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리를 바꿔 노래방으로 향했다.연소희는 우리 모두 들어갈 수 있는 큰 룸을 잡았다.룸에 들어서자마자 연소희는 나를 끌고 자기 옆에 앉혔다.한편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던 강민주는 내가 연소희에게 끌려 그녀 옆에 앉자 계획했던 일을 포기했다.노래를 고른 뒤, 연소희는 혼자 마이크를 독차지한 채 연속 몇 곡을 불러댔다. 심지어 나까지 끌어당기며 함께 부르자고 요구했다.“나 음치야.”“괜찮아요. 나도 노래 잘 못해요. 그냥 기분만 내면 돼요.”연소희는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같이 노래하자고 제안했다.이번 곡은 전에 윤지은과 노래방에 갔을 때 불렀던 곡이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연소희는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에 화답하듯 나 역시 그녀를 바라봤다.사실 나는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애틋한 사랑 노래라 부르다 보니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 것뿐이었다. 게다가 지난 일도 저도 모르게 생각났다.노래 한 곡이 끝나자 나는 왠지 마음이 복잡해져 한숨이 절로 났다.“왜 그래요?”갑자기 기분이 다운된 나를 보더니 연소희는 얼른 달려와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노래가 너무 슬퍼서 그래.”“오빠 너무 감성적인 거 아니에요? 그냥 노래일 뿐이잖아요.”나는 연소희를 보며 말했다.“넌 뼈에 사무치는 사랑을 해본 적 없지?”연소희는 헤실 웃었다.“연애도 해본 적 없는데, 뼈에 사무치는 사랑이라니요?”“그러니까 그런 거야. 넌 연애도 해본 적 없으니 이 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내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고.”나는 더 이상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됐어. 다른 사람도 부르게 해. 우리만 마이크 너무 차지하고 있었어.”“알았어요. 그럼 우리는 술 마시러 가요.”연소희는 내 팔짱을 끼고 휴게실로 향했다.우리가 자리를 피해주자 지혜영이 얼른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마이크는 공세빈이 가져갔다.이 두 사람의 목소리는 그나마 들어줄 만했다. 특히 지혜영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 앞에서는 없잖아. 그러니까 너랑 계속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걸 그만두고 평화롭게 지내는 게 낫겠더라고.”“네가 그만 싸우고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해도 내 동의를 거쳐야 하는 거 아니야?”연소희는 일부러 딴지를 걸었다.강민주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맞아. 네 말이 다 맞아. 하지만 네가 기회를 줬으면 해.”연소희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다가 나를 바라봤다.“오빠는 어때요? 진심 같아요?”“모르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음의 준비도 안 됐어.”강민주는 얼른 끼어들어 설명했다.“갑작스러운 건 맞아. 하지만 나도 방금 휴식하면서 생각을 바꾼 거야.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기회만 줘.”“오빠는 어때요?”“친구는 됐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으면 돼.”“그래요. 그럼 오빠 말대로 할게요.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필요 없대. 그러니까 돌아가.”연소희는 내 말을 완전히 따랐다.계획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강민주는 속으로 분노했다.하지만 이왕 연기하기로 한 거, 끝까지 연기해야 했다.“그래.”강민주는 사리에 밝은 척하며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고는 아까 전처럼 묵묵히 밥을 먹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옆에 있던 지혜영마저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지혜영은 대학교 때부터 강민주한테 붙어 다녔기에 그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민주는 절대 손해 보고 살 사람이 아닌 데다, 남한테 당한 걸 눌러 참는 성격이 아니다.하지만 오늘 연소희한테 짓밟혔으면서 오히려 먼저 다가가 화해를 청했다.그건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지혜영은 은근슬쩍 강민주를 훑어보며 그녀가 뭘 하는지 살펴봤다.한편 강민주도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정수호의 경계심이 너무 높은데?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겠어. 보아하니 특별한 수단을 써야겠네.’강민주는 또다시 나를 흘겨봤다. 그 눈빛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공교롭게도 그녀가 나를
