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차가 병원을 떠났다.
서울의 오후 풍경이 유리창 너머로 흘러갔다. 나는 무릎 위에서 손을 꽉 쥐었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열에 취해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태윤은 그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을 때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스스로 평가받을 수 있게 물러날 줄도 알았다. 그런 사람이 엄마 치료를 일부러 늦춰 나를 붙잡아 둘까. 이성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후가 던진 말 하나가 계속 남아 있었다. 윤성홀딩스가 무너질 때, 태윤의 자금이 이미 가까이에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태윤의 과거를 얼마나 알고 있지? 그리고 태윤은 내게 무엇까지 알려 줄 생각이었을까.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더 무서웠다. 아무 감정이 없다면 그냥“가끔은 우리도 평범하게 지내자.” 서린의 말에 태윤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주먹을 폈다.“그래. 걸어가자. 대신 내가 차도 쪽에 설게.” 해준이 아버지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태윤은 약속대로 차도 쪽에 섰고 이음을 안아 올렸다. 서린과 해준이 나란히 앞서 걷는 동안 아이는 방금 받은 꽃잎을 아버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네 사람은 그렇게 교문을 나섰다. 신호가 바뀌어 횡단보도로 들어섰을 때, 멀리서 엔진이 거칠게 울었다. 대형 트럭이 차선을 벗어나 교차로로 달려들었다.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어린아이가 넘어졌다. 어머니는 이미 몇 걸음 앞에 있었다. 서린이 달려가 아이를 안아 인도로 밀어냈다. 동시에 태윤이 해준과 이음을 끌어안았다. 귀를 찢는 경적과 타이어 마찰음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 서린의 몸이 허공에 떴다. 조금 전까지 맡던 봄꽃 향기는 타는 고무 냄새로 바뀌었다. 구해 낸 아이가 어머니에게 안기는 모습과, 태윤이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서린!” 태윤은 두 아이를 경호원에게 맡기고 서린 곁으로 달려갔다. 구급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수술실 앞에서 의사가 말했다.“뇌좌상과 미만성 축삭 손상이 있습니다. 생명은 건졌지만 의식 장애가 오래갈 수 있습니다.”“깨어날 가능성은 있습니까?”“있습니다. 다만 언제, 어느 정도 회복될지는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태윤은 해준과 이음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음이 울면서 물었다.“엄마, 그냥
“식이 끝나면 곧장 돌아올 거야?” 서린이 넥타이에서 손을 떼자 태윤이 그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손목을 붙들었을 것이다. 서린은 그의 접힌 손가락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손을 잡고 싶다면 물어보면 될 텐데. 아직도 태윤에게는 그 한마디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어젯밤에 얘기했잖아. 학교 끝나고 케이크 가게까지 걸어가기로.”“알아.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태윤에게는 교문 앞 차 한 대도, 낯선 사람의 어깨도 위험해 보였다. 오래전 서린을 잃을 뻔했던 기억이 남긴 두려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그 걱정 속에서 숨이 막혔다. 특히 오늘처럼 해준이 자기 힘으로 새 세상에 들어가는 날에는, 그 아이에게도 마음껏 걷게 해 주고 싶었다.“아빠, 경호원들이 줄지어 따라오면 창피해.” 해준이 가방끈을 쥔 채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태윤은 당장 반박하려다가 아들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알았다. 눈에 띄지 않게 하마.”“그 정도면 괜찮아. 빨리 가자. 지각하겠어.” 학교 강당은 박수와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서린은 앞줄로 들어오는 해준을 찾았다. 낯선 아이들 사이에서 등을 곧게 편 아들은 몇 번이나 이쪽을 바라봤다. 마지막 줄에 앉은 태윤은 두 팔을 끼고 정면을 응시했다. 주위 학부모들이 곁눈질할 만큼 굳은 얼굴이었다. 정작 해준이 지나갈 때에는 아들의 가방보다 서린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그녀가 웃고 있는지, 긴장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눈길이었다. 서린은 의자 옆으로 손을 내려 그의 손등을 살짝 덮었다. 태윤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굳었던 손이 풀렸다.
