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6
By:  글쓰는 여우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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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정치인의 딸 공지안은 사랑하는 연인의 배신으로 차가운 겨울 바다에 추락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 된다. 5년 후, 새로운 얼굴과 이름 '공서린'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름과 삶을 되찾기 위해 거대한 권력과 맞선다. 복수를 위해 수혁의 회사를 이용하려는 서린과, 그녀를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삼으려는 수혁.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그리고 서린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진실을 밝혀내고, 자신의 이름과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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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0화. 프롤로그

북한산 자락, 평창동의 한 고풍스러운 저택.

짙은 시가 연기로 가득한 방 안.

거대한 가죽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를 사람들은 ‘어르신’이라 불렀다.

“강민재에게 물건은 잘 전달했나.”

그의 앞에 서 있던 강태환 비서관이 고개를 숙였다.

“예. USB에 음악 파일을 넣어두었다고 전했습니다.”

여벙석은 천천히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 껐다.

“모든 일은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라앉혔다.

“작은 증거 하나가, 나중에는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는 법이지.”

여병석은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북한산 능선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권력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강태환은 조용히 물었다.

“강민재 의원도 함께 타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같이 처리될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여병석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유력 대선 후보의 딸과 상대당 보좌관.”

여병석이 피식 웃었다.

“비극으로 포장하기엔 딱 좋지 않나.”

그는 강태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은 언제나 믿고 싶은 이야기만 믿는 법이야. 특히나 이런 비극은 더 쉽게 믿지."

강태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수많은 일을 처리해 왔다.

오늘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잠시 후,

강태환은 복도 끝 보안 통제실로 들어갔다.

모니터에는 강원도 해안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점 하나가 어두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헤드셋 너머로 남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 제발 내 말 좀 들어!

— 오빠를 지키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공지안의 울먹이는 목소리.

강태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됐군.”

강태환은 화면 속 차량을 잠시 바라보았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계산은 끝났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된다.

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가 작은 버튼 위에서 멈췄다.

[원격 제어 실행]

딸깍.

명령어가 전송되는 작은 소리.

그 순간.

— 어? 오빠, 차가 이상해!

— 안 돼!!

브레이크가 먹히지 않는 비명.

미끄러지는 타이어 소리.

통제를 잃고 폭주하는 엔진음.

그리고.

콰아아앙—!!

곧,

모든 소리가 끊겼다.

강태환은 헤드셋을 벗어 내려놓았다.

그리고 흔적도 남지 않도록 모든 접속 기록을 삭제했다.

잠시 후, 휴대폰을 들어 짧은 문자를 보냈다.

[처리 완료했습니다.]

메시지는 곧바로 읽음 표시로 바뀌었다.

강태환은 휴대폰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 위의 붉은 점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날 밤.

