이 물었다.“나는 사람 이름 위에 칼을 긋지 않아. 목을 벤 뒤 아래에 긋지.”잔인한 버릇이 위조를 가르는 증거가 됐다.혈비는 운설 얼굴을 보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두 해 동안 직접 만나지 못한 자매였다. 편지는 오갔지만 그 안에는 아이 이야기도, 함께 살자는 말도 거의 없었다.운설이 먼저 손을 잡았다. 혈비 손등에는 새 화상 자국이 있었고 손목에는 말고삐가 파고든 상처가 겹쳤다.“무슨 일 있었어요?”“없었어.”“있었네요.”“겨울 궁 일이야. 네가 와서 의원 노릇 할 일은 아니고.”혈비도 동생을 보호한다는 말로 자기 생활의 문을 닫고 있었다. 운설은 손을 놓지 않았다.“나도 언니가 정한 만큼만 들을 생각 없어요.”혈비가 코웃음 쳤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둘은 살아 있다는 인사보다 다친 곳을 먼저 확인했다.“멀쩡하구나.”“언니도요.”“나는 늘 멀쩡해.”혈비는 거짓말을 하고 선우현을 보았다.“너는 더 초라해졌고.”“오랜만이오.”“인사는 살아 돌아간 뒤 해.”그녀가 가져온 소식은 이미 늦었다. 사흘 전 중원 무사 오백이 붉은 달 깃발과 선우현 이름을 함께 들고 설한협을 넘었다. 북방 마을에는 검신이 삭월 왕녀와 손잡고 새 맹을 세운다는 방이 붙었
칼은 모두 문밖에 있었다.증거 창고를 지키는 사람은 선우현, 연도하, 한겸 셋뿐이었다. 한 사람은 지팡이를 맡겼고, 한 사람은 오른손을 쓰지 못했으며, 마지막은 관복 때문에 검을 들 수 없었다.백도겸은 군세를 북쪽으로 돌릴 명을 내리러 회장 남문으로 갔다. 남궁완은 자기 가문 사람을, 하문령은 맹추산을 지켰다. 운설은 다친 사람 곁을 떠날 수 없었다.“왜 우리 셋이오?”연도하가 물었다.“서로 믿지 않으니까.”한겸이 답했다.“한 사람이 장부를 훔치면 둘이 막겠지요.”“둘이 한편이면?”선우현이 물었다.“나머지 한 사람이 소리칠 겁니다.”“셋 다 한편이면.”연도하가 웃었다.“그때는 장부가 주인을 잘 고른 거겠지.”창고 안에는 백의대 장부, 진짜 인수, 남궁가 칼, 문승의 독 묻은 죄목이 따로 봉해져 있었다. 어느 하나만 가져가도 다른 죄를 만들 수 있었다.셋은 증거를 한곳에 두지 않기로 했다. 선우현이 남궁가 칼의 위치를 맡고, 연도하가 백의대 장부 일부를 외웠다. 한겸은 진짜 인수의 칼금을 종이에 뜬 뒤 인수 자체는 빈 물항아리 밑에 숨겼다.“누가 잡히면 나머지 둘이 거짓말할 수도 있소.”선우현이 말했다.“그러니 서로 무엇을 가졌는지는 알아야죠.”한겸은 숨긴 장소를 세 장에 적어 각각 한 장씩 나눴다. 세 사람이 동시에 배신하면 증거는 사라질 것이고, 한 사람만 배신하면 둘이 찾을 수 있었다.연도하는 종이를 품에 넣다가 손이 떨려 떨어뜨렸다. 선우현이 주워 주자 그가 말했다.“오늘만 두 번이군.”“무엇이.”“그대가 내 떨어진 걸 주운 것.”“세 번째는 값을 받겠소.”“운 의원한테 받아도 되나?”선우현은 종이를 다시 바닥에 놓을 듯하다가 그의 품에 직접 꽂았다.첫 습격은 지붕에서 왔다.습격 직전 창고 밖 당번이 세 번 기침했다. 약속한 위험 신호는 두 번이었다. 셋은 문을 열지 않았다.밖에서 운설 목소리가 들렸다.“다친 사람 있어요. 열어요.”선우현의 손이 빗장으로 갔으나 멎었다. 운설은 자신을 운 의원이라
첫 등불은 여덟째 문에 켜졌다.붉은 천을 벗긴 흰 등이었다. 산모와 아이를 받을 빈방이 있다는 뜻이었다.두 번째는 백지장 창고 지붕에서 올랐다. 종이통을 비운 방에는 마른 천과 끓인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세 번째는 남궁완 구휼창의 열린 곡식독 위였다. 죽과 장작을 보낼 수 있다는 불이었다.네 번째는 강 건너 갈대둑 산실이었다. 무너진 벽을 아직 고치지 못했지만 늙은 산파가 문을 열고 기다렸다.다섯 번째는 흑마장에서 온 푸른빛이었다. 하란주가 밤길을 달릴 말 네 필을 내놓았다는 뜻이었다.어느 한곳도 사람을 전부 데려오겠다고 하지 않았다.등불 아래에는 작은 장부가 하나씩 놓였다. 받은 사람 수보다 돌려보낸 사람과 이유를 먼저 적었다. 방이 찼으면 못 받음, 산파가 없으면 손이 없음, 약이 모자라면 약이 없음이라 썼다.부끄러운 말을 감추면 다음 수레가 같은 길을 헛달렸다. 할 수 없다는 기록도 사람을 다른 문으로 보내는 길이 되었다.정월은 열을 살피기 쉬운 여덟째 문으로 갔다. 매화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하룻밤의 집을 골랐다. 아이 셋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백지장 빈방으로 갔다. 소담은 그 방들을 차례로 돌기로 했다.가장 큰 아이는 백지장에 도착하자 출구부터 셌다. 앞문과 뒷문, 낮은 창 하나. 류단은 아이가 확인을 마칠 때까지 짐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여기도 우리를 두고 어미가 안 오면요?”“기다릴 날짜를 같이 정하자.”“안 오면 쫓아내요?”“그때 다시 묻고.”아이는 열흘을 골랐다. 열흘 뒤 어미가 오지 않으면 슬퍼할지 화낼지, 어디로 갈지는 그날의 자기에게 남겼다.“나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갈대섬 늙은 산파가 물었다.“가고 싶은 곳이 어디예요?”운설이 되물었다.산파는 잠긴 섬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떠난 뒤 어디에 필요한지 묻는 말은 처음 들었다.“갈대둑 산실을 열고 싶소.”“그럼 거기서 불을 들어 주세요.”다섯 불은 우두머리의 명을 기다리는 불이 아니었다. 무엇을 줄 수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 밝히는 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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