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안 될 거 뭐 있어요? 거래할 건 없어도 정은 남아 있잖아요. 파트너는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죠.”서윤기는 콧방귀를 뀌었다.[난 네놈이랑 친구 못해!]“너무 극단적으로 얘기하지 마요. 적어도 마지막 선은 남겨 둬야 나중에 너무 껄끄러워지지 않죠. 사실 할 얘기가 있는데, 만나서 얘기할래요?”[관심 없어.]서윤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서윤기가 이런 태도로 나올 거라는 걸 진작 알았다. 나한테 당한 게 있으니 기분 안 좋은 것도 당연했다.“사업에 관한 얘기인데, 정말 싫어요? 당신 같은 장사꾼들은 모두 이익이 우선이잖아요. 언제부터 감정적으로 굴었다고 그래요?”나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서윤기는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말을 바꾸었다.[주소 보내.]“당신이 이끌어주는 가게 맞은편에 찻집이 있어요. 그곳에서 기다릴게요.”나는 일부러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목적은 바로 그 영감이 나와 서윤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윤기는 흔쾌히 동의했다.[알았어. 바로 갈게.]서윤기와 약속을 한 뒤 나는 현성을 찾았다.“내가 서윤기랑 약속 잡았어. 저 가게 맞은편에 있는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이따가 방법을 대서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영감이 보게 해.”“알았어.”나와 현성이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가 걸어 들어왔다.“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야?”민우는 그 말에 기분 좋은 듯 나에게 달려왔다.“서화협회의 손 선생님이 찾아왔어. 너를 만나고 싶대.”이건 참으로 의외의 수확이었다.얼른 로비로 나가 봤더니 손태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예의 있게 먼저 손태진에게 인사했다.“손 선생님, 어쩐 일로 직접 오셨어요?”“연 선생님이 시켜서 왔어요. 연 선생님이 수호 씨에게 기회를 한 번 주겠대요.”사실 손태진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나는 연상철의 뜻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그걸 손태진 입으로 직접 들으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언제쯤 편하다고
손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오후 두 시, 연 선생님이 협회에서 기다릴 거예요.”“네. 제때 도착할게요.”나는 직접 손태진을 배웅했지만, 손태진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손태진이 떠난 뒤 우리 셋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너무 잘 됐다. 연 선생님 팔목만 치료하면 우리는 연상철 화백이라는 인맥이 생기는 거잖아.”“연 선생님은 서화협회 협회장이라 인맥도 넓을 텐데.”민우는 잔뜩 흥분해서 보충했다.“지난번에 보니까 서화협회에 있는 분들 모두 어르신이더라고. 그 나이가 되면 몸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와. 만약 연 선생님 팔목을 치료한다면 우리 가게 다시 살아날 수 있어.”현성도 함께 감탄했다.그때 나는 두 사람을 일깨웠다.“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해. 우리 가게 직원들한테도 말하지 마. 안 그러면 누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연상철은 아주 최상급 고객이기에 가게를 방문하는 횟수가 적어도 필요할 때 분명 큰 금액을 쓸 수 있다.이렇게 우질 고객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적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돈을 버는 거다.“됐어. 난 찻집에 가 볼게.”연상철과의 약속은 오후로 잡혔기에 나는 우선 서윤기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민우는 내가 뭐 하러 찻집에 가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내가 찻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기가 나타났다.나는 이미 주문한 차를 서윤기에게 건넸다.“이 집 차 괜찮던데, 마셔 봐요.”서윤기는 내 앞에 앉았다.“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무슨 일로 찾았는데?”“서 사장이 나 엿 먹인 것도 내가 화 안 냈는데. 왜 본인이 도리어 화내실까?”나는 서둘러 본론을 말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우리 맞은편 가게는 비록 요즘 장사에 타격받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아 영감은 이 시간쯤 가게에서 바삐 보내고 있을 거다. 때문에 나는 현성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 했다.내가 고른 자리는 마침 맞은편 가게가 보이는 자리였다. 나는 이곳에서 현성의 신호만 기다리면 된다.“하
서윤기는 겉으로 보기에 친절해 보이지만 속내는 검은 인간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한테 당한 걸 속에 두고 있다.서윤기가 볼 때 자신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본 사장님인데,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회 샛내기한테 당했으니 분명 마음이 안 좋을 거다.때문에 내가 지금 고개를 숙인 건 서윤기의 용서를 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우월감만 더해주는 셈이다.서윤기는 이런 방식으로 나를 찍어 누르고 나한테 자기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역시나 내 생각은 거의 들어맞았다.서윤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전에 기회를 줄 때 소중히 여기지, 지금은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어때? 못 버티겠지? 그게 맞는 거야. 이제 시작이야. 더한 건 아직 뒤에 남았어.”“장사하고 싶지? 내가 못 하게 할 거야. 이건 나를 건드린 벌이야.”서윤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그의 눈빛에서 욕망과 통제욕을 보았다.서윤기도 처음에는 정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위해 생각했다지만, 결국 스스로 이익이라는 늪에 빠지게 되었다.지금의 서윤기는 눈에 이익과 돈, 그리고 남을 통제하려는 욕구만 남아 있었다.이럴 때마다 나는 정 사장님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항상 초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건 아주 위대한 일이다. 그런데 정 사장님은 그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이 세상에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가르침 고마워요. 그럼 난 이만.”목적에 도달한 나는 더 이상 서윤기와 마주 앉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 힘들고 재미없었다.찻집에서 나와 천수당에 돌아오니 현성도 얼마 뒤 돌아왔다.나는 다급히 물었다.“그 영감 반응 어땠어?”“내가 그 영감한테 네가 서윤기 사촌 동생이라고 했더니 믿더라.”‘좋았어.’이제 우리 계획대로 또 한 발 나간 셈이다.‘서윤기, 네가 언제까지 날뛰나 두고 보자고.’한편, 주광덕 즉 우리가 늘 말하던 영감은 나와 서윤기의 사이를 확인한 뒤 불안
