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부친을 끌어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말하든 부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부친의 충군애국을 계속 강조하며 답해야 할 질문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황제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숙청제는 예전처럼 우회적으로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는 사여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테지. 만약 짐이 죽으면 그가 섭정왕이 되어 어린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송석석의 마음은 세차게 가라앉았고, 분노가 눈에 가득 차올랐다. 남강에서 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그가 이렇게 노골적인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사여묵을 대신해 억울함을 느끼며 차갑고 빠른 말투로 말했다. "폐하, 저는 그와 부부가 된지 겨우 삼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의 형님이신 폐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가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화낼 필요 없다. 짐은 상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너는 신하로서 네 부친과 마찬가지로…...""폐하!" 송석석은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든 아니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제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지, 제 부친과는 관계없습니다. 부친은 이미 남강 전장에서 전사하셨고, 그의 공로는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숙청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송석석,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너와 네 부친이 한 일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이냐?"오 대반이 깜짝 놀라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송석석이 벌떡 일어나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송석석이 무릎을 꿇고 있던 순간이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치 한 세기가 지나간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숙청제의 미묘한 한숨과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어쩌다 이렇게 버럭 화를 내는 거냐?"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처음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말을 쏟아낸 것이었고, 그 뒤의 말들은 약간의 도박과도 같았다.그녀의 마음속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생명이 거의 다한 황제가 잔혹해지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증명해 보이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이렇게 버럭 화를 내는 것만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행동한 것이었다."일어나라." 숙청제의 목소리는 이미 훨씬 부드러워졌고, 앙상하고 누런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여전히 어릴 적 그대로 입에 발린 말을 절대 못 참는구나. 그냥 한마디 물어봤을 뿐인데 하늘을 뒤엎을 듯이 짐을 꾸짖어 대는 거 하고는. 정말 네게는 당해낼 수가 없구나."송석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너 말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언쟁하여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 하늘에 올라가 네 둘째 오라버니에게 네가 짐을 괴롭혔다고 말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느냐? 어렸을 때 너 또한 짐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그리고 지금도 짐은 네 형님이다."송석석은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이제 와서 형님이라 하다니……"왕비님, 일어나십시오." 오 대반이 곁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자, 송석석이 일어나고는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았다.반면, 숙청제는 여전히 고통을 참지 못해, 손을 들어 그녀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한 뒤, 우원정을 불러들였다.잠시 후 들려오는 고통의 신음소리에 송석석은 한동안 멈춰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황제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다. 때로는 군주이자 형님 같았고, 때로는 그렇게
송석석이 태후에게 말했다. "단신의께서 궁에 들어오신다면 분명 최선을 다해 치료하실 겁니다."넋이 나간 채 있던 태후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쏟아졌다. "최선을 다해도 생명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 그저 조금만 더 오래 살게 해주어 국본의 큰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태후의 눈물을 보자 송석석도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 모친께 듣기로, 태후는 강인한 성품을 가진 여성이라 큰 일에도 눈물 한 방울 쉽게 흘리지 않으신다고 하였다.송석석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이내 지금 태후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같은 시간, 사여묵은 약왕당에 가서 단신의를 만났다.오늘 궁에 호출된 후, 염선생이 약왕당에 가서 단신의에게 이 일을 바로 알렸기에 단신의는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이번에 제자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서 사여묵을 따라나섰다.청작과 홍작은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단신의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돌려보냈다.마차 안에서 사여묵은 단신의에게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살펴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진짜 머리가 잘리게 된다면 그것 또한 제 선택입니다.""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러자 사여묵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모시고 온 것이니, 가실 때 또한 반드시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잠근 후, 마차의 부드러운 방석에 기대어 앉았는데, 그의 눈빛은 어두웠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보이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단신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운지입니다. 세 살에 약방를 외우고 다섯 살에 모든 약초를 다 알았으며, 열여섯에 출사하여 스물다섯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자야 말로 진정한 신의였지요."사여묵은 등을 곧게 펴고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의관은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하며, 병을 치료할 때 신분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눈에는 장사꾼
