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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스매시모찌
이혜림은 모니터를 바라보는 소현성의 표정에서 묘한 기류를 읽어냈다.

‘놀란 듯하면서도, 정작 놀라지 않은 듯한 눈빛...’

그의 표정에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한 차분함과 동시에 뜻밖의 당혹스러움이 겹쳐 보였다.

“아, 저도 방금 본 거라서요. 이상하네요... 어떻게 이런 종목이 오르죠...”

소현성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어색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애써 담담한 척하지만 감춰지지 않는 긴장감... 거기에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몸짓까지... 정말 내 착각일까?’

이혜림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수십 개 금 테마주가 줄줄이 무너질 때, 현성 씨는 어떻게 하필 딱 이 종목을 고른 거지? 우연치고는 소름 끼치게 정확한데...’

참다못한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현성 씨, 정말 몰랐어요?”

“네?”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이혜림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중윤골드가 오늘 오른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어,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수로...”

소현성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렸고 시선은 자연스레 옆으로 비껴갔다.

‘그러네... 내가 너무 과민반응 했지.’

이혜림은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조금 전 떠올린 의심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당시 시장의 분위기는 분명했다. 금값이 단기간에 과열 상승했고 유니스 연방의 금 선물 다수 포지션이 대거 청산되면서 경험 많은 고참 트레이더들조차 골드 테마주의 조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작 입사한 지 사흘 된 인턴이, 그것도 캔들 차트조차 겨우 구분할 정도의 신입이 무슨 내부 정보를 알 리가 있겠어. 그냥 말도 안 되는 우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운이 좋았던 거겠지.’

“소현성 씨.”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아, 네, 팀장님!”

소현성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주희재가 두 사람과 커피로 얼룩진 책상을 흘끗 훑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따라와요. 할 얘기가 있습니다.”

“네...”

소현성은 감히 태만할 수 없어 곧장 대답하며 일어섰고 주희재 팀장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남은 이혜림은 커피 얼룩이 번진 서류를 조심스레 닦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현성 씨만 따로 부르시는 건... 설마 혼내려는 건 아니겠지? 어제 업무는 잘했는데. 아니면 팀장님도 모의투자 실적을 보신 건가?’

...

주희재를 따라 팀장 집무실로 들어선 후로 소현성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 종목은 분명 하한가에 꽁꽁 묶여 있던 주식이었다. 매수 버튼을 눌렀을 때만 해도 ‘내 촉 같은 건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구나’ 하는 자괴감만 남았었는데, 막상 결과는 정반대였다.

‘상한가라니, 그것도 단숨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소현성 씨. 입사한 지 사흘 됐죠. 적응은 좀 됩니까?”

주희재 팀장이 자리에 앉으며 두 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우람한 팔뚝은 셔츠 소매를 금방이라도 터뜨릴 듯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아, 네. 팀장님. 선배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아직 배우는 중이지만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원래는 천천히 익히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제 같은 장은 어쩔 수 없었죠. 변동성이 워낙 커서 부서 전체가 전쟁터였으니까.”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든 배우면서 해내겠습니다.”

소현성은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뒤로 주희재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현성을 위아래로 훑었고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소현성은 괜히 몸이 움찔했고 마음속에 묘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집무실에 주희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우리 팀에서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

소현성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현성 씨가 회장님의 특별 지시로 입사했다는 거 말입니다.”

“아, 네...”

소현성은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팀장님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내가 낙하산이라는 걸...’

주희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오래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며칠 안에 다들 알게 되겠죠.”

그는 무심하게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텀블러를 들어 올렸다. 뚜껑을 돌려 열자,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역한 냄새가 퍼졌다.

헬스장 로고가 새겨진 대형 텀블러 안에는 걸쭉한 단백질 셰이크가 담겨 있었다.

소현성은 이혜림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팀장님은 매일 고단백 음료만 드신다더니... 저 체격이 그냥 만들어 진 게 아니구나...’

“내 성격 알잖습니까. 쓸데없는 사생활은 안 묻습니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회장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친척입니까?”

“아닙니다.”

소현성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요?”

주희재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럼 왜죠? 이력도 경력도 없는 사람을, 그것도 트레이딩본부에 직접 꽂아 넣으신 이유가 뭘까요? 현성 씨 본인도 잘 알잖습니까. 정상적인 루트로는 네오투자캐피탈 문턱조차 넘기 힘든 스펙이라는 거.”

