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두 분 모두 저한테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제 성적이 나빠 실망할까 봐 걱정돼요.”“넌 가만 보니 생각이 너무 많아. 뭐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부터 생각하니 진짜 너를 잃는 거야.”이런 성격은 좋지 않다. 남을 만족하기 위해 항상 본인이 고생하니까.본인도 즐겁지 못하면서 남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그래서인지 이제는 남주 누나와 백연우 쌤 같은 성격이 좋다고 느껴진다.소탈하고 자유롭고. 자기한테 그 어떤 압력도 부담도 주지 않으니까.“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이랬어요.”“성격이 그런 건 네 탓이 아니야.”나는 계속해서 주선영을 위로했다.그러자 주선영은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수호 오빠, 저 정말 생각을 바꾸고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오빠 도움이 필요해요.”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책 가져와. 내가 도와줄게.”주선영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책가방에서 책을 찾았다. 하지만 얼마 뒤,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나왔다.“어떡해요? 책을 두고 왔어요.”“그럼 내일 돌아오면 가르쳐 줄게.”“안 돼요. 교수님이 제 학습 정황 확인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면 부모님을 부르겠댔어요.”‘뭔 선생님이 이래? 대학에서 무슨 학부모를 불러?’나는 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나중에야 생리학 교수님이 주선영 어머니 친구라는 걸 알게 됐다.‘난 또 주선영의 머리가 너무 나빠서 이런 방식으로 압력 주는 줄 알았네.’나는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아니면... 내가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학교에서 책 가져올래?”주선영은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그 생각 했어요.”“그럼 가자.”벌써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차로 갔다 다시 돌아오면 아마 11시가 될 거다. 때문에 나는 얼른 책을 가지고 돌아와 주선영을 가르쳐주고 일찍 잘 생각이었다.우리는 강북대 한의과 대학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여자 기숙사 쪽으로 걸어
“미쳤어요?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왜 그래요? 학생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이곳은 학교지 용천호텔이 아니다. 때문에 이토록 서슴없이 행동하는 백연우가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백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느새 손을 내 옷 속에 밀어 넣어 손끝으로 내 피부를 살살 간지럽혔다.“내 눈을 봐.”백연우가 속삭이듯 말하며 바짝 달라붙는 바람에 내 몸도 점점 불타올랐다.하지만 나는 이성을 유지한 채 백연우의 손을 잡았다.“안 돼요.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굴지 않아요. 전 양동준 형님처럼 강해지고 싶어요.”백연우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발끝을 들더니 내 입술에 쪽 입맞춤하더니 따뜻한 입김을 내 턱에 불었다.“양동준처럼 강해지는 거랑 누나를 만족시키는 게 서로 모순되지는 않잖아. 양동준처럼 강해져도 나랑 하는 데 지장 없는 거 아니야?”“안... 안돼요...”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연우는 내 턱을 깨물었다. 그것도 아주 살짝.백연우는 일부러 나를 자극했다. 심지어 내 옷 안에 들어온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백 쌤... 읍...”백연우가 내 입을 마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이 요물 같은 여자는 남자 마음을 어떻게 휘어잡아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먼저 내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뻔뻔하게 물었다.“더 원해?”당연한 걸 왜 묻는지. 나는 이미 완전히 자극받아 당장 이 자리에서 백연우를 안고 싶었다.하지만 백연우는 내가 직접 말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역시 누나라 이건가? 사람 마음을 너무 잘 휘어잡네.’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연우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날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원하는지 묻긴 뭘 물어요?”나는 아래가 너무 불편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백연우가 갑자기 나를 놀려댔다.“그런데 이젠 내가 싫어. 나 숙소 돌아갈 거야.”“안 되죠.”나는 백연우가 도망칠까 봐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먼저 나를 건드렸으면서 어딜 도망치려고?’“좋아요. 우리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두말 없이 백연우를 벽에 밀쳤다.“아까 저를 혼내 준다고 했죠? 어디 혼내 봐요.”나는 백연우의 옷을 거칠게 찢었다.그러자 백연우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안 그러면 어떡해. 발각될 텐데.”나는 더 이상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원래는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했으나, 막상 그 행위에 빠지니 시간 가는 줄도, 주선영이 기다리는 줄도 까맣게 잊은 채 눈앞의 아리따운 여자로 머리가 꽉 차버렸다.백연우와 이런 짓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백연우는 고난도 동작을 시도했다. 심지어 세 번이나 해 결국에는 기진맥진해졌다.여자가 성욕이 쌓이면 남자보다 더 무서워진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나는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고, 백연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고작 세 번 만에 힘 빠진 거야?”“매번 할 때마다 40분도 넘게 했거든요. 게다가 다 제가 리드했으니 당연히 체력 소모가 심하죠.”나는 핑곗거리를 찾았다.‘그런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즐거운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니까 오히려 내가 당한 것 같잖아.’“오늘 자고 갈래?”백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사 원피스를 걸치며 말했다.하지만 그때, 나는 문득 주선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헐. 큰일 났다. 선영을 잊었네.”나는 신속히 옷을 갈아입고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내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불여우한테 단단히 홀렸네. 이러다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어.’나는 속으로 감탄했다.한편, 백연우는 내 앞에서 경험 많은 누나인 것처럼 굴더니 내가 떠나자마자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뭔 힘이 그렇게 세? 습... 다리 아파.”알고 보니 백연우는 내 앞에서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연기한 거였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백연우는 워낙 뭐든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여자니까....내가 여자 기숙사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나는 급한