건양궁에서 우원정과 임 태의가 한쪽에 서 있고, 사여묵과 오 대반도 침상 옆에서 조용히 단신의가 진맥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단신의는 진맥을 마친 후, 이전의 진단 기록과 약 처방에 대해 묻자, 임 태의가 바로 그것을 가져다주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천천히 보십시오, 단의관.”이 궁 안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감히 그를 신의라고 부를 수 없었다. 태의원이 한 차례 피바람을 겪었었기 때문이다.단신의는 그것을 받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고, 전각에는 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만약 단신의가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숙청제는 긴장하지 않은 듯 보였지만, 동공은 살짝 줄어들었고 손에는 땀이 가득했다.그는 마지막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단신의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모두 읽어본 후,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진단 기록에 따르면 통증이 한 달 이상 지속되었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이는 숙청제의 진술이었지만 진단 기록에도 쓰여 있었으므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는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방법이 있다는 말을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그러나 단신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다시 약 처방 기록을 처음부터 살펴보았다.특히나 우원정과 임 태의가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에게 내렸던 처방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들이 시도했던 몇 가지 치료 방안은 모두 일반적인 처방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단 백부, 어떻습니까?” 사여묵도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상 옆에 앉아 마치 자신의 넓은 몸으로 숙청제를 무엇인가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기에, 예의에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
숙청제는 잠시 침묵한 후, 곁채를 정리하라고 명했다. 동시에 태병원의 의관을 보내 그의 시중을 들게 하였으며, 장기문과 척귀를 보내 직접 그를 보호하며 동행하게 했다.그는 장기문이 시만자를 사부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기문을 시켜 단신의를 보호하도록 한 것은 단신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단신의가 안심해야 숙청제 자신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척귀까지 보냈다.그는 또한 태병원 전체가 단신의에게 협력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삼게 했다.이 권한은 매우 컸지만, 사실 숙청제는 태병원에서 제공하는 약을 사용하기를 원했다.단신의는 이를 개의치 않았고, 단지 명령한 일이 실행되기만을 바랐다.하지만 숙청제가 장기문과 척귀를 보낸 것을 보면, 그가 후궁의 사람들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제 그는 단신의와 한 목숨이 되었다. 단신의가 죽으면 그도 죽고, 단신의가 살면 그는 적어도 삼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말이다.삼 년은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많은 준비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단신의 일정을 정리한 후, 그들은 침전에서 치료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태병원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학생처럼 단신의의 곁에 모여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그러자 단신의가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통증을 멈추는 것입니다. 통증을 멈추지 못하면 살아도 고통뿐이니까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통증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정에 나가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며, 이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통증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숙청제의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그는 이미 거의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통증을 멈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약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침을 놓아 혈을 막아 통증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궁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혈을 한 번 막고 나면 두 시진마