공지안은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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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프롤로그
북한산 자락, 평창동의 한 고풍스러운 저택.짙은 시가 연기로 가득한 방 안.거대한 가죽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를 사람들은 ‘어르신’이라 불렀다.“강민재에게 물건은 잘 전달했나.”그의 앞에 서 있던 강태환 비서관이 고개를 숙였다.“예. USB에 음악 파일을 넣어두었다고 전했습니다.”여벙석은 천천히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 껐다.“모든 일은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라앉혔다.“작은 증거 하나가, 나중에는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는 법이지.”여병석은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북한산 능선을 바라보았다.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권력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었다.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강태환은 조용히 물었다.“강민재 의원도 함께 타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같이 처리될 수 있습니다.”“상관없어.”여병석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유력 대선 후보의 딸과 상대당 보좌관.”여병석이 피식 웃었다.“비극으로 포장하기엔 딱 좋지 않나.”그는 강태환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세상은 언제나 믿고 싶은 이야기만 믿는 법이야. 특히나 이런 비극은 더 쉽게 믿지."강태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수많은 일을 처리해 왔다.오늘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잠시 후,강태환은 복도 끝 보안 통제실로 들어갔다.모니터에는 강원도 해안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붉은 점 하나가 어두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헤드셋 너머로 남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오빠를 지키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공지안의 울먹이는 목소리.강태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했다.“시간이 됐군.”강태환은 화면 속 차량을 잠시 바라보았다.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계산은 끝났다.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된다.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커서가 작은 버튼 위에서 멈췄다.[원격 제어 실행]딸깍.명령어가 전송되는 작은 소리.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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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자의 귀환
차가 가라앉고 있었다.두려움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지안은 옆을 보았다.그는 여전히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며 일그러져 있었다.절망이나 놀람이 아니라, 원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철컥.금속성의 마찰음이 물속에서 둔탁하게 울렸다.그는 안전벨트를 풀며 차창을 내렸다.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또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마치,이 모든 일이 너 때문이라는 듯.‘오빠... 뭐라고 하는 거야. 안 들려...’그리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차창 밖으로 나갔다.열린 차창으로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같이… 가… 오빠….”지안이 손을 뻗었다.손끝이 그의 재킷 자락을 스쳤으나, 그는 몸을 비틀어서 차창 밖으로 빠져나갔다.뻗어온 손을 뿌리치듯.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나 버리지 마 오빠... 제발...’수면 위로 향하는 그의 다리가 물결 너머로 흐릿하게 멀어졌다.그가 빠져나간 창문으로 더 많은 물이, 더 무거운 어둠이 쏟아져 들어왔다.혼자 남은 지안은 차와 함께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차가운 바다 아래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그 깊은 곳으로.‘나 무서워. 살려줘 오빠... 살려줘. 오빠-!’온 몸이 물에 잠기고 짜디 짠 바닷물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읍―읍―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 없이.그렇게 지안은 의식을 잃어갔다.“승객 여러분,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기계음이 현실을 찢고 들어왔다.“허윽…!”서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순간, 환한 불빛이 서린의 눈에 들어왔다.물이 아니라 공기였다.건조한 기내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지만 숨통은 여전히 트이지 않았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요동쳤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손을 내려다보았다.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주먹을 꽉 쥐었다.바닷물에 퉁퉁 부은 손에 덕지덕지 소금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3년 만이었다.이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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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떻게 잊어.