물론 주선영과 합숙 생활을 하긴 하지만, 방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역시 여자애라 그런지 방도 핑크 핑크하고 귀염뽀짝하게 꾸며져 있었다.사실 방금 전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탓에 나는 잠이 솔솔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과외 해주겠다고 동의한 이상 약속은 지켜야 했다.“내 설명 이해됐어? 사실 이 과목 아주 간단해. 인체의 각 부위에 대응해서 이해하면 바로 기억할 수 있어.”나는 말하면서 하품했다.그도 그럴 게, 벌써 새벽 1시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주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충 알아들었어요. 물론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괜찮아요. 내일 교수님 질문에 대답할 정도는 충분해요. 오빠도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나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일어났다.“그래. 나 먼저 가서 잘게. 너무 피곤해서. 너도 일찍 자.”방에 도착했더니 민우가 이미 내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내 자리까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나는 얼른 다가가 민우의 다리 한쪽을 끌어 옆으로 밀었다. 다행히 민우도 깊이 잠들었는지 내가 그렇게 했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얼른 그 옆에 누웠더니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하지만 내가 한참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손 하나가 내 몸을 더듬으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설아야, 너 몸매 진짜 좋다...”‘이건 민우 목소리 아닌가?’‘설마 자면서 나를 임설아로 착각한 거야?’순간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아 보니 민우의 아래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이 변태자식. 감히 나를 여자로 착각해?”게다가 몸까지 더듬거리는 바람에 너무 역겨웠다.나는 민우를 깨우려고 연신 발길질했으나, 이미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민우는 내가 아무리 차도 깨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마음 같아서는 밖에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집으로 끌어들였으면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는 민우를 보다가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우가 다시 나를 끌어안
민우는 내 말에 이내 헤헤 웃었다.“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내가 왜 그런 데로 돌아가냐? 싫어.”“그럼 소파에서 자. 앞으로 나랑 잘 생각도 하지 마. 젠장. 뭔 꿈을 그렇게 살벌하게 꿔? 그것도 모자라 몸은 왜 더듬는 건데? 변태처럼. 대학 다닐 때는 너한테 이런 취미 있는 줄 몰랐는데?”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더니 스트레스 쌓였나 봐.”“쌤통이다. 그날 호텔에서 왜 아무 짓도 안 했는데?”“누구는 뭐 싫어서 안 한 줄 알아? 무서워서 그랬지.”“무서운 것도 많다. 그래서 여태껏 총각 딱지도 못 덴 거야. 저리 가. 화장실 가서 직접 해결해.”민우의 그곳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만약 상대가 여자라면 눈이 즐겁기라도 할 텐데, 남자라 아무 감각도 없는 건 물론 심지어 안구 테러까지 당한 것 같았다.민우도 괴로웠는지 얼른 대답했다.“그래. 너 먼저 자.”말을 마친 민우는 얼른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했다.겨우 침대를 혼자 독차지한 나는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하, 민우 그 자식은 왜 데려와서 생고생인지. 후회돼 죽겠네.’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전에 돗자리를 샀던 게 생각나 얼른 트렁크를 뒤졌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가 겨우 돗자리르 찾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이부자리도 펴주었다. 이따가 민우가 돌아오면 그 위에서 자게 할 생각으로.몇 분 뒤, 민우는 돌아왔다.“수호, 너 이게 무슨 뜻이야?”나는 민우를 흘긋 봤다.“네가 만지는 게 싫어서 그래. 바닥에서 자. 아니면 거실에서 자든가. 네가 선택해.”민우는 화도 내지 않고 혼잣말로 툴툴거렸다.“여기 여자애도 같이 사는 거 아니야? 내가 거실에서 자면 그 애가 불편해서 어떡해? 됐어. 바닥에서 잘게. 여기서 자는 것도 내가 살던 곳보다는 나으니까.”민우는 말을 마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 역시 겨우 편히 잠들 수 있었다.다음 날, 우리는 함께 출근했다.요즘 직원들은 유독 마음이 잘 맞아 모두 사장님 대
모든 사람이 일제히 기척이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자리에는 꽥꽥 소리 지르는 한은솔이 서 있었다. 이제는 아예 숨기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머리를 알록달록 염색하고 불량소녀처럼 차려입고 말이다.한은솔은 모태진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왜 내 전화 안 받았어? 무슨 뜻이야?”모태진은 얼른 다가가 말했다.“내가 문자 보냈잖아.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찾아오지 말라고 하면 내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나랑 자고 이제 와서 꽁무니 빼시겠다?”한은솔은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들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키웠다.그 순간 모태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너랑 잤다고 그래? 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한은솔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 말 당신 당신 동료들은 믿어?”