그들이 흥분하는 사이, 그들은 깨달았다. 단신의가 침 놓는 것을 보나 마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단신의는 각 손가락 사이에 침을 한 개씩 끼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개의 침을 모두 놓았다. 그들은 마치 단 한 손의 환영만 본 듯했고, 모든 것이 이미 끝나 있었다.네 개의 혈은 서로 멀지 않았지만, 먼저 혈을 정확히 찾아내고 신중하게 침을 놓아야 했다. 아무리 빠르게 하더라도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숨에 네 개의 침을 안정적으로 놓았다.침을 다 놓은 후, 그는 숙청제에게 쾌적단을 주어 통증을 완화시켰다.그러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숙청제의 안색이 조금 나아졌으며 더 이상 창백해지지 않았다.단신의는 침을 뽑은 후 처방을 내리고는, 약상자에서 한 병의 단설환을 꺼내며 말했다.“모두 이 단설환이 심맥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원기를 기르며 오장육부를 돕는 효과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앞으로 강한 약을 사용하실 테니 단설환으로 간과 신장을 보호해야 합니다. 원래는 일주일에 한 알씩 복용해야 하지만, 지금 단설환이 부족한 관계로 제가 보관해 둔 것까지 꺼내서 사용할 것입니다. 나중에 약재를 구하면 다시 천천히 제조할 것입니다.”모두가 단설환이 귀중한 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왕당에서도 지금은 이 약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한 병은 단신의의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통증이 완화되자, 숙청제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상을 내리려 했지만, 무슨 상을 내릴지 말하기도 전에 단신의는 황제께 휴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 지쳐 있었다.숙청제는 잠시 당황했지만, 금은보화로 상을 내리는 것 또한 속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단설환을 먹은 후, 숙청제는 단신의를 데려가 쉬게 하라고 명하였고 오직 사여묵만을 전각에 남겼다.그는 오 대반에게 장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제 통증이 많이 줄어들어 정사를 처리할 정신이 생긴 모양이었다.사여묵은 의자를 가져와 송석석이 앉아있
숙청제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점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단신의는 짐이 아직 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지. 원래 태의들은 짐이 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결과는 고작 반년이었다. 짐이 생각하기에, 의관들의 말이 짐에게 적용될 때 항상 반으로 줄여서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일 년 반, 어쩌면 그조차도 못 살지 모르지.”“황형,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그러자 숙청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짐의 말부터 먼저 들어보거라. 짐은 지금 머리가 매우 맑은 상태이며 혼란스럽지도 않다. 태자를 세우는 일도 서둘러야 하지만 누구를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며, 신임황제가 집정을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다. 승상도 늙었으니 종사를 그 누구에게 맡겨도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너 말고는 아무도.”사여묵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형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모두 일정한 규칙 없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짐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으니, 적장자가 있어 국본 문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대황자는 너무나 평범하다. 평범하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는 게으르고 오만하며 이기적이지. 큰 뜻이 없고 귀가 얇아서 일곱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젖을 갓 뗀 아이 같으니. 그의 황조모와 태부가 열심히 가르치지만, 그를 억압하는 정도이지 바꿀 수는 없었다. 황후가 옆에서 조금만 귀여워해 주면,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심해지지.”“반면, 이황자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효심이 지극하고 덕이 깊다.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학당에 들어가자마자 글을 잘 짓기 시작했다더군. 덕비가 그를 많이 가르친 게 분명하다."“그리고 삼황자는 아직 너무 어려서, 겨우 세 살이라 품성을 알 수 없다.”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분명 대황자에게 매우 실망하고 있었지만, 아직 절망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숙청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대황자는
사여묵이 말했다.“그렇다면 황형께서는 지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숙청제가 대답했다.“만약 짐의 수명이 원래 생각했던 대로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짐은 대황자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너를 섭정왕으로 삼아 몇 명의 보좌 대신을 세우고, 이황자를 남강으로 분봉하여 보낸 후, 황후를 폐위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면 제씨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사여묵이 말했다.“그렇지만 신은 그 큰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가 섭정왕이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어떤 요구가 따를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식을 낳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가 제위를 찬탈한다 해도 나중에는 다시 되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숙청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네게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참 많구나. 짐은 네가 평생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하길 바랐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사여묵은 그의 뜻을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아이를 낳는 것은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석석에게 있었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기에 약속을 할 수 없었으며, 맹세를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숙청제는 마치 그가 모르는 것처럼, 분명하게 말을 전했다.“너도 알다시피 이 말은 네가 살아있는 한, 제왕의 권력이 네게 있음을 의미한다. 네가 제위에 오른다 해도 아무도 너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원래 계획했던 것은 너를 대우하기 위한 것이다. 자식은 없지만 제왕의 권력을 가지는 것이지.”사여묵이 물었다.“이것이 폐하의 원래 생각이라고 하신다면, 지금은 어떠십니까?”숙청제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그가 섭정왕의 자리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다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지금은 단신의의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지켜보려 한다. 하지만 단신의가 궁에 들어오면, 조정의 신하들도 짐에게 태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