택시는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멈췄다.서린은 캐리어를 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다.숫자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마음도 함께 정리되는 것 같았다.아니, 정리되기를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문을 열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침대와 테이블, 최소한의 가구만 놓인 방이었다.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사람의 집처럼 비어 있었다.서린은 캐리어를 벽 쪽에 세워두고 신발을 벗었다.흐읍—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다시 발을 옮겼다.방 안의 적막이 생각보다 깊었다.가끔씩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머물던 곳이었지만, 돌아갈 기한을 정하지 않고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공기가 몸을 감쌌다.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노트북을 올리고 전원을 켰다.푸른 불빛이 그녀의 창백하고 서늘한 얼굴을 비췄다.폴더 하나를 열었다.지난 5년,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는 틈틈이, 고통 속에서 악착같이 모아온 자료들이었다.사고 당시의 기사, 경찰 조서, 그리고 엄마가 보내주는 그 남자의 근황.화면 속의 남자는 웃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는 저 웃음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지금은 그 웃음이 가장 끔찍한 기억이 되어 있었다.그녀가 차가운 물 속에서 죽어가던 그 시간, 그는 살아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사고는 ‘빗길 운전 부주의로 인한 추락’으로 종결되었고, 시신을 찾지 못한 그녀는 실종 후 사망 처리되었다.“기다려요”서린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내가 갈 때까지.”노트북의 화면을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차가운 커피가 필요했다.서린이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서린의 가슴이 저릿해졌다.[엄마]화면에 뜬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전화를 받을 용기보다 울음을 참을 용기가 더 필요했다.죽은 딸을 가슴에 묻은 척하며 5년을 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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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오늘은 여기까지.
아침은 조용했다.어제와 같은 세상이었지만, 서린에게는 전혀 다른 시작이었다.알람이 울리기 전, 서린은 먼저 눈을 떴다.깊이 잠들지는 못했지만, 숨이 막히는 꿈은 없었다.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이 방, 이 침대, 이 아침. 아직은 낯설었다.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았다.낯섦과 익숙함 사이, 어정쩡한 경계. 서린은 그 감각이 싫지 않았다.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켰다.메일함에는 밤새 도착한 알림들이 쌓여 있었다.서린은 순서대로 하나씩 열어 내려갔다.서류 합격.서류 합격.그리고 또, 서류 합격.화면에는 축하드립니다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떠 있었다.누구에게는 기회의 시작이었겠지만, 서린에게는 달랐다.합격 자체보다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두 곳은 국내 대기업 계열사, 한 곳은 외국계 컨설팅 회사였다.조건은 훌륭했다.연봉, 복지, 커리어 패스.누구나 선망할 만한 자리였다.하지만 서린은 숫자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대신 회사 소개 페이지를 열었다.사업 구조, 주요 거래처, 자금 흐름.국제통상과 국제경영을 전공하고, 데이터 분석으로 먹고 살아온 그녀에게 회사는 일터가 아니라 구조였다.돈이 어디서 들어와서, 어디로 흘러가며, 중간에서 무엇이 남는지. 규모가 큰 기업은 시스템도 촘촘했다.누군가 흔적을 남기면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발견한다.그녀가 찾는 것은 그런 회사가 아니었다.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안에서는 얼마든지 썩어 들어갈 수 있는 곳.그 관점으로 보자면 이 회사들은 너무 컸고, 너무 정제되어 있었다.이미 수많은 눈이 붙어 있는 구조.처음부터 조금 더 알아보고 지원할 걸 그랬나.서류 합격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여기 와서 구해도 됐을 텐데.낯선 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급하게 움직인 결과였다.그때의 자신은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지, 어디로 들어갈 것인지는 제대로 고민하지 못했다.채용 사이트에서 스크롤을 내리던 중, 시선이 멈췄다.중고자동차 매입·매출 전문 기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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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래서 뽑으려고.
수혁은 그 표정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이곳에선 늘 같은 순서였다.거짓말, 분노, 그리고 침묵. 수혁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결과를 확정하는 눈이었다.“선택하시죠.”수혁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낡은 가죽 의자가 낮게 삐걱거렸다.“지금 이 가격에 넘기고 가시든가, 아니면 사기 미수로 경찰서에서 커피 한 잔 하시든가.”남자는 이를 갈며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종이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중고 자동차 250대가 수혁이 원하는 가격에서 한푼도 더 깎이지 않고 매입하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회사를 살리는 일은 거래 하나를 이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더러워서 진짜… 독사 같은 새끼.”문이 닫히자 대표실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수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창문 틈으로 매매 단지의 매캐한 공기와 뜨거운 열기가 밀려들었다.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끈적한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았다.잠시 후, 수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고쳐 매고 회의실로 향했다.이미 임원들과 실무 팀장들, 외부 자문 변호사인 정민우, 그리고 수혁이 이곳으로 좌천될 때 유일하게 따라온 직원인 한지우 대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방금 전 대표실에서 들려온 고성 때문인지, 아니면 스크린에 띄워진 붉은색 그래프 때문인지 회의실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수혁이 상석에 앉자마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그는 말없이 레이저 포인터를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설명해 보시죠.”수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지난 분기,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매입량도 늘었고, 회전율도 업계 1위입니다. 그런데.”포인터의 붉은 점이 그래프의 바닥, ‘0’에 수렴하는 영업이익을 짚었다.“이익이 제로인 이유는 뭡니까? 차를 팔았는데 남는 게 없다는 게, 산술적으로 말이 됩니까?”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문제는 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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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선택할 수 있다면