모태진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내가 두려울 게 뭐 있어? 하지도 않은 일은 절대 인정 못 해.”“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러면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어? 가게 사람들 모두 봤을 거잖아. 나한테 특별하게 대해주고, 나를 위해 와이프랑 싸우기까지 했으면서. 돌아가면서 물어봐. 내 몸을 노린 게 아니면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 왜 아내한테 밉보이면서 내 편을 들어줬을까?”한은솔의 말에 모태진은 말문이 막혀 미간만 찌푸릴 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모태진도 한은솔에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한은솔을 건드린 적은 없다. 그도 호감과 사랑이 다르다는 걸 아니까.상대를 건드리는 순간, 모태진의 가정은 분명 깨질 거다. 때문에 그는 늘 마지막 선은 지켜 왔다.하지만 모태진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누가 믿을까? 그가 한은솔을 얼마나 특별하게 대했는지 모두가 봤는데. 심지어 한은솔 때문에 아내와 크게 싸우기까지 했다.더욱이 남녀가 한 방에서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건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한은솔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모태진을 휘둘렀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
일이 이 지경이 되자 한은솔은 끝내 자기 진짜 목적을 말했다. 모태진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둘째치고, 그녀의 진짜 목적은 화인당을 물 먹이려는 거였다.사람들이 쑥덕쑥덕 얘기하자 나는 결국 한은솔에게 다가가 말했다.“그 노랑머리 자식이 이러라고 했어? 아니면 네가 자발적으로 그 자식을 도운 거야?”내 말에 한은솔은 눈알을 굴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나는 더 이상 한은솔을 뭐라 하지 않고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도덕의 잣대로 너한테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길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 자식이 너를 때리고 욕할 때 누가 널 지켜줬는지.”“태진 선배가 나서주지 않았으면 넌 그동안 계속 그 자식한테 시달렸을 거야. 태진 선배가 너한테 넘어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모함하고, 남의 인생 망치면 안 되지.”한은솔은 내 말에 펄쩍 뛰었다.“내가 언제 모함했다고 그래? 헛소리 지껄이지 마. 아하, 이제 알겠네. 같은 화인당 사람이라고 저 쓰레기를 감싸주려는 거지?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어. 사람들한테 누가 잘못했는지 시비를 가리라고 해보자고.”한은솔은 말하면서 바로 문밖으로 나가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모태진이 얼른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좋아. 배상할게. 이제부터 난 화인당 직원이 아니야. 여기 사직서도 있거든.”“수호 씨가 사장님 대신 가게 봐주고 있으니 이 사직서는 수호 씨한테 줄게요.”“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어.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모태진은 가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직서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나는 그 사직서를 받고 싶지 않았다.“사직서는 도로 가져가요.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사장님이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요.”난 솔직히 모태진이 일을 그만두길 바라지 않는다. 물론 그가 한은솔의 일을 잘못 처리한 건 맞지만, 그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건 모태진한테 너무 불공평하다.하지만 모태진은 기어코 사직서를 내 손에 밀어 넣었다
민우는 이내 대답하고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자 나는 얼른 직원들더러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직원들은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 제 할 일을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태진의 일을 수군대고 있었다.그걸 모니 내 마음이 무거워 났다.한편, 모태진은 한은솔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 가더니 간곡히 말했다.“난 네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 네가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너 이러는 거 자신을 망치는 것밖에는 안 돼.”한은솔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 나를 위한다면서 왜 정수호 한마디에 나를 버렸어요?”“정수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불가능해. 난 가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아이도 있어. 난 그저 너를 동생으로 생각했지, 다른 마음 품은 적 없어.”짝!한은솔은 모태진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윽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다른 마음 품은 적 없다고? 그럴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 동생? 누가 동생 하고 싶대? 나 예쁘잖아, 당신 그 호랑이 같은 와이프보다 낫잖아.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런 여자 때문에 나한테 흔들리지 않는 건데?”모태진은 혀끝으로 맞은 볼기짝을 꾹 밀더니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뭐가 됐든 내 아내는 나를 위해 아이도 낳아줬고, 엄청 고생했어. 그동안 내 뒷바라지하느라 쉽지 않았을 거야. 내 마음은 여전해, 너한테 품지 말아야 할 마음 품은 적 없어.”한은솔은 결국 화가 치밀어 모태진에게 달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그때 노랑머리 놈이 깡마른 남자 한 명을 데리고 걸어왔다. 두 사람을 보는 순간 한은솔은 이내 전전긍긍했다.“해진 오빠.”주해진, 그는 김진호의 사촌 형인데, 이 바닥에서 유명한 깡패다. 게다가 겉모습도 딱 신분만치 불량하다.김진호는 본인이 다친 뒤 곧바로 사촌형 주해진한테 전화해 복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안명훈더러 그를 도우라고 했다.안명훈도 주해진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 이 기회에 잘 보일 심산이었다. 때문에 먼저 자기 여자 친구를 내세워 가게에게 가서 소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