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심성빈은 송하나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식탁으로 데려갔다. 의자를 빼주는 제스처는 더없이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한편 차설아는 최로운을 끌고 뒤따라가면서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눈빛으로 경고했다.최로운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입술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해 보였다.언제든 마누라 말을 잘 듣는 게 최고니까.식사 후, 차설아와 송하나는 정원 산책에 나섰다.넓은 정원은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무성하고 아름다웠다. 그 안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 심겨 있었다.따스한 햇살이 꽃가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떨어진 꽃잎들이 형형색색으로 흩날렸고 은은한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이 정원 진짜 이쁘다.”차설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이 꽃들 다 성빈 씨가 심었어. 시간 날 때마다 직접 물도 주고 그랬거든.”송하나는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차설아는 듣고 나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꽃과 나무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관리되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까.심성빈이 이 모든 것을 가꾸는 것은 오롯이 송하나를 위해서였겠지.그녀를 향한 배려와 보살핌, 또한 그녀를 바라볼 때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따뜻함과 애정 어린 시선은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어쩌면 심성빈이 송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차정원보다 못지않을지도 모른다.송하나가 기억을 잃은 상황, 모두가 그녀를 죽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심성빈은 얼마든지 그녀를 숨기고 평생 함께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진실을 말하고 희생을 택했으며 송하나를 차정원에게 돌려주려 했다.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심성빈은 말 그대로 참된 어른이었다.하지만 차정원은...겨우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았는데 사랑하는 하나를 데리고 귀국하기도 전에 불행을 겪다니.여기까지 생각한 차설아는 또다시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피어 있는 꽃을 보는 척했다.“설아야.”별안간 송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차설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내가 아
“뭐야... 나 이렇게 멀쩡히 잘 있잖아.”송하나가 상냥하게 웃으며 차설아를 다독였다.“지난번에 실수로 물에 빠지는 바람에 고생 좀 했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회복하고 귀국해서 너 보러 가려고 했어.”그녀는 말을 마치고 심성빈을 돌아보며 은근한 의지와 확신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그렇죠, 성빈 씨?”심성빈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몸 잘 추스르면 돌아가자.”송하나는 단지 귀국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신과 함께 돌아갈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다.차설아는 분위기를 따라 눈빛에서 슬픔을 서서히 거두고 울음 끝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조용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던 찰나, 현관에서 갑자기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최로운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양복은 구겨져 있었고 턱에는 거뭇한 수염 자국이 선명했다. 눈은 핏발이 서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달려왔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들어오자마자 차설아를 발견한 최로운의 눈동자가 안도감으로 흔들렸다.그는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가 차설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는 안도감과 그간의 두려움이 섞여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여보, 왜 말도 없이 이런 곳까지 혼자 온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차설아는 그가 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숨이 막혔고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면서도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최로운의 다리를 툭 찼다.“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이 남자가 계속 거짓말로 둘러대고 회피만 하지 않았어도 그녀가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이 먼 곳까지 홀로 오진 않았을 것이다.오빠의 실종을 생각하자 조금 전 애써 눌러두었던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최로운도 제 잘못을 아는지라 그녀를 더욱 꽉 안아줄 뿐이었다.그는 자세를 낮추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잘못했어. 다 내 탓이야. 여보, 앞으로는 제발 말 한마디 없이 떠나
차설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붉게 달아올랐으며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심성빈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에 전부 그의 탓으로 돌릴 순 없을 터.하지만 평생을 함께 자란 오빠인데 이토록 비극적인 현실을 어떻게 단번에 마주하란 말인가.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긴 침묵 끝에 차설아는 울음을 삼키며 두 눈이 충혈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하나는요? 하나는 어떻게 됐어요?”“하나는...”심성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투에는 안쓰러움과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묻어났다.“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거의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정말 견디지 못할 상황까지 치달을 뻔했어요.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의사의 권유에 따라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웠어요. 지금 하나는 많은 기억을 잊은 상태에요. 차정원 씨도 포함해서요...”차설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송하나와 차정원이 그토록 서로를 사랑하는데,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사고를 목격한 송하나는 아마 차설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하나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지금 자고 있어요.”심성빈이 답했다.“우선 가정부 시켜서 객실 하나 내어줄 테니 좀 쉬세요. 하나 깨어나거든 모셔다드릴게요.”말을 마친 심성빈은 차설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신신당부했다.“설아 씨, 이따 하나 만나면 꼭 좀 감정 잘 추스르길 바랄게요. 겨우 안정을 되찾은 상태라 작은 자극도 견디기 힘드니 절대 하나 앞에서 말실수라도 하면 안 돼요.”차설아는 눈물을 머금은 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해해요. 자제할게요.”가정부는 차설아를 객실로 안내했다.문이 닫히는 순간, 애써 지탱하던 모든 강인함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소리 없이 오열했다.생사조차 알 수 없는 오빠의 안위, 그리