서린은 주변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 한 병을 꺼냈다.유리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아— 시원하다.”고개를 돌려 노트북 화면을 슬쩍 바라봤다.아직 답장은 없었다.서린은 컵을 내려놓고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가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머물던 오피스텔이었다.며칠 머물다 떠나는 임시 거처였기에 늘 캐리어를 닫아 둔 채 지냈다.서린은 벽에 기대어 두었던 캐리어를 끌어왔다.지퍼를 열자 옷가지 사이로 액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이제 정리를 좀 해 볼까.”얼마나 머물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이곳이 집이었다.그녀는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꺼내 거실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작은 공간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액자를 바라보던 서린은 손끝으로 유리를 한 번 쓸어내렸다.그리고 캐리어 안쪽에 넣어 두었던 서류 봉투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차례대로 늘어놓았다.봉투마다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이미 지원을 마친 곳들. 대기업 계열사도 있었고 외국계 기업도 있었다.그녀는 가장 위에 놓인 봉투를 뒤집어 보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이탈리아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배운 건, 잘 돌아가는 시스템이나 숫자가 예쁘게 정리된 보고서보다 그 뒤에 숨은 흐름을 읽는 법이었다.오늘 면접이 예정된 회사도 그중 하나였다.아침에 이력서를 보낸 한도오토링크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하지만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이번만큼은 조건이 아니라 방향을 선택하고 싶었다.서린은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들 사이에서 한도오토링크 관련 자료를 집어 들었다.손끝으로 대표 이름이 적힌 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차수혁.이 회사라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숨겨진 진실에도.그리고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도.서린은 천천히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서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확인했다.메일 한 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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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한 걸음부터
하지만 수혁의 시선은 달랐다.그는 경력 사항이 아니라, 그녀가 지운 흔적들을 보고 있었다.굳이 적지 않은 부모님의 직업, 비어 있는 가족 관계, 그리고 자기소개서에 적힌 문장 하나.‘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이건 쉬어가려는 사람의 문장이 아니었다.수혁은 이력서를 한 번 더 펼쳤다.종이 위에는 특별할 것 없는 문장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경력.학력.자격증.하지만 그가 보는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비어 있는 곳이었다.해외 근무를 했으면서도 성과를 과장하지 않았다.프로젝트를 나열하지도 않았다.누구 밑에서 일했는지보다 무엇을 배웠는지만 남겨 두었다.대부분은 이력서로 자신을 포장한다.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쓴다.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다.굳이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을 덜어낸 흔적이 보였다.수혁은 그런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정말 실력이 있는 사람은 설명보다 결과를 먼저 보여 준다.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쉽게 흔들리지 않았다.수혁은 이력서를 조용히 덮었다.“이 사람은,”수혁이 입을 열었다.시선은 여전히 이력서에 고정된 채였다.“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대충 시간만 떼우는 직장인이 아니라.”“네?”“보통 잠깐 있다 갈 놈들은 목적이 분명해.”수혁이 이력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한 귀퉁이를 접었다.다른 지원 서류에는 없던 표시였다.“돈이든, 타이틀이든, 커리어든. 그래서 이력서가 시끄럽지. 내가 뭘 해냈는지, 뭘 더 원하고 있는지 줄줄이 써놔. 자기를 증명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으니까.”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력서를 다시 훑었다.“근데 이 사람은 성과 자랑도 없고, 목표 선언도 없어. 대신…”수혁이 자기소개서의 한 문장을 톡톡 두드렸다.“‘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 먼저.’”그는 고개를 들었다.“이 말은 자신감 없으면 못 써. 해결은 못 해도 정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든.”수혁이 이력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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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첫 만남.
택시에서 내렸을 때, 서린은 잠시 건물 전경을 올려다보았다.지도 앱이 가리키는 곳은 서울 외곽의 물류 단지와 인접한 지역이었다.대형 유리 빌딩도, 화려한 로고도 없었다.4층짜리 회색 벽돌 건물이었다.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낡았다기보다는 단단하게 다져진 느낌이었다.건물 입구 옆, 무광의 검은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한도오토링크].글자 크기는 작았고, 폰트는 정직했다.불필요한 디자인이나 수식어는 없었다.서린은 그 간판을 보는 순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숨기지도 않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구나.’자신을 과장해서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 회사.그것이 서린이 받은 첫인상이었다.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었다.1층은 로비라기보다 차량 키와 서류를 보관하는 통제실에 가까웠다.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 사이로 묘한 질서가 흐르고 있었다.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서류함은 오차 없이 정렬되어 있었다.