봄볕이 거실 바닥에 반듯한 금빛 사각형을 그렸다. 열린 창으로 젖은 흙냄새와 꽃향기가 흘러들었다. 서린은 식탁 옆에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입학식을 위해 고른 옅은 남색 재킷과 치마가 어쩐지 낯설었다. 새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아들을 보며, 서린은 치맛자락을 한 번 쓸어내렸다.“해준 오빠, 멋있어!” 이음이 까치발을 들며 손뼉을 쳤다. 해준은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자꾸만 새 책가방의 끈을 만졌다. 가방은 작은 등보다 조금 컸다. 검은 가죽은 아직 뻣뻣했고, 몸을 돌릴 때마다 금속 장식이 작게 울렸다. 어깨에 닿는 감촉이 불편한지 자꾸 끈을 고쳐 올리면서도, 벗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젯밤까지 준비물을 거듭 확인하던 아이가 이제 학교에 간다. 서린은 그 뒷모습만 봐도 목이 메었다.“정말 잘 어울려, 해준아.”“엄마, 울어?”“안 울어. 네가 갑자기 다 큰 것 같아서 놀란 거야.” 서린이 무릎을 굽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스타킹 너머로 무릎에 닿았다. 방금 감은 머리에서 어린아이용 샴푸 향이 났다. 해준은 입술을 내밀며 비켜섰지만, 엄마의 손길이 닿은 자리를 다시 만졌다.“나 이제 아기 아니거든.”“그래. 오늘부터 학교 다니는 형이지.” 그때 계단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내려왔다.“아침부터 신났군.” 말끔한 감색 정장 차림의 태윤이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구두 굽이 낮게 울렸다. 오랫동안 써 온 시트러스 향도 가까워졌다. 이음이 달려가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회사에서는 눈빛만으로
아이들 방 문을 조금 열었다. 이불에서 따뜻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음이가 자기 베개까지 들고 와 해준이 이불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베개 둘이 겹쳐 머리 아래가 높았다. 태윤이 몸을 낮춰 하나를 빼자 딸은 잠깐 찡그렸다가 오빠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해준이는 잠결에 동생을 더 안았다. 바닥에는 양말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자 공룡 그림이 닳고 뒤꿈치가 얇아진 게 보였다.“그거 아직 버리지 마.”“알아. 해준이가 좋아하는 거잖아.” 태윤이 아들의 발끝을 바라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아이들 이불을 다시 덮었다. 나는 문을 잡고 그가 두 아이를 한 번 더 볼 때까지 기다렸다. 복도로 나오니 아이들의 숨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오래된 공룡 양말을 쥔 채 입학식에 신길 남색 양말은 따로 준비했음을 떠올렸다. 이 낡은 한 짝도 당장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양말을 들지 않은 내 손을 잡았다.“내일 식 끝나면 조금 걷자.”“넷이서?”“응. 학교 근처 케이크 가게까지. 해준이가 거기 딸기 타르트 먹고 싶다고 했어.” 태윤이 잠깐 생각했다. 내가 먼저 침실 쪽으로 걸어가자 문 앞에서 잡은 손이 살짝 당겨졌다.“이음이는 중간에 안아 달라고 할 거야.”“네가 있잖아.” 그가 곤란한 듯 웃었다. 나는 그제야 입학식이 끝난 뒤 네 사람이 걷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날이 맑아야 할 텐데. 밤이라 내일 하늘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케이크 가게에 가는 길에는 해준이가 검은 가방을 메고, 이음이는 어느 순간
입학식 전날, 다림질하는 내 곁에서 해준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내일 입을 옷은 아직 옷걸이에 있는데 양말만 미리 신었다. 이음이도 양쪽에 다른 양말을 신고 따라다녔다. 나는 이름표와 손수건을 확인했다. 이음이가 자기 옷에도 이름표를 달아 달라고 조르자 태윤이 딸을 안아 올렸다.“이음이는 내일 응원 담당이야.”“응원?”“오빠가 긴장하면 멋있다고 말해 줘.” 이음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윤은 딸의 귀에 “내일 오빠가 떨면 멋있다고 말해 줘” 하고 속삭였다. 해준이는 필통을 세 번째 열었다.“내일은 행사만 하는 날이라 연필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아.”“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누구를 닮았는지 태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저녁에는 해준이가 좋아하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었다. 태윤은 아들 접시에 감자샐러드를 평소보다 조금 더 담았다.“나 내일 울면 어떡해?”“울어도 돼.” 태윤은 자신은 울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와 해준이가 말없이 보자 이음이가 갑자기 “아빠 멋있어!”라고 외쳤다. 오빠에게 해 줄 말을 아빠에게 먼저 써 버린 것이다. 해준이는 동생에게 책가방을 메어 줬다. 너무 커서 이음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나도 학교 갈래.”“넌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야. 조금 더 크면 갈 수 있어.” 태윤의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한 딸은 오빠가 내일 집에 없다는 말에 울상이 됐다.“다시 올 거야.
식탁 위에 필통, 실내화, 체육복이 하나씩 늘었다. 해준이가 자기 이름을 쓰는 동안 이음이는 옆에서 크레용으로 선을 그었다. 태윤은 통학로 지도를 펼쳤다.“여기는 시야가 좁아. 이 교차로는 자전거도 많고.” 빨간 표시가 늘어났다.“차로 데려다주면 더 빠르잖아.”“해준이가 친구들이랑 같이 걷는 걸 기대해. 우선 길을 함께 걸어 보자.” 다음 날 넷이 통학로를 걸었다. 지도에서 보던 것보다 보도가 좁았다. 해준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스스로 멈춰 이음이에게 오른쪽과 왼쪽을 보라고 했다. 태윤은 차도 쪽에 서서 두 아이가 건널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태윤이 표시 옆에 작은 글씨를 썼다.‘해준이가 스스로 멈춤.’“표시는 안 지워?”“길은 그대로잖아.” 나는 그 옆에 오늘 본 것을 적었다. 태윤이 지도를 내 쪽으로 밀어 줬다. 실제로 걸어 보니 교차로의 차 소리는 지도에서 상상한 것보다 컸다. 이음이는 오빠의 말을 따라 고개를 크게 돌렸다. 내가 쓴 메모는 태윤의 글씨와 부딪히지 않으려 작아졌고, 그는 내 쪽으로 지도를 더 밀어 주었다. 저녁에는 위치 확인 기기와 비상벨의 용도를 해준이에게 설명했다.“아빠가 이걸로 나 계속 보는 거야?”“늦게 오거나 위험할 때만 확인할게.”“정말?”“약속해.” 해준이는 생각하다 가방 안주머니에 기기를 넣었다. 태윤의 표시 옆에, 해준이가 그린 작은 빵 모양도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의 빵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