비행기는 밤새도록 날아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이국땅의 공항에 착륙했다.차설아는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는 경호원이 캐리어를 끌며 그림자처럼 붙어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다.차설아는 무심결에 휴대폰을 열었다. 화면에는 최로운에게서 온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개자식, 내가 집에 없는 걸 알아채고 따지려는 거겠지.’다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진실을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차설아는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출구를 막 나서려는 찰나,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차설아 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그녀는 멈칫했다.“누구시죠? 저를 아세요?”출국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걸까?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네.”차설아의 얼굴에 의구심이 서렸다.“혹시 최로운이 보냈어요?”최로운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혹시 그녀에게 진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 공항에서 가로막으려는 건 아닐까.차설아는 서늘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쏘아붙였다.“가서 전해요. 오늘 오빠랑 하나를 만나기 전까진 절대 안 돌아간다고. 아무도 막을 생각 하지 마세요!”“사실 저희는 심성빈 대표님이 보내셨습니다. 송하나 씨를 만나고 싶다면 저희를 따라오세요.”심성빈 이름 석 자를 듣자 차설아의 경계심이 한풀 꺾였다.애초에 심성빈이 송하나를 구해주었으니 이 사태의 전말을 잘 알고 있는 인물 역시 심성빈뿐이었다.차설아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을 순 없었다. 이 사람들이 일부러 속임수를 쓰는 걸 수도 있으니까.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제가 낯을 좀 가려서 낯선 사람과 한 차에 타는 건 불편하네요. 차 한 대 내주시겠어요? 앞장서시면 저랑 경호원이 뒤따라갈게요.”어쨌거나 제 돈 주고 고용한 경호원이니 당연히 그녀의 안전을 지켜줄
지난번 송하나 사고 이후, 해외에서 돌아온 이강우는 마치 사람이 바뀐 듯 점점 더 바삐 일했다.심지어 자주 유라온으로 가곤 했고 예전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던 낯선 업종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안 그래도 의아했던 최로운은 참다못해 물었다.“잘 돌아가고 있는 안정된 사업은 제대로 안 하고 왜 갑자기 낯선 분야를 이렇게 많이 확장해? 날마다 해외를 뛰어다니면 안 피곤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고개를 든 이강우는 담담한 어조로 대충 둘러댔다.“갑자기 흥미가 생겼을 뿐이야. 새 분야를 한번 해 보는 거지.”더 깊은 얘기는 일부러 피하며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최로운은 그 모습을 보고 더 묻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사실 그 이유는 이강우 자신만 알 뿐이었다.지난 몇 달 동안 여러 국가의 정재계 인사를 만나며 막대한 재력, 인맥, 그리고 정력을 소비했다. 물론 이건 물밑 작업에 불과했다.이강우가 손댄 모든 업종들은 다름 아닌 빅토르 가문의 주력 사업 및 산하의 체인 산업이었다.송하나 사고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이강우는 몰래 계획을 세워 두었다. 상업적 수단을 써서 송하나에게 상처를 준 그 나쁜 놈을 포위 섬멸하려는 것,,.설사 송하나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해도 이 계획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바로 그때 최로운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집에 있는 가정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아무 생각 없이 받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대표님, 얼마 전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한 고급 주얼리가 도착했습니다. 백화점 담당자가 직접 집에 가져왔는데 가격이 비싸서 대표님께서 직접 받으셔야 합니다. 저희가 대신 받을 수 없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오늘 밤 귀가하시나요?”최로운은 무심하게 되물었다.“사모님은 집에 안 계세요?”가정부가 솔직히 말했다.“안 계십니다, 사모님은 오늘 오전에 캐리어를 끌고 나가셨어요. 가기 전에 작은 아가씨까지 친가인 차씨 가문 본가에 데려다주셨고요.”그 말이 떨어
다음 날 아침.최로운이 외출한 후, 차설아는 최이솔의 볼에 입을 맞추고 친정으로 데려가 가족들에게 부탁했다.별장으로 돌아와서는 간단히 짐을 쌌다. 해외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바로 떠날 작정이었다.장을 보고 돌아온 가정부는 차설아가 캐리어를 끌고 여행 복장을 한 모습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사모님, 먼 길 가시는 겁니까?”차설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핑계나 대충 둘러댔다.“여행 패키지 하나 신청했어요. 기분 전환 좀 하려고요. 점심은 알아서 드세요.”가정부는 별 의심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그럼 길 조심하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살짝 고개를 끄덕인 차설아는 바로 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바로 공항으로 가지 않고 현지의 최고급 보안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톱스타와 재계 거물들에게 전용 경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전문성이 뛰어났다.높은 비용임에도 돈을 아끼지 않고 지불해 실력 좋은 경호원 네 명을 고용해 동행하기로 했다.그들이 호위해 주니 마음이 조금 더 든든했다.공항에서 대기할 때, 차설아는 심플하고 날렵한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뒤에는 체격이 좋고 까만 옷을 입은 당당한 경호원 4명이 바짝 따랐다. 그녀의 활기찬 모습과 함께 뒤에는 몸이 탄탄한 경호원들까지 있어 단번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은밀히 해외로 나가는 인기 여배우로 오해받기도 했다.차설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빨리 해외로 가서 오빠와 송하나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다.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항공편이 일시적으로 지연된다는 통보를 받았다.오후 3시에 떠날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이륙할 수 있었다.저녁, 최로운은 이강우를 자기 술집에 불러 조용히 만나기로 했다.고급스럽고 사적인 룸은 조명이 어두워 술기운을 물씬 풍겼다.최로운은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을 안고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켰다.맞은편에 앉은 이강우는 가끔 잔에 든 술을 한 모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