주희재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돌직구를 날렸다.

“그건...”

소현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회장이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누가 어떻게 들어왔냐고 캐묻거든, 무조건 입 다물어. 그냥 모르겠다고 잡아떼. 특히 게임이나 길드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이제는 길드장이 왜 그렇게 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네오투자캐피탈의 회장이 게임에서 알게 된 관련 경험도 없는 나 같은 놈을 낙하산으로 끼워 넣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순간 회사는 뒤집히고 금융권 전체의 조롱거리가 되겠지.’

그는 고개를 들어 주희재 팀장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최대한 단호하고 강경하게 대응하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주희재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놀란 기색은 없었지만 눈빛은 분명 의미심장했다.

말 못 하겠다면 저도 더 묻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말투가 확 바뀌었다.

“하나 더. 모의투자에서 매수했던 관리종목 ‘중윤골드’ 말입니다.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역시... 이 얘기를 하려던 거구나.’

소현성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궁색하지만 미리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정말 우연이에요.”

“운빨이라고요? 소현성 씨, 우리 트레이더들의 일일 목표 수익률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방안에 주희재의 중저음 목소리가 울렸다.

“보통 0.1%에서 1% 선입니다. 어제 같은 장세라면 최고참 트레이더가 기회를 잡아 5%까지 뽑아낼 수도 있죠.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아니 그 이상 손실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일 목표를 보수적으로 잡는 겁니다. 시장에서 가장 두려운 게 뭘까요? 바로 욕심입니다. 큰 수익을 노리다가는 순식간에 더 큰 구멍을 내기도 하거든요.”

소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림도 어제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팀 전체의 월간 목표가 3~10%인데, 그것만으로도 업계 상위권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소현성 씨는 어제 단 하루 만에 웬만한 선임 트레이더의 한 달 목표를 채웠습니다. 더구나 그 종목은 앞으로도 연속 상한가를 찍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주희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의 정확도는 단순한 분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알 수 없는 내부적인‘풍문’이라도 잡은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운입니까?”

“...”

소현성은 입을 꾹 닫았다.

그는 아직 기본적인 재무제표 분석조차 서툴렀고 차트 패턴이나 뉴스 해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회의에서 오가는 전문 용어와 은어들은 그저 소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책상 위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사둔 교재 몇 권이 놓여 있었지만, 이제 막 사흘 된 인턴이 금융시장이라는 바다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물가에서 발만 담그고 서성이는 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팀장님께 게임에서 얻은 이상한 촉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정신질환이 있다고 자백하는 것도 아니고...’

“흠... 이번 질문에도 대답하기 곤란한가 보네요.”

주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그게...”

소현성이 말끝을 맺지 못하자, 주희재는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저도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모르게 간직한 노하우가 있습니다. 그걸 함부로 남 앞에서 다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특히 성과가 곧 존재 이유인 트레이더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비웃듯 가볍게 웃은 그는 곧바로 진지한 어조로 돌아왔다.

“제가 성급했네요. 사적인 걸 캐물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소현성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좋습니다. 오늘도 집중해서 해봅시다. 어차피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은 곧 부서에 퍼질 겁니다. 물론 색안경을 쓰는 사람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도 나오겠죠.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주희재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실력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노력과 성과가 쌓이면 누구도 딴소리 못 합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가보세요. 나가면서 혜림 씨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소현성은 대화 내내 언짢은 말 한마디 듣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팀장에게 격려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팀장 집무실을 나섰을 때 가슴이 ‘쿵쿵’ 미친 듯이 뛰었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주희재는 굳이 힘을 드러내지 않아도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맞은편에 앉는 순간, 상대는 저도 모르게 그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저 단단한 근육 때문인가... 금방이라도 셔츠 단추가 터질 것 같은... 정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네.’

“하지만 만약...”

자기 자리로 돌아가던 길,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나에게 정말 특별한 능력, 촉이 있다면?”

남들은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어제는 단지 운이 따랐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만 분의 일 같은 우연을 내가 맞춰버린 걸까. 하지만... 만약 그게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정말 게임에서 비롯된 능력이라면? 혹시 이 차갑고 냉혹한 현실에서도 통한다면?’