안내 직원은 깍듯했지만 사무적이었다.“공서린 씨 되십니까?”“네, 2시 면접 예정입니다.”“2층 실무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복도는 조용했다.유리벽 너머 사무실 풍경은 진지하고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느슨하지는 않았다.“이쪽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서린은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을 보았다.비어 있었다.다른 지원자는 없었다.마치 누군가 그녀만을 핀셋으로 집어 올려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서린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그녀는 긴장하지 않았다.대신 감각을 예민하게 세웠다.‘칼을 숨긴 회사인지, 무딘 칼만 쥔 회사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그렇게 생각하자 호흡이 차분해졌다.얼마나 지났을까.복도 쪽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큰 키에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소매는 걷어 올려져 있었다.방금 전까지 현장에 있었던 사람 특유의 열기와, 사무실의 냉기가 묘하게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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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확인했다.
“차라리 솔직하군요.”수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비웃음인지 미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보통은 ‘영업 이익을 늘리겠다’거나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떠들던데.”“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익을 논하는 건 허상입니다.”서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리고 저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모른다?”“네. 차종, 시세, 옵션,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 딜러들처럼 차 소리만 듣고 상태를 알 수도 없습니다.”서린은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았다.“하지만 데이터는 압니다. 차는 거짓말을 해도, 숫자는 흔적을 남기니까요. 저는 차를 보는 게 아니라, 그 흐름을 봅니다.”수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공기의 밀도가 팽팽해졌다.“하나만 묻죠.”그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만약 내가-그 흐름을 조작하라고 시키면?”수혁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덧붙였다.“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장부에 가짜 숫자를 채워 넣으라고 지시한다면.”“.....?”“어떻게 할 겁니까?”‘생각보다 노골적인 질문이네.’하지만, 서린은 흔들리지 않았다.“지시하신다면, 따르지 않겠습니다.”“이유는? 정의감 때문에?”“아니요.”서린은 고개를 저었다.“조작은 균열을 만듭니다. 균열은 결국 구조를 무너뜨립니다.”말을 잇는 서린의 눈에 빛이 스쳤다.“가짜 숫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구멍을 냅니다. 한 번 메우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 구조가 무너집니다.”서린의 대답에 수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처음으로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저는 무너지는 배에는 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탄 배를 제 손으로 구멍 내지도 않습니다.”서린은 잠시 멈췄다그리고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대표님도 그런 걸 원해서 저를 부른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잠시 말을 멈춘 서린이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조작할 사람이 필요했다면-저보다 멍청하거나, 더 욕심 많은 사람을 뽑으셨겠죠.”수혁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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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첫 출근.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메일과 같은 내용의 문자였다.저장되지 않은 번호.[오전 9시. 본사 2층.]그게 전부였다.합격을 축하한다는 말도 없고, 출근 준비에 대한 안내도 없었다.서린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문자는 짧았지만 보내는 사람이 성격이 보였다.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필요한 사람인지 아닌지만 본다.화면이 꺼질 때까지 바라보던 서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보통 회사는 아니네.”오히려 마음에 들었다.사람을 정중하게 모셔오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었다.빈자리를 채우려는 곳이 아니라, 일을 맡길 사람을 찾는 곳.들어오자마자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원하는 곳.“그럴 줄 알았어.”서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구두굽 소리가 아스팔트 위에 또각, 또각 울렸다.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앞으로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을 향한 첫걸음이었다.서린은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첫 출근이었다.아침 햇살이 앞 유리를 가득 채웠다.시동을 건 차가 천천히 도로로 미끄러져 나갔다.오늘은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어떤 얼굴들을 만나게 될까.기대감과 긴장이 적당히 뒤섞인 채 서린은 액셀을 밟았다.30분 후.한도오토링크 건물 2층에 들어섰을 때 시계는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문을 여는 순간 뜨거운 열기와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사무실은 이미 전쟁터였다.전화벨 소리가 쉼 없이 울렸고, 직원들은 서류 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야! 인천 단지에 있는 매물 누가 먼저 잡았어! 계약금 쐈어, 안 쐈어!”“탁송 기사 아직 도착 안 했답니다! 고객 지금 컴플레인 들어오고 난리 났어요!”고함과 욕설.커피 냄새.어딘가에서 묻어 들어온 타이어와 엔진오일 냄새.온갖 것들이 뒤섞인 공기가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온 서린에게 관심을 두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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