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씨? 정말 수호 씨 맞아요?”내가 한창 밖에서 장을 보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 봤더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얼른 형수에게 달려갔다. “형수도 장 보러 왔어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내가 산 물건을 흘긋거리던 형수는 그게 모두 사탕과 견과류 같은 결혼 답례품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눈빛이 일순 복잡해졌다. “수호 씨가 직접 이런 걸 구매하다니 놀랍네요.”형수는 얼른 미소 지으며 복잡한 눈빛을 숨겼다. 이에 내가 대답했다. “네. 이제 곧 약혼이라 저도 뭔가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좋네요.”형수는 왠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듯했다. 나는 그런 향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없어요.”형수는 거짓말로 무마하며 싱긋 웃었다. “볼일 봐요. 난 과일 사러 가 봐야겠어요.”말을 마친 형수는 과일 판매 구역에 가 과일을 바리바리 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왠지 의문이 들었다.‘형수는 새집으로 이사한 거 아니었나? 그 근처에 슈퍼가 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과일을 사지?’‘그러고 보니 여기가 병원과 가까운데. 혹시 누구 병문안 왔나?’나는 형수한테 물어보고 싶었지만, 뒤돌아보니 형수는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형수가 만약 나도 데려가려 한다면 나한테 먼저 말했을 테니까. ...슈퍼마켓에서 나온 나는 왠지 이상함을 감지했다.예전 같았으면 형수는 나를 무척 어렸을 텐데, 오늘 내가 코에 거즈를 붙이고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내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것처럼. 나는 결국 폰을 꺼내 형수에게 전화했다. 그 시각, 형수는 애교 누나 병문안을 하고 있었다. 내 번호를 확인한 형수는 얼른 애교 누나를 바라봤다. “수호 씨 전화야. 내가 근처 슈퍼에서 과일 사다가 수호 씨랑 마주쳤거든. 아마 이상함을 느끼고 전화했을 거야. 사실대로 말해?”
이태웅은 아내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혜란 손을 꽉 잡았다.“이러지 마. 애교가 보면 슬퍼해.”그 말에 고혜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이태웅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왜 이렇게 된 거예요? 왜? 애교는 운명이 왜 이렇게 기구한 거예요? 하느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예요?”이태웅도 결국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 역시 현재 상황에 불만이 많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하지만 그걸 답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하느님이 고난을 내려준 데는 달리 이유가 없다.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가려면 강해져야 하고 쓰러져서는 안 된다.이태웅은 아내를 꼭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빨리 진정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었다.고혜란 역시 아무리 괴로워도 감정을 억제해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딸한테 자신과 남편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니까.고혜란은 애써 감정을 조절하면서 슬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나 괜찮아 보여요?”고혜란은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겉으로는 강인한 척하느라 표정이 살짝 이상했다.이태웅은 마음 아픈 듯 아내의 얼굴을 문질렀다.“괜찮아. 더 차분하면 더 좋을 거야.”“알았어요, 노력해 볼게요.”고혜란은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차분해지려고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됐어요. 이제 우리 딸 보러 가요.”고혜란은 병원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딸을 만나지 못했다.두 사람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 병상에 누워있는 창백한 얼굴의 딸이 눈에 들어왔다.참으로 착하고 선한 아이였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니 고혜란은 너무 괴로웠다.딸한테 울었던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혜란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다행히 갖은 노력과 인내 끝에, 고혜란은 겨우 울음을 삼켰다.“애교야.”고혜란은 침상 옆에 앉아 딸의 손을 꼭 잡았다. 흐느낌도 어느덧 멈추었다.애교는 천천히 눈을 떴다.“엄마? 아빠? 저.
“뭐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딴 데 돌리려고? 그러고 나서 정수호를 지켜주려고 그래?”“애교야, 정수호 그 자식이 뭐가 좋아? 그놈은 지금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넌 왜 아직도 그놈 생각뿐이야?”이태웅은 딸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주의하지 못한 채 자기가 할 말만 내뱉었다.그러다가 애교 누나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식은땀을 흘리자 그제야 눈치챘다.“애교야, 왜 그래?”이태웅은 얼른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말도 하지 못했다.이태웅은 그런 딸을 안은 채 얼른 병원으로 달려갔다.하지만 검진 끝에 들려온 건 딸이 난소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쿵!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이태웅은 몸을 비틀거리다가 결국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선생님, 혹시 잘못 진단한 거 아니에요? 제 딸은 늘 건강했어요. 그런데 암이라니요?”이태웅은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이런 상황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다.하지만 의사가 진단서를 이태웅 앞에 건넸다.“이건 우리 병원 검사 결과예요. 만약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사해 봐도 돼요.”진단서를 받아 든 이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눈물범벅이 되었다.‘진짜야!’‘진짜였어!’‘애교가 진짜 난소암이라니!’이태웅은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그는 아내에게 어떻게 전화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병원에 좀 와 봐... 얼른...”그 몇 글자를 내뱉은 뒤, 이태웅은 맥없이 손을 툭 떨구었다....고혜란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다.그러다가 혼이 빠진 것처럼 축 처져 있는 남편을 본 순간 그 예감이 더 강해졌다.“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고혜란은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이태웅은 여전히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편의 그런 행동에 고혜란은 마음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왜 그래요? 말 좀 해 봐요.”이태웅은 혼이 빠