자리로 돌아온 소현성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해 보면... 증시라는 것도 결국 수많은 데이터와 분석, 복잡한 모델들로 꾸려져 있지 않나. 하지만 마지막에 흐름을 결정짓는 건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지. 무작위성, 돌발 사건, 그리고 인간의 비이성적인 심리... 어쩌면 이 시장도 단지 더 거대하고 더 복잡한 룰을 가진,그리고 판돈이 훨씬 더 큰 초대형 추첨 게임 같은 것일지도 몰라...’

아무리 특정 트레이더가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기술적 지표를 숙지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블랙스완 이벤트나 군중심리에 기반한 비이성적 매수세가 발생하면 모든 분석이 무력화될 수 있기에 금융시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를 확정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이었다.

‘제발... 오늘은 좀 조용히 흘러가라.’

그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잠깐의 틈이라도 있어야, 어제의 그 불가사의한 능력이 단순한 착각인지, 아니면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집을 초능력인지 확인해 볼 수 있으니까.

...

‘역시... 이놈, 뭔가 숨기고 있군.’

주희재는 넓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붉은빛 원목 책상을 무심코 두드렸다. 묵직한 소리가 정적을 갈랐고 그의 시선은 멀리 뻗어 있었다.

소현성이라는 ‘낙하산’의 존재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네오투자캐피탈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황태원은 업계에서 능력만 보고 사람을 뽑는다고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무명의 사모펀드를 단기간에 정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결코 운이 아니었다.

그는 숨어 있던 인재를 찾아내 과감히 투자하고 권한을 몰아주며 그 대가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황태원의 진짜 무기, 업계 전체가 탐내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래서 주희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능력만을 신조로 삼고 그 어떤 인맥이나 연줄도 가차 없이 무시하던 황태원 회장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이력이 평범하고 실무 경험조차 없는 젊은이를 회사의 핵심부서인 트레이딩본부에 직접 꽂아 넣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깊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존경하던 회장마저 결국 혈연과 지연에 얽매여 낡은 구태를 되풀이하는 인사라고 단정해 버렸으니까.

하지만 방금 확인해 보니, 두 사람은 친척은커녕 사적인 연줄조차 없었다.

‘게다가 왜 파격 채용됐는지조차 끝내 말하지 않았다는 건 배짱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지... 입도 무겁고.’

방금의 짧은 문답만으로도 주희재는 소현성이 관리종목 중윤골드의 급등을 ‘미리’ 알고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으로는 운이라 얼버무렸지만,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억지스러운 말투,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이 바닥의 베테랑인 주희재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제 그 모의투자... 정말 자기 힘으로 해낸 걸까? 모두가 금 테마주 조정을 외치던 판에서 관리종목 단일 종목에, 그것도 풀베팅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상식으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결단력이야. 게다가 시장 전체가 다 숏 치는 판에서 혼자 롱을 잡았다는 건... 이건 단순하게 결단력으로만 해석할 수 없어.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력, 그야말로 괴물 같은 촉이지. 설마... 이놈, 진짜 물건인가?’

주희재의 눈이 매섭게 번쩍였다.

문간에서 들려온 이혜림의 목소리가 주희재의 생각을 끊어냈다.

“어, 혜림 씨 왔어요?”

주희재가 고개를 들었다.

“데일리 미팅 자료는 다 준비됐나요?”

“네, 전부 준비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주희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책상 위를 ‘탁’ 하고 한 번 두드렸다.

“우리 팀, 그리고 관련 부서에 미리 얘기 좀 해줘요. 오늘은 혜림 씨랑 소현성 씨, 어디 가지 말고 자리 지켜주세요. 현성 씨는 모의투자에만 집중하게 하고 혜림 씨가 옆에서 흐름이랑 기본 규정부터 잡아주세요.”

이혜림이 잠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네, 알겠습니다.”

뜻밖이긴 했지만 이혜림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 황태원이 왜 굳이 소현성이라는 신입을 그의 팀에 꽂아 넣었는지, 주희재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윗선의 보이지 않는 큰 그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현성, 저 녀석에게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주희재는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소현성이 가진 게 윗선과 직결된 정보망이든, 상식을 벗어난 시세 감각이든, 아니면 도파민에 중독된 위험 감수형 도박 근성으로 포장된 배짱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금부터는 소현성을 눈여겨보며 차분히 가려내면 실체가 드러날 테니까.’