‘내가 너한테 복수할 수 없다고, 정수호한테마저 복수하지 못할까?’‘너랑 정수호 사이좋잖아. 마약 정수호가 괴로워하면 너도 분명 괴롭겠지?’‘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경솔하지 않을 거야.’강민주는 반드시 연소희에게 책잡히거나 의심받을 일 없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다른 사람을 시키는 대신 직접 나서는 거였다....강민주의 계획을 모르는 우리는 그저 그녀가 기분이 안 좋아 함께 놀지 않는 거라고만 생각했다.마음껏 즐기다 돌아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왔다.“이제 밥 먹으러 가요.”연소희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오전 내내 놀았더니 확실히 배가 고팠다.하지만 짜릿하고 재밌는 것도 사실이었다.그래서인지 안 좋던 기분도 싹 가시고 어느새 흥분 상태가 된 나는 연소희에게 말했다.“이번에는 내가 살게.”“왜요?”“네가 벌써 몇 번이나 샀잖아. 이제는 내가 살 차례야.”또 연소희가 사게 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다.연소희는 싱글벙글 웃었다.“아니에요. 이번에 다른 사람이 살 거예요. 맞지? 공세빈?”공세빈은 겉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요. 이번엔 내가 살게요. 더 이상 소희 씨가 돈 내게 할 순 없죠.”“이것 봐요. 오빠가 낼 필요 없다니까요. 우리보다 더 적극적인 사람이 있어요.”이 상황에 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막막했다.연소희는 가장 다정한 말투로 가장 독한 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그래.”연소희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었고, 또 공세빈 일행을 골탕 먹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강민주는 우리 뒤에서 시종일관 함 마디도 하지 않았다.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지금의 강민주는 마치 투명 인간 같았다.얼마 뒤 우리는 차를 몰고 맛집으로 행했다.공세빈은 아주 큰 룸을 예약했다.이런 곳에 있는 맛집을 예약하는 건 지출이 적지 않을 테지만, 그건 공세빈 같은 도련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소희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왜?”강민주는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톱이 당장이라도 살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강민주는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당부가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그날, 아버지가 인맥을 이용해 꺼내주지 않았다면, 강민주는 아마 구치소에 지금까지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그때 강민주의 아버지는 분명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제 고작 며칠도 안 되는데, 또 말썽을 부리면 아버지마저 그녀를 나 몰라라 할지도 모른다.‘설마 이대로 참아야 한다고? 그건 너무 억울한데?’강민주는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고, 속에서 분노가 활활 타올라 너무 괴로웠다.“아, 아무것도 아니야.”하지만 현실 앞에서 그녀는 결국 굴복하고 타협했다.연소희가 지혜영 편을 든 건, 강민주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기에, 그녀가 계속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강민주는 결국 순순히 강 속에서 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강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던 데로부터 이런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 강민주는 너무 괴로웠다.그때, 강민주는 갑자기 나를 흘긋 바라봤다. 그 눈빛은 왠지 이상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찜찜했다. 마치 나한테 뭔가 복수하려는 것처럼.‘너를 건드린 건 소희인데, 나는 왜 봐?’‘미친.’나는 강민주를 가볍게 무시했고, 강민주를 쫓아낸 연소희 역시 지혜영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래프팅을 즐겼다.지혜영은 연소희한테 아부하려고 했지만, 연소희는 그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제야 지혜영은 자기가 연소희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연소희가 자기를 같은 편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는 걸 인지한 순간, 지혜영은 자신의 삶을 비관했다.강민주와 함께 있을 때는 늘 그녀에게 아부했는데, 강민주를 떠나니 이제는 연소희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꼴이라니.‘난 정말 내 인생을 살 수 없는 건가? 난 평생 강민주나 연소희처럼 마음대