“이렇게 말을 많이 지껄이는 건 본인 마음 편해지기 위한 핑계인 거지? 마음 편히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이태웅은 여전히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고 본인 생각을 고집했다.결국 나도 이태웅을 내버려 두었다.그러자 그는 씩씩거리며 떠났다.‘’이번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지?’“수호야, 저 영감탱이가 뭐래?”이태웅이 떠난 뒤 민우와 현성은 잇따라 달려와 나를 걱정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욕하지 뭐.”“유명한 분이 체면도 안 차리네.”현성은 불만 섞인 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그 옆에서 민우도 함께 거들었다.“내 말이. 부시장씩이나 되면서 어떻게 이렇게 격조 없이 굴지?”나는 싱긋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너희는 내가 쓰레기 같아 보이지 않아?”현성이 그 말에 허허 웃었다.“쓰레기? 남자들 세상에 쓰레기라는 단어는 없어! 수호야, 기억해. 사람은 평생 한 사람만 좋아할 수는 없어.”“맞아.”민우도 맞장구쳤다.‘이것들이 왜 일부러 이러는 것 같지?’“그러는 넌? 왜 임설아 아니면 안 되는데?”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내 말에 민우는 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난 너처럼 능력 없어서 여러 여자 한 번에 만날 수 없거든.”“신민우!”그때, 분노에 겨운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우리 셋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 동시에 흠칫 놀랐다.‘임설아?’‘임설아가 왔네!’‘왜 왔지?’무엇보다 이렇게 분노하는 걸 보니 우리 대화를 들은 게 분명했다.‘망했네.’나와 현성은 동시에 동정 어린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봤다.민우는 허둥지둥 임설아에게 달려갔다.“자기야. 여긴 어쩐 일이야?”“내가 안 오면 네 진심을 어떻게 듣지 못했겠지? 신민우, 너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아,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네.”임설아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민우는 얼른 사과했지만 이미 화가 난 임설아는 어느새 뒤돌아 떠나버렸다.민우는 결국 마지못해 그 뒤
“겁쟁이. 자네는 무능함에 대한 핑계를 찾고 있는 것뿐이야.”이태웅은 내 관점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격분해서 말했다.나는 그런 이태웅을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겁쟁이요? 하하... 아버님, 아버님은 아마 제가 겪은 일을 겪어보지 못했을 거예요.”“아버님은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좋았죠? 인생도...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갔을 테고, 지금도 이미 성과를 이루셨죠.”“맞아요. 저에 비하면 아버님은 확실히 대단하세요. 하지만 아버님은 아버님보다 대단한 사람과 비교한 적 있으세요?”“아버님이 지금은 부시장이지만, 만약 아버님이 좋아하는 상대가 장관급, 더 나아가서는 총리급 공무원의 딸이었다면 어떨까요?”“그분이 만약 아버님더러 1년 안에 장관급 공문원이 되라고 한다면, 아버님은 지금처럼 여유로웠을까요?”이태웅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말에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한 사람이 성공했는지 성공하지 않았는지 따질 때, 자신보다 못한 사람보다 비교하면 당연히 우위에 있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비교하면 어떨까?그 생각에 이태웅은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며 짜증이 밀려왔다.이태웅은 자신이 이미 충분히 대단한 성과를 이룩했는데,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과 비교해야 한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정수호, 자네 지금 억지 부리겠다는 건가?”이태웅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나는 여전히 화내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그래요? 이게 억지 부리는 거라고요? 아버님이 입장 바꾸어 생각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아버님도 본인만의 생각이 있을 테니 강요하지 않을게요. 제 생각을 이해해달라고 하지도 않을게요.”“저도 아버님 마음 이해해요. 애교 누나 인생은 확실히 험난했어요. 저도 누나한테 미안해요.”“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누나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는 아니에요. 만약 애교 누나가 예전처럼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도 애교 누나와 만났을 거예요.”“하지만 애교 누나한테 이제 제가 필요 없어요. 누나는 누나가 원하는 인생이 있고 누나만의
“왕정민이 밖에 정부가 한 둘인 줄 알아요? 애교 누나가 정말 그런 사람과 평생 지내기를 바라세요?”“단지 제가 타이밍 맞게 나타났을 뿐이라, 제가 두 사람 이혼을 초래한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으면, 애교 누나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겠어요?”이태웅은 분노에 겨워 말했다.“내가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그런 뜻이 아니에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왕정민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애교 누나와 왕정민은 언젠가 이혼하게 되어 있어요.”“그리고 저는 애교 누나와 결혼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 사이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고, 서로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벽이 생긴 것처럼 멀어졌어요.”“그날, 제가 누나와 약속을 잡고 만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사이를 풀어 보려고 했는데, 저뿐만 아니라 애교 누나도 그게 안 됐어요.”“애교 누나는 예전만큼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아 보였고요. 본인이 할 일이 생기니 더 이상 제가 필요 없어진 모양이었어요.”“그건 다 핑계일 뿐이야.”이태웅이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 말을 동의할 수 없었다.“이건 핑계가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아버님도 다 겪어 봤을 거 아니에요. 만약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에 대화거리도 사라지고, 뭘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면,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요?”“자네 헛소리 듣고 싶지 않네. 자네가 우리 애교 버린 건 사실이잖아.”끝까지 이렇게 생각하는 이태웅의 고집에 나는 어이없어 고개를 저었다.“저랑 애교 누나는 누가 누구를 버린 게 아니에요. 평화롭게 헤어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계속 친구로 지낼 수도 있어요.”“필요 없네...”“아버님, 계속 제 말 끊지 마시고 우선 들어보세요.”나는 조금 어이없었다.이태웅이 마침내 조용해지자,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저랑 애교 누나는 비록 헤어졌지만 제가 말했다시피, 애교 누나가 도움이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