물론 마지막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저 천운이 따라 눈 감고 던진 화살이 정곡을 꿰뚫은 것뿐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증시에서는 늘 그러지 않나. 실력이 3이면 나머지 7은 운. 결국 차트, 재무제표 다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운빨 한 방이면 게임 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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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롭고 급박한 시스템 알림음이 순식간에 리스크관리본부 전체를 휘몰아쳤다.리스크관리본부 팀장 장준휘는 등골 끝에서부터 차가운 한기가 솟구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순식간에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이 바닥에서 굴러온 세월이 몇 년인데, 이런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모니터가 파란색으로 뒤덮였다.그 파란색은 곧 시장 붕괴와 재앙을 의미했다. 번쩍이는 불길한 빛은 그 자체로 종말을 알리는 경고등 같았다.순간, 평소라면 재빨리 돌아가던 그의 머리마저 멈춰 섰다.남은 건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투박하고 무겁고 절망적인 결론이었다.‘씨X... 이제 끝장이다.’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부서 분위기는 은퇴 후의 오후처럼 한가로웠다.커피잔을 들고 잡담을 나누거나 다과를 곁들여 티타임을 즐기던 모습이었다.시장은 잔잔했고 관리할 만한 리스크도 없었다.그러나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 단숨에 하늘이 뒤집혔다.금융위원회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치 수심 깊은 바다에 폭탄을 던지듯 새로운 규제 정책을 기습 발표한 것이었다.그 소식은 마치 끓어오르는 기름 솥에 한 바가지의 얼음물을 퍼붓는 듯한 충격이었다.시장은 그대로 폭발했다.투매가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제방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내린 홍수처럼, 셀 수 없는 매도 물량이 무자비하게 덮쳐오고 있었다.“본부장님, 어... 어쩌면 좋습니까?”장준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나자빠지듯 반세훈 앞에 달려왔고 목소리는 너무 떨려 말 한마디조차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눈앞에 보인 건, 이미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정신마저 놓아버린 듯한 반세훈 본부장이었다.그 순간, 장준휘의 심장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우리가 뭘 어쩌겠습니까?”반세훈은 입술을 덜덜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 속에는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이 배어 있었다“우리 리스크관리본부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서버실에 뛰어가서 랜선을 뽑아버릴 겁니까? 거래소

  • 백수에서 개미들의 신이 되다   제97화

    양건우는 숨조차 멎은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손아귀에 힘주어 움켜쥔 마우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덜덜 떨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단순한 클릭조차 쉽지 않았다.그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주신의 신이 환생하여 인간 세상에 개입해 만들어낸 기적 같은 대역전이었다.‘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트레이딩본부 신설팀을 맡은 지 겨우 일주일 남짓 된 팀장이, 무슨 근거로 이런 사태를 예측할 수 있었단 말인가? 소현성... 저 사람은 도대체 정체가 뭐지?’양건우는 그 순간 200% 확신했다.광한국의 금융 중심지는 물론, 전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이런 타이밍에 이런 방식으로 시장의 붕괴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그 사람은 바로 트레이딩본부 7팀의 믿기 어려울 만큼 젊은 팀장 소현성이었다.‘설령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괴물 같은 천재가 있어 이번 폭락을 예상했다 해도, 과연 누가 우리 팀장님을 흉내 낼 수 있을까? 누가 감히 모든 이가 매수 버튼을 광기에 가까운 열기로 눌러대던 그 순간에 홀로 반대편에 설 수 있었겠는가? 조롱과 의심, 질타와 비웃음을 정면으로 감수하면서 가진 자금을 몽땅 내던져 시장을 거스르는 그런 베팅을 누가 감히 할 수 있었겠는가? 단순한 통찰의 영역이 아니야. 그건 배짱이고 광기이며 동시에... 선택받은 자만이 감히 할 수 있는 도박이야.’그건 절대 대수롭지 않은 소액의 시도가 아니었다. 수십만 원, 수백만 원 단위의 소액 투자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무려 100억 원, 중견기업 하나 부도나게 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양건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자석에 이끌리듯 얇은 유리 칸막이 너머로 향했다.회사 전체가 종말 같은 혼돈과 공포에 휩싸인 순간에도 소현성은 바른 자세로 흔들림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양건우는 단 한 번의 눈 깜박임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숨을 죽이며 소현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백수에서 개미들의 신이 되다   제96화