“싫어. 무조건 지혜영이 끌어올려야 해.”이미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물속에서 일어난 강민주는 지혜영을 매섭게 노려봤다.지혜영 역시 강민주가 일부러 억지 부린다는 걸 눈치채고 짜증 냈다.“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너를 민 것도 아니잖아.”“그래. 내가 실수로 네 배와 부딪힌 것도 맞고, 내가 조심하지 않아 물에 빠졌어. 하지만 난 네가 나를 끌어당겨 줬으면 좋겠어. 좋은지 싫은지만 말해.”갑자기 진지하게 그는 강민주의 태도에 지혜영은 흠칫 놀라 잠시 망설였다.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공세빈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겠다는 듯 노를 저어 두 사람을 지나쳤다. 진혜영은 강민주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왜 나한테만 그러는 건ㄴ데?”강민주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넌 내 옆에 붙어 있던 개였잖아. 내 개노릇 하는 게 쉬운 줄 알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둬도 되는 건 줄 알아?”“너...”지혜영은 너무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고 순간 목이 메었다.“강민주, 여기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는 거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맞아. 일부러 이러는 거야. 그래서 뭐? 너희 집이 우리 집에 의지하고 있잖아. 그런데 감히 내 말을 안 들어?”“헛소리하지 마. 우리 집은 더 이상 너희 집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지혜영의 반박에 강민주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그래서 나를 배신한 거야? 그게 나를 괴롭힌는 이유야? 지혜영, 전씨 가문이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내 한마디에 네 아버지 회사가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을 수도 있어!”강민주는 마음속의 분노를 모두 토해내듯 목이 쉬어라 소리 질렀다.그 순간 진혜영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 두려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본능 같은 것이었다.마치 늑대를 만난 토끼처럼.어쩌면 그건 뼛속 깊이 새겨진 타고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분노를 토해낸 강민주는 마음이 한결 상쾌해졌다.솔직히 오늘 강민주는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연소희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이렇게 짜릿한 스포츠는 사실 처음이거든.”“그럼 내 손 꽉 잡아요.”연소희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돼. 이건 너무 위험해. 너는 보트나 꽉 잡아.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나는 내가 무섭다고 연소희한테 폐 끼칠 수 없었다.이렇게 자극적인 스포츠는 조금만 실수해도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그나마 안전 요원의 지시를 따르면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는 있다.준비가 다 된 우리를 보자 안전 요원은 우리의 배를 물속으로 밀어버렸다.배는 물살을 따라 단숨에 아래로 떠내려갔다. 배 위에 앉아 보니 수면과 강가 바닥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급경사 지역을 지나자 배의 속도는 점차 줄어들었고, 더 이상 방금 전처럼 무섭지 않았다.이어지는 구간에 우리는 천천히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며 주위 풍경을 감상했다.그제야 내 마음도 점차 가라앉았다.나는 배 위에 편히 누워 주위 풍경을 감상했다. 이런 각도로 대자연을 바라보니 느낌이 미묘했다.“오빠. 어때요? 짜릿하고 재밌죠?”연소희는 엉금엉금 기어 나에게 다가와서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짜릿하고 재밌어. 이래서 네가 이런 짜릿한 스포츠를 좋아하는 거구나.”이건 확실히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솔직히 나는 연소희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지만, 한 번도 그녀처럼 마음대로 한 적이 없다.옆에 앉은 연소희를 보니 문득 그녀가 부러워졌다.연소희의 웃음과 기쁨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연소희는 다른 무언가에 물들지 않고, 단지 잘 먹고 잘 놀기만 해도 기뻐할 수 있다.이렇듯 자연스러운 것은 내가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다.이게 바로 사람과 사람의 차이다.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에 도착해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을 노력해도 로마에 도달할 수 없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웃었다.‘이렇게 조용히 풍경이나 감상하자.’오늘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구름은 유난히 하얗다.나는 문뜩 지난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