서윤기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어릿광대들이 춤추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내가 공급해 주는 게 비록 대체품이긴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용해요.”“서 사장님, 아직은...”서윤기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주 사장, 지금 내 명을 어기겠다는 거예요?”“아닙니다. 그럼 서 사장님 말대로 대체 약재를 보내줘요.”서유기의 덕을 보고 있는 주광덕은 서윤기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그러자 서윤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갔다.서윤기가 떠난 뒤 주광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돈 좀 모으면 나도 안 해. 내가 왜 남 눈치 보며 일해야 하는데?”...나는 이 사실을 모르는 데다 관심도 없었다.천수당에 돌아온 나는 연상철을 치료하러 갈 준비를 했다.이번 치료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조금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을 때면 침술을 연습해다.민우와 현성도 이번 일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나는 그렇게 혼자 사무실에서 몇 시간째 침술 연습만 하다가 점심까지 걸렀다.그러다가 1시가 넘었을 때, 나는 대충 음식을 챙겨 먹고 민우와 함께 서화협회로 향했다.가는 길에 민우는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수호야, 나 왜 이렇게 긴장되냐?”나는 웃으며 말했다.“연 선생님 치료하는 사람은 나인데, 네가 왜 긴장해?”“나도 모르겠어. 그냥 긴장되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우리 가게 오픈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큰 고객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잖아. 만약 이번에 치료를 제대로 못 하면 우리 밥그릇을 잃을지도 몰라.”나는 손을 들어 민우의 이마를 튕겼다.“다른 사람은 나 안 믿어도 되지만, 너도 나 안 믿어?”“아니. 널 안 믿는 게 아니라 연 선생님 신분이 워낙 특수하잖아. 난 그렇게 대단한 분과 교류해 보는 거 처름이야.”나는 민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한의관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 다 만날 텐데, 너처럼 담력이 없으면 앞으로 장사 어떻게 해? 난 앞으로 상류층 고개만 받을까
“손 선생님, 저한테 부담 주지 마요. 이럴수록 제가 더 긴장해요.”나는 손태진이 나더러 신중해지라고 이 점을 강조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럴수록 내 긴장감만 더할 분이었다.내 말에 손태진은 나를 째려보더니 그제야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연상철은 우리를 보자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수호 군, 왔네요.”나는 연상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연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걱정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바로 맞장구쳤다.“그래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시려고요?”“연 화백님은 우리의 기둥이에요. 협회에 화백님이 없으면 안 돼요.”“이제 곧 서화 대회가 열리는데, 그때 무대에 올라가 연설도 해야 하잖아요.”연상철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말을 잘랐다.“다들 나 걱정하는 거 아네. 나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야. 알다시피 이 팔목이 이렇게 된 건 벌써 십 년 도 넘지 않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아파서 들지도 못해.”“난 날씨가 좋을 때만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어. 예전이라면 참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지네.”“좋은 날씨에만 그림 그릴 수 있는 거로는 이제 나도 만족할 수 없어. 나도 목숨이 끝나기 전에 유작이라도 많이 남겨 놓고 싶네.”연상철은 한평생 회화와 서예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서화는 연상철에게 목숨과도 같다.연상철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연상철이 존경스러웠다.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 자기의 모든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아주 위대하고 대단한 일이다. 연상철은 말을 이었다.“만약 실패하더라도 그게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일 거네. 하지만 나도 시도해 보고 싶네.”“사람은 원래 자기를 위해 평생 싸우지 않나? 내가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 팔팔해.”마지막 한마디는 듣
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계속해요.”나는 계속해서 여섯 번째 침을 놓았다.그러다 일곱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고통을 느끼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손태진은 바로 걱정했다.“연 선생님, 괜찮으세요? 참을 수 있겠어요?”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아직 참을 만해. 수호 군, 계속해요.”여덟 번째 침을 놓을 때 연상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손태진은 결국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침 맞는 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일인가요? 왜 선생님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의술이 별로인 거 아니에요?”나도 손태진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인내심을 갖고 진지하게 설명했다.“이건 조금 특별한 침술 기법이에요. 침이 혈자리를 찌를 때는 아프지 않지만 효과가 돌면 손목 주변의 신경을 건드려 아픈 거예요.”“연 선생님 손목은 문제가 너무 심해 완전히 치료하려면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없어요.”연상철은 내 설명을 들은 뒤 손태진을 보며 말했다.“괜찮아. 아직 참을 수 있어.”