    “이 썩을 놈들, 개 같은 것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송이고 신문이고 전부 나서서 당장 주식 사라고 부추겨대더니...”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에는 배신감에 짓눌린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다니! 젠장, 진짜 비열하고 파렴치하잖아요!”“빨리 팔아요! 지금 당장 다 팔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들고 있는 포지션 전부 박살 납니다! 어서요!”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흡연구역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성과급으로 최신형 수입차를 뽑을지, 아니면 휴양지로 떠날지를 두고 떠들던 사람들이었다.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두 가장 원초적인 공포와 절망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트레이딩본부 사무실은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절망의 고함, 광기에 가까운 키보드 두드림, 눈앞에서 자산이 산산이 부서져 가는 광경에 억눌린 소리 없는 비명들로 뒤덮었다.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빨리 손실을 끊고 빠져나가길 원했다. 그것만이 이 돌발적인 참사를 피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시장에는 이미 매도 물량만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셀 수 없이 겹겹이 쌓여 올라가는 매도 호가 속에서 이를 받아낼 매수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바로 그 시각, 사모펀드는 트레이딩본부 소속팀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팀은 종말을 맞은 듯한 혼란과 공포에 잠식되고 있었다.오직 7팀만은 폭풍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한 발 비켜 서 있었다. 마치 거센 강물 건너편에서 불시에 터진 거대한 불꽃놀이를 차갑게 지켜보는 듯했다.물론 그것이 진정한 평온일 리는 없었다.7팀 구성원들 또한 심장이 벌렁거렸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또 다른 충격에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정말... 정말 팀장님 예언대로 주식시장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겁니까?”한 선임 트레이더는 눈앞에 펼쳐진 차트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

  • 백수에서 개미들의 신이 되다   제95화

    “방금... 방금 전입니다. 몇 분 전쯤이었어요.”이수호는 온몸의 힘을 짜내듯 겨우 말을 이었다. 이미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금융위원회에서 긴급 정책 조정 발표문을 냈습니다. 앞으로 신용거래, 특히 레버리지를 동반한 공매도 거래를 전면 제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뭐라고요?”양건우는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이 텅 비듯 새하얘졌고 몸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얼어붙는 듯 뻣뻣해진 감각이 전신에 퍼져 나갔다.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었다.금융당국이 직접 나서 단기 과열을 차단하겠다는 가장 강경하고도 명확한 메시지이었다. 지금까지 증시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밀어 넣던 ‘신용거래 자금’, 일명 빚투의 동맥을 정면으로 끊어 버리겠다는 의미였다.“그러니까... 그래서 다들 이렇게 아우성치는 거군요.”이수호의 얼굴은 거의 오열 직전처럼 일그러졌다.“양 수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시장에 들어와 있는 자금의 절대다수는 사실상 본인 돈이 아니라, 몇 배에서 많게는 열 배까지 불린 신용거래 자금입니다. 전부 빚이지요. 그런데 그걸 오늘 당장 막아 버리겠다고 하니...”그의 목소리는 끝내 갈라졌다.사무실을 짓누르는 정적은 곧 닥쳐올 시장 붕괴의 서막을 알리는 불길한 침묵 같았다.불과 짧은 시간 안에 주식시장이 폭발적으로 치솟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금융당국이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강력히 밀어붙인 신용거래 제도가 있었다.쉽게 말해 투자자가 자기 계좌에 가진 소액의 자금을 증거금으로 맡기면, 증권사를 통해 그 몇 배, 심지어 열 배 가까운 돈을 추가로 빌려 주식 거래에 나설 수 있었다.예컨대 2천만 원밖에 없더라도 신용거래를 활용하면 최대 2억 원을 굴릴 수 있는 셈이었다.이 제도는 사실상 ‘재테크용 흥분제’였다.순식간에 부를 불릴 수 있다는 환상은 개인 투자자들을 불나방처럼 끌어들였고 시장은 ‘돈이 돈을 부르는’ 불길로 달아올랐다.그러나 바로 오늘, 금융당국이 태도를 돌연 뒤집었다.그동안 무제한으로 열어 두었던 자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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