“하지만 연 선생님, 저는 걱정돼서...”“걱정할 거 없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물러설 수 없어. 수호 군, 계속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홉 번째 침을 꺼냈다.아홉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효과가 돌수록 점점 고통이 가해지기에 나는 빠른 속도로 열 번째 침과 열한 번째 침을 놓았다.그리고 겨우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연 선생님, 곧 끝나요.”나는 혈자리를 확인한 뒤 빠른 속도로 열두 번째 침을 놓았다.고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던 연상철은 그 순간 개운함을 느꼈다.“됐어요. 안 아파요.”서화협회 사람들은 하나둘씩 걱정되는 눈빛으로 연상철을 바라봤다.“연 선생님, 손목 괜찮아 요?”연상철은 손목을 돌려보더니 놀라고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안 아파. 고통이 사라졌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연상철은 아이처럼 기뻐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
1초, 2초, 3초...족히 5초나 지났지만 연상철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예전 같았으면 연상철은 손목을 찬 공기에 노출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손목을 얼음물에서 꺼낸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 다들 봤나? 나 연상철의 손목이 정말 나았네!”이 순간 연상철은 흥분을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손목 통증은 그를 십몇 년 동안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연상철은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였고, 매번 흐리고 추운 날이면 방 밖도 나가지 못했다.그런데 이 순간, 십 몇 년 동안의 고난과 고초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나와 민우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치료에 성공했다는 건 우리의 계획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었다.이건 우리 천수당을 놓고 보면 커다란 수확이나 다름없다.그때 연상철이 흥분한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인사했다.“연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그 대단하신 연상철 화백이 나 같은 사람한테 허리까지 굽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런 대우까지 받는지 부끄러웠다.하지만 연상철은 당연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수호 군, 젊은 나이에 의술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어요. 이 나이 먹고 참 놀라운 구경을 다 하네요.”“역시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전진한다고, 어떤 직업이든 발전하려면 젊은이를 떠날 수 없네요.”연상철의 극찬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연 선생님, 과찬이십니다.”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그러자 연상철은 감격에 겨운 듯 내 손을 잡고 설렘과 믿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수호 군,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손목도 낫게 했으니 내 허리는 치료할 수 있겠어요?”오랜 세월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화가들은 손목과 허리가 가장 쉽게 문제가 생긴다.연상철은 자신의 고뇌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들의 고민도 대변했다.그도 그럴 게, 이곳의 대부분 원로가 모두 허리 디스크를 않고 있었다.이건 마침 내가
“왜 그래?”연상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손태진이 대답했다.“정수호 씨가 선생님 손목을 치료한 게 우연일지 누가 알아요? 허리는 생명과 관련된 부위인데, 아무래도...”손태진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했다. 심지어 방금은 그저 요행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민우는 순간 욱해서 목소리를 높였다.“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수호가 그렇게 어려운 고질병도 고쳤는데 허리 디스크 하나 못 치료할까 봐요?”손태진은 쌀쌀맞게 말했다.“난 어르신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예요.”손태진은 서화협회 회장, 부회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모두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 사고가 민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사람은 늙을수록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몇 년이라도 더 살려 한다. 그 때문에 어르신들을 노리는 전문 사기단도 많다.손태진은 서화협회의 가장 젊은 사람으로서 응당 어르신들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결국 손태진과 민우는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다투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민우를 막아섰다.“됐어. 그만 싸워. 손 선생님, 선생님 마음은 이해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선생님부터 치료할게요. 손 선생님이 저를 믿으면 그때 다른 분들을 치료하는 건 어때요?”“나요? 난 아프지도 않은데 뭘 치료하겠다는 거예요?”“어제 기혈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침 한 방에 바로 기혈을 회복할 수 있어요.”손태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부터 치료해야 한다.손태진 같은 타입은 매사에 신중하지만 한번 믿음을 얻으면 마음을 주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스타일이다.내가 이 바닥에 들어오려는 이상 손태진은 가장 관건적인 인물이기에 절대 무시할 수 없다.내 말에 손태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침 한 방? 확실해요?”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손태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어떻게 침 한 방에 내 기혈을 회복한다는 건지 한 번 보죠.”“자, 앉으세요.”손태진은 의자에 앉았다.내가 오른손을 내밀라고 하자 손태진은